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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나의 징비록: 경상남도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고영남( icomn@icomn.net) 2019.08.01 19:38

지난 7월 19일, 박종훈 경남도교육감이 2년간 준비하여 발의한 ‘경상남도 학생인권 조례안’(이하에서는 ‘경남조례안’이라고 함)이 <경남도의회>에서 폐기되었다. 세 번째 죽음이다. 이 칼럼은 그 죽음에 대한 애도의 글이자, 나와 우리 모두를 위한 징비록(懲毖錄)이다.

 

애통한 시간들

 

지난 10여 년을 되돌아본다.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고자 2008년부터 시작한 경남지역에서의 운동은, 일몰제로 사라진 <경상남도 교육위원회>에서 청원에 실패하면서 첫 고배를 든 적이 있다(2010년 2월). 당시 <경남교육연대>는 학생인권의 당사자인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광범위한 학생인권 실태조사결과를 토대로 조례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조례의 구체적인 내용을 성안하여 진보적 교육위원을 통해 조례안을 발의토록 노력하였으나 단 한 번의 설명기회를 끝으로 그 귀한 조례의 시안은 처참하게 버려졌다. 두 번째는 2010년 10월 제정된 ‘경기도학생인권조례’의 운동이 보여준 희망으로부터 힘을 얻어 주민발의를 통해 경남조례를 제정하고자 운동했던 2010년부터 2012년까지를 말한다. 경남지역의 교육시민사회는 <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경남본부>를 결성하여(2011년 5월) 경남조례안을 만든 후 6개월 동안 4만 명 가까운 서명을 받으며 주민발의를 하는 데 성공하였지만(2012년 4월) 상임위원회의 첫 문턱을 넘지 못하고 부결되었다(이런 흐름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윤남식·김소진, “경남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의 역사와 과제”, *민주법학*, 제69호, 2019, 361쪽 이하를 참고할 것). 4만 명 가까운 유권자의 반란을 지켜본 정치권은 뻔한 말로 위로하였으나 경남지역에서의 학생인권조례제정 운동은 그야말로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그 어느 누구도 운동 차원은 고사하고 인권담론조차 꺼내지 않았다.

진관련 사진(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촛불시민연대 제공)_Page_01.jpg

 

진보교육감의 시대

 

2014년 경남에서의 첫 진보교육감 당선을 일군 박종훈 교육감은 임기가 끝나기 직전 직접 기자회견을 하면서(2017년 11월 2일)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을 포함한 인권 친화적 학교문화조성을 위한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인권 친화적 학교문화 조성을 위한 종합계획 TF팀>을 구성한다고 발표하였다. 물론 교육시민사회는 여전히 암흑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하여 <경남교육연대>와 <학생인권조례제정경남본부>에서 활동하였던 전문가와 활동가들은 진보교육감의 정치적 역량을 믿으며 위 TF팀의 조례분과에 합류하여 새로운 학생인권실태조사를 기초로 경남조례안의 시안을 만들었다(2018년 3월). 하지만 6월로 예정된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둔 정치적 일정 때문에 조례안발의의 시의성을 상실하면서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2018년 지방선거에서 경남도민들은 촛불의 힘을 이어받아 도의회의 권력은 물론이거니와 도지사 또한 교체하며 진보교육감의 여유 있는 재선을 이끌었다. 박종훈 교육감은 지방선거를 마치고 직무에 복귀하자마자 경남조례안을 곧 발의하겠다며 <경남학생인권조례제정추진단>을 결성하고 발의에 필요한 실무 작업에 착수하였다. 한편 TF팀 조례분과에 합류하였던 시민사회의 활동가와 전문가들 역시 토론 끝에 추진단의 합류제안을 수용하고 다시 한 번 완성도 높은 경남조례안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어쩌면 세 번째 비극은 여기에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 비극이란 경남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기 위한 세 번째 운동이 실패하였다는 데에서 나타난 평가에 대한 비유이다. 그래서 이 글은 절반의 평가인 셈이다. 
이 글은 길게는 2008년부터 시작된 첫 실패, 2012년 실패, 그리고 이번의 세 번째 실패를 모두 경험한 나의 평가이자 우리 모두를 위한 징비록(懲毖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실패와 비극 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뿌렸고 작은 열매도 얻었지만 지역운동에 남긴 그 비극이 너무 큰 탓에 그 실패의 배경이나 원인 등을 중심으로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짧은 글이나마 남겨 두고자 한다. 크게 세 개로 나눠 살펴본다. 

진관련 사진(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촛불시민연대 제공)_Page_02.jpg

 

누가 진보교육을 이끄나?

