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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함께 봅시다, <빠드레 빠드로네>!

[새벽바다의 영화읽기] 이탈리아 타비아니 형제의 <빠드레 빠드로네>

새벽바다 시골잡학덕후( jbchamsori@gmail.com) 2015.06.10 17:36

1977년 작품 <빠드레 빠드로네>는 이탈리아의 거장 타비아니 형제의 대표작이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전통을 따르며, 소리 및 음악의 사용을 독특하게 처리했다. 그래서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신선함을 주는 영화다. 물론 액자식 구성을 절묘하게 사용하여 객관적 거리를 확보한 점도 눈에 띄는 영화다.

 

<네오리얼리즘 : 세계대전 후의 비참한 현실을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해 현장에서 촬영하여 리얼리티를 높였던 일련의 이탈리아 극영화 경향을 이름>

 

<빠드레 빠르로네>에 대해 쓸 수밖에 없는가?

 

이런 좋은 작품인 <빠드레 빠드로네>에 대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생각이 정체되고, 자꾸 글쓰기를 미루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왜 그랬을까?

 

첫째 이유는 이번 연재를 준비하면서 마련했던 영화 선정 기준을 어겼기 때문이다. 내 영화 선정 기준은 저평가되었거나, 가벼워 보이지만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일단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이미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에 더해 97년 국내에 소개된 이래로 많은 영화 마니아들에게 좋은 평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둘째 이유는 이 영화는 폭이 넓으면서 깊이도 만만치 않아 나의 역량으로는 이런 좋은 작품을 온전하게 소개할 힘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소설 <토지>가 그 깊이와 폭이 훼손되지 않고 완성도 높은 한 편의 영화로 다시 태어났는데 그런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느낌이랄까?

 

그런데도 쓰고 싶었다. 흔히 말하는 예술영화지만 재치 있고 재밌어서 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하는 바람에 그랬고, 도전해 보고 싶은 욕심 때문에 그랬다. 이제 영화의 재미와 깊이 그리고 그 폭을 함께 느껴보자. (잘 될지는 모르지만...) 
 

영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하게 스토리를 요약하자. 가비노라는 가난한 섬마을 소작농의 아이는 공부하던 학교에서 끌려나와 깊은 산골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갖은 고생을 하다가 경제적인 이유로 군대에 가게 된다. 문맹인 것 뿐 아니라 섬마을 사투리 밖에 몰라 군대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그를 도와주는 케사르(난니 모레티가 이 역할을 했는데 그는 나중에 유명한 감독되어 <아들의 방>이라는 작품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덕에 문맹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 그리스어, 라틴어까지 배우는 지식인이 된다. 제대하고 다시 고향에 돌아온 가비노는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게 되고 결국 대학에 가서 언어학자가 된 뒤 고향에 돌아와 자신에 대한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양을 치던 산골 언덕에 앉아 있는 빨간 자켓을 입은 가비노의 등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빠드레 빠드로네>는 막을 내린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부자가 사는 모습

 

이제 인상 깊은 몇몇 장면을 통해 영화를 조금 맛보자. 첫 장면. 언어학자인 가비노가 쓴 자전적 소설이 영화화되고 있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현재의 가비노가 아버지 역의 배우에게 회초리를 챙겨주며 영화 촬영이 시작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속설에 딱 들어맞는 가비노의 아버지는 학교는 먹고사는 일에 도움이 안 된다며 수업 받는 가비노를 끌고 나온다. (이때 교실의 다른 아이들의 생각을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는 사운드 몽타주는 재치 있음. “우린 부자니까 소가 두 마리나 있어” “신이여 제발 아빠를 죽게 해 주세요” - 요즘 논란이 되었던 잔혹동시를 생각나게 함. 디테일에 있어 요즘 공포 영화 스타일이 된 것 말고는 비슷한 생각일 것임.)

 

공포에 떨며 바지에 오줌을 싸는 창피를 당하게 되는 가비노는 어머니(아들의 성기를 두고 농담을 하는 다소 경박한 느낌이 나는 어머니로 신사임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어머니임.)와 형제들과 떨어져 외딴 산골에 아버지와 단둘이서 양치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고향에 돌아온 가비노가 자신에 관한 영화를 찍는데, 이 장면의 다른 해석을 보여준다. 아이들이 오줌 싼 가비노를 소리 내어 비웃고 있을 때, 다시 교실로 들어가 가부장적 언행으로 여자 선생님을 압도하고 아이들에게 다음은 너희가 끌려갈 차례라고 으름장을 놓는 아버지를, 공포의 대상이 아닌, 자식이 웃음거리가 되는 게 너무나도 싫은 아버지, 무식하지만 자식을 사랑하기에 용감한 아버지로 재해석한다. 이를 통해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가 싫지만, 또 그 아버지 덕을 보기도 했고 그래서 아버지가 좋았던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적 해부가 일어난다.

 

아버지를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비하하지도 않는 이 객관적 거리를 통해 획득되는 아버지와 나와의 통합. 현실적 한계를 부정하지 않고 허세를 부리지도 않는 지성적 태도 내지는 균형감. 살면서 이런 자기객관화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적어도 인생의 주인공의 될 자격은 충분할 것이다. 어쩌면 이 순간이 니체가 말했던 자신의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위대한 정오일지도 모른다. “위버멘쉬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다른 장면. 양치기로서 배워야 할 첫 번째는 각종 소리에 민감해지는 일. 아버지는 무식하지만 소리를 구별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바람소리, 계곡의 물소리 등 여러 소리가 섞여 있는 가운데 각각의 소리를 구별하는 훈련은 마치 교향곡의 각각의 악기 소리를 구별하여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후에 그가 언어학자로서 성공하는 밑바탕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산 속의 여러 소리를 들으며 리듬을 타는 가비노의 뒷모습을 보여주고 이어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이어 붙인 장면은 이를 잘 정리해주고 있다.