 

먼저, 진보교육의 주체에 관한 질문이다. 진보교육감의 당선은 진보교육의 완성 그 자체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경험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진보교육감의 당선은 진보교육으로 다가서는 데 필요한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교육으로 채워진 지방교육자치가 완성되려면 교육에 관한 권력이 완전히 지방자치의 주역인 주민들에게 이양되어야 한다. 학교교육의 책무는 의심의 여지없이 교사에게 있다. 아울러 학생을 비롯한 학습자로 구성된 교육당사자들이 진보교육의 주체로 우뚝 서야 한다. 즉, 학교교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권력관계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에 따라 재구조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학부모 역시 자율적 결사체로서 다양한 학부모의 모임이나 시민단체에 참여함으로써 마찬가지로 지역의 시민사회도 교육공공성을 옹호하는 시민단체나 포럼 등을 운영함으로써 진보교육을 완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교육을 구현하고자 하는 교육주체들의 역할은 말잔치에 그칠 뿐 실제에는 그렇지 않다. 그 원인은 교육주체들의 소통과 연대를 교육감선거를 위한 전제조건 내지 정치적 도구로만 좁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2014년도 그렇고 2018년 선거에서도 그랬다.
결국 교육의제가 진보교육주체에 의하여 다루어지지 않은 채 표류하다 교육자치의 권력을 독점한 교육감에게 매몰되기 시작하면서 경남조례안의 실패가 사실상 예견되었다고 본다면 너무 가혹한 평가인가? 경남 진보교육의 주체들은 진보교육감의 시대를 경험하면서 진보교육의 주체를 교육감에게 지나치게 집중시키는 한계를 보였다. 대부분의 시민사회와 노동조합들은 도지사를 비롯하여 도의회의 권력까지 촛불진영이 장악하게 된 정세의 외형만 믿고 바닥의 흐름을 외면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육단체를 비롯한 교육시민사회조차 마치 블랙홀로 휩쓸려 가버리듯 진보교육감을 견인하지 못했다. 활동을 재개한 <경남교육연대>의 분투도 있었지만 이미 권력이 되어버린 진보교육감을 중심으로 재편되어가는 진보교육의 재구조화를 견인하거나 저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 설정한 ‘학생인권의 보장’이라는 정치적 공약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정치적 의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정세분석능력마저 상실한 채 나를 포함한 전문가와 활동가조차 교육감이 요구하는 TF팀이나 추진단에 빨려들어 갈 수밖에 없었고, 우리 스스로 결성한 <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촛불시민연대>나 <전교조>조차도 경남조례안 제정운동의 정세를 전혀 주도하지 못하였으며, 더욱이 하청이나 보조적 역할에 만족하며 승리만을 꿈꾸는 순진한 욕심쟁이로 전락하였다. 이는 역량이나 능력의 부족이라기보다는 ‘누가 진보교육을 이끄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경남조례안의 내용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를 언제 발의하는 게 시의적절한지 그리고 공청회 내지 설명회는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지 등은 모든 교육주체들의 고민과 역량검토 속에서 결정되어야 했다. 경남조례안을 교육감이 발의한다고 해서 모든 교육정세를 교육감이나 교육청이 독점하여 분석하거나 판단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진보교육감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진보교육의 의제와 그 운동역량을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 등 시민사회의 굳건한 연대에서 찾아냈다면, 그리고 여기에서 그 운동을 주도하였다면 이러한 결과가 초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교육주체의 성장, 성숙한 연대 외에도 공간이 넓은 경남의 특성상 지역·도시별 작은 연대체의 활동이 요구되었다. 그렇다고 교육감의 발의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다. 주민발의를 하더라도 진보교육의 주체에 대한 이해가 좁았다면 그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진관련 사진(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촛불시민연대 제공)_Page_09.jpg

 

정치적 결단보다 앞서야 하는 진보교육의 고민거리

 

그다음으로 실패에 대한 평가로 검토되어야 할 쟁점은 위의 지적과 연관되나 독립적으로 다루어야 할 듯하다. 경상남도의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여야겠다는 의지와 그 정당성을 굳이 따질 이유가 없다고 하여 그 정당성이 경남조례안의 제정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운동은 조례 하나를 제정하여 공포한다고 해서 완성될 사안이 결코 아님을, 이미 앞선 지역에서의 경험이 그 답을 주고 있다. 법률이나 조례는 이것을 제정하는 순간 이미 과거의 현실을 반영한 규범에 불과하게 되며 미래의 다양한 변화를 포섭하거나 규율하는 데 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비록 과거의 현실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경남학생인권조례의 시행을 맞이할 교육주체들의 이해와 준비가 부족하다면 경남조례안의 제정 그것만으로는 어쩌면 갈등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모든 법률이나 조례를 제정할 때마다 이해당사자들의 준비 여부를 정확하게 검토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생활문화의 혁명을 도모할지 모를 인권규범을 스스로 도입하는 데 학교의 교육주체들이 이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다는 교육적·정치적 판단이 먼저 확보되어야 함은 매우 당연하다. 과연 박종훈 교육감이 경남조례안의 발의를 발표할 때 교육주체들의 수용능력을 어느 정도 판단했을까? 교육주체들의 오랜 염원이기 때문에, 인권보장을 주장하는 데 그 정당성을 따로 따질 이유가 없기 때문에, 더욱이 진보교육감으로 재선까지 되었다면 이미 도민들로부터 경남조례안의 제정에 관해서는 정치적 승인을 받은 것이나 다름 아니라는 정치적 판단을 하였기 때문인가. 
박 교육감은 경남조례안의 제정과 관련하여 두 번의 정치 결단을 드러내었다. 2017년 6월 21일 N여고에서 담임교사가 학생들 몰래 원격촬영 동영상 카메라를 설치했다가 학생들에게 적발되었다. 이후 몇 달간 진실게임을 벌이던 이 사건을 포함하여 학생인권 침해사례가 근절되지 않는 현실과 관련하여 도교육청이 재발방지를 모색한다는 의미에서, 박 교육감이 경남조례안 TF팀의 구성을 포함하는 ‘인권 친화적 학교문화조성을 위한 종합계획’을 2017년 11월 2일 발표하게 되었다. 2014년 지방선거 당시만 해도 경남의 첫 진보교육감이 준비한 주요 공약에서 경남조례안의 제정 의지를 찾아볼 수는 없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다소 뜬금없었던 선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인권의 보장을 염원하는 시민사회는 지지를 보냈고 기꺼이 TF팀으로 합류하는 결코 ‘정치적이지 않은’ 판단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평가가 가능한 것은 정무적 판단에 익숙한 선출직 공무원인 박 교육감의 행보가 곧 예정된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 결단이었음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6월의 지방선거 전에 조례를 제정할 수 있는 정치적 일정은 전혀 확보되지 않았기에, 2017년 11월의 이런 선포는 ‘누가 차기 진보교육감의 단일후보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매우 강렬한 의지를 민주진보진영과 그 유권자에게 던졌다고 해석해야 매우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시의적절한 정치 결단은 필요할지 모르나, 나는 진보교육이 진정 앞을 향해 걸어가기 위해서는 그것이 주체들의 운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이 2014년 선거 당시 주요 공약에 들어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2017년부터 불기 시작한 인권의 바람을 배경으로 경남에서의 학생인권담론을 제창할 수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남조례안을 위한 주체들의 준비역량이 모자라다는 점, 그리고 2014년 이후 도교육청과 경남도의회의 정치적 관계가 매우 암울한 상태였다는 점 등을 고려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마치 2018년 지방선거 전에 조례제정을 마무리하려는 듯한 자세를 도민들에게 보여주지는 않았어야 정치적 상식에 부합된다. 다시 말해서 2018년 6월 지방선거 전까지는 광범위한 학생인권실태조사와 이에 기초한 경남학생인권조례의 시안을 완성하는 데 주력하고 2018년 6월 지방선거에서 도의회 등에서의 세력판도에 반전이 일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정도의 인식이 적절하지 않았을까.
두 번째 정치 결단은 2018년 지방선거 직후에 이루어진다. <경남촛불교육감 범도민추진위원회>는 경남의 제2기 진보교육감의 후보로 등장한 박 교육감과 차재원 전 전교조 경남지부장의 단일화경선을 주관하여 마침내 박 교육감을 단일후보로 선정하였다. 단일화 경선을 마치며 두 후보와 추진위원회는 ‘경남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을 포함하여 임기 안에 실천할 8개의 주요 공동정책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학생인권조례제정 사업이 시민사회와의 공동정책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효투표의 절반 가까운 득표로 여유롭게 재선에 성공한 박 교육감은 직무에 복귀하자마자 취임 2기의 핵심목표인 ‘미래교육은 학생인권조례로부터 출발’한다며 경남학생인권조례의 추진을 선포한다. 누구든지 흔들릴 수 있는 정세의 반전이 존재하였었다고 본다. 도지사는 물론 도의회의 권력도 교체되었다. 경남에서는 처음 보는 정치 현상이었다. 교육감과 도지사의 경우는 충분히 예상되었던 선거결과였지만 도의회의 권력이 이렇게 교체되다보니 경남조례안을 둘러싼 정치 결단은 신속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경남조례안의 7월 19일 폐기는 2018년 지방선거 승리 후 1년의 운동이 실패했음을 알리는 경남도의회의 정치적 배신이자, 1년 전 경남조례안의 제정을 공언한 정치 결단의 오류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 오류의 핵심은 경남조례안의 제정에 필요한 교육정세를 정확하게 읽는 데 실패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 교육감은 교육주체들의 이해와 역량을 전혀 검토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다음으로 박 교육감은 권력 교체에 성공한 경남도의회의 정치적 역량을 비판적으로 견인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데 명백하게 실패하였다. 58명의 도의원(더불어민주당 34명, 정의당 1명, 자유한국당 21명, 무소속이 2명) 가운데 범여권이 35명이나 확보되다 보니 이들이 모두 경남조례안의 제정을 지지할 것이라는 정치적 판단을 쉽게 하였던 듯하다. 그러나 이런 판단의 오류는 시간이 흐를수록 수차례 확인되었다. 첫째, 경남도의회 교육위원회는 지난 5월 15일 경남학생인권조례제정안에 대한 심의를 한 끝에 찬성 3명 반대 6명으로 부결시켰는데, 더불어민주당 소속 도의원 5명 중 표병호·송순호·김경수 도의원만 찬성표를 던졌고 장규석·원성일 의원은 반대표에 합류하였다. 둘째, 상임위원회가 부결하였어도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도의회 의장이 직권상정하거나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상정을 요구해도 경남조례안의 제정 여부를 본회의에서 다룰 수 있었는데 끝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더욱이 김지수 도의장은 6월 4일 스스로 직권상정을 거부하였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경남도당은 즉각 입장문을 내어 김지수 도의장의 거부입장을 적극 지지한다며 박 교육감의 정치 결단에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이 경남조례안을 지지할 것이라는 판단의 오류 중 중요한 점은 이러한 도의원들의 심의·의결행위 자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회의구조 속에서 경남조례안의 향배를 스스로 논의하긴 하였으나 정작 그들이 주도하여 경남조례안의 내용을 주민들과 심각하게 토론한 적 없다. 그들은 마치 사법부의 법대 위에 앉은 판사마냥 피 흘리며 싸우는 격투기 선수들을 관점하며 승패를 판정할 시간만 재고 있었다. 더불어민주당뿐만 아니라 도의원 58명은 결코 법원의 판사가 아니다. 도의원은 사법권을 행사하는 법원에 소속된 게 아니라, 광역지방의회에 소속되어 있다. 지방의회의 의결사항 중 가장 중요한 게 ‘조례의 제정, 개정 및 폐지’다. 그리고 그 의결에 앞서 충분한 심의활동을 하여야 한다. 그들은 이번 경남조례안이 주민들 사이에서 찬반대립이 심하다, 여론이나 학부모 목소리 청취 등 충분한 협의과정이 미흡하다, 교사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았다는 등의 회피성 발언을 할 뿐, 중요한 경남조례안의 제정 여부에 필요한 공식적인 의견청취, 토론회를 주관한 적이 없다. 이번 도의원들이 대부분 초선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식의 변명은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2018년 지방선거에 따른 도의회 권력의 교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판단의 오류는 너무나 뼈아프다.