 

하루는 아버지가 마을에 볼 일이 있으니 혼자서 양을 지키라고 한다. 가비노는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적막한 산 속에 그것도 밤중에 있게 되고 엄청난 고립감과 공포감에 압도되어 집으로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버지의 훈련 방법이었다. 몰래 숨어있다가 도망치는 가비노를 덮쳐 무차별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

 

어떤 때는 양을 지키지 않고 가까이에서 양을 치는 다른 친구와 놀았던 일을 들키게 된다. 아버지는 회초리가 없어 주위에 떨어져 있는 잎이 달려 있는 나뭇가지로 때리려 한다. 하지만 오두막 주위를 뱅뱅 돌며 도망가는 가비노를 따라가지 못하는 아버지가 오두막 안에 숨어서 사라진 척을 하고, 가비노는 순간 아버지가 없는 적막함에 압도되어 멈추어 선다. 이때 갑자기 달려 나와 가비노에게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 그리고 전혀 저항하지 않고 쓰러질 때까지 맞는 가비노. 쓰러진 가비노를 안고 다시는 때리지 않겠다고 아버지는 중얼거린다.

 

가비노는 왜 저항하지 않았을까? 대개 이 영화를 같이 보았던 사람들은 이 장면을 궁금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장면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아버지에 대한 다층적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 영화를 보고 서로 얘기를 나누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재미난 장면 중에 이런 것도 있다. 염소의 젖을 짜면서 우유에 똥을 빠뜨리는 염소와 깨끗한 우유를 짜내지 못하면 아버지의 폭력을 감당해야 할 가비노 사이의 우스꽝스러운 대결 장면이다. 염소의 생각이 내레이션으로 처리되면서 가부장 사회의 폭력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실력이 정말 탁월하다. (나중에 군대를 다녀온 가비노가 고향에 돌아와 염소의 젖을 짤 때와 대칭을 이루게 되는데 이때 가비노는 이전과 달리 인내심을 보인다. 이는 지성을 통해 사회의 폭력적 구조를 끊어내는 과정에 대한 적절한 인유일 것임.)

 

이 아이가 어느 덧 자라 청년이 된 어느 날, 혼자 양을 지키고 있는데 그 옆을 지나가는 아코디언 연주자 둘. 처음 들어본 소리에 매료된 그는 (많은 악기 중에 아코디언인 이유는, 음악을 잘 모르지만, 하나의 악기로 다양한 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고 이것이 가비노가 익숙한 자연의 화음에 가깝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양 두 마리와 아코디언을 교환하는 사고를 친다. 칼로 입술에 상처를 내고 도둑에게 양을 빼앗겼다고 둘러대는 가비노는 모자를 벗으려 손을 올리는 아버지의 몸짓에 흠칫 놀란다. 아버지는 가비노를 의심하지만 먹을 것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벌을 주는 선에서 정리한다.

 

나중에 가비노가 제대하고 집에 돌아와 대학에 가겠다고 아버지와 싸울 때, 현실에 지쳐 힘이 빠진 채로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있고,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그 침대 밑에 있는 가방을 가지고 나와야 하는 때가 온다. 가비노는 용감하게 아버지의 침대로 가서 무릎을 꿇고 가방을 뒤지는데 아버지가 처음엔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다가 주먹을 쥐고 머리를 때리려는 몸짓을 한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와 같이 압축적으로 또 재밌게 그리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혹자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떠올리기도 하는데, 이 그림을 뒤집어 놓은 설정이 더 큰 재미를 준다고도 한다.

 

아무튼 이 외에도 예수상을 짊어지고 가는 동네 젊은이들의 대화 장면과 그 예수의 얼굴이 갑자기 가비노의 아버지 얼굴로 바뀌는 재미난 장면, 지주가 죽는 장면, 지주의 장례를 치르는 중에 서로 다른 꿈을 꾸는 가비노의 가족들의 속마음을 보여주는 장면, 아버지가 농사를 망치고 은행에 대출 받으러 온 가족을 끌고 와서는 자신의 똑똑함을 자랑하기 위해 가비노에게 구구단을 시키는 장면, 군대에서 라틴어를 배우면서 사전을 외우고 어휘의 성장과 더불어 사고가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신비로운 장면(여기서 영화 제목 <빠드레 빠드로네>를 이해할 수 있는데, 마치 사전에 등장한 연접한 단어들을 외우는 가비노의 말들과 유사하며, 그 의미는 아버지 주인인데, 가부장의 모순을 확인하게 되는 가비노의 공부과정의 압축이라고 할 수 있음.)들이 사회의 모순과 가부장제의 모순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원초적인 욕망들을 재밌고도 깊이 있게 또 폭 넓게 그려내고 있다.

 

어쭙잖은 나의 글 솜씨로 이런 걸작을 소개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졸고로라도 이 작품을 보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면 무엇이 부끄럽겠는가? 그저 함께 즐기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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