진관련 사진(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촛불시민연대 제공)_Page_12.jpg

 

두 개의 정세에서 길을 잃은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
 
많은 이들은 이번 경남조례를 제정하는 데 실패한 주요 원인으로 예상보다 강력했던 보수기독교의 반발이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나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반발이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정도의 진단에는 동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하였던가? 이번 경남조례안을 둘러싸고 두 개의 전선이 있었는데, 박 교육감은 물론이고 촛불시민연대 등 조례제정의 주체들이 상수와 변수를 바꿔 이해하였다고 생각한다. 
경남조례안 제정의 주된 전선은 다름 아니라 학교현장이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학생인권보장과 관련하여 ‘학생인권의 신장은 교권을 위축시키거나 제한할 것’이라는 담론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더욱이 학생의 학습권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창의적이고 적극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교육공동체의 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교사들은 새로운 교육과 배움의 모형을 위한 시도에 신심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생활문화의 혁신을 모색하는 학생인권의 담론이 이러한 교사들의 지위를 더욱 어렵게 몰고 갔다는 진단은 쉽게 수용되었다. 이렇듯 진보적 교사와 시민사회는 학생인권과 진보교육의 상관성에 관하여 전혀 다르게 인식하였다. 시민사회에서는 <전교조>를 비롯한 진보적 교사라면 당연히 학생의 인권을 적극 지지할 것이라는 믿음에 의문을 두지 않았지만, 교사들은 달랐다. 교사들에게 학생의 인권을 지지하는 게 진보교육의 정체성으로 이해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보수 성향의 교사라고 해서 학생의 인권을 반대하는 것 역시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인권감수성 내지 인식은 그 차원을 전혀 달리하였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경남조례안의 입법예고 전후로 어떠한 변화도 교사 집단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주요 교원단체의 활동가들만 선전과 홍보에 최선을 다했을 뿐, ‘교복 입은 학생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보고자 하는 학생인권담론이 진전되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이번 경남조례안의 실패 후 제출된 여러 평가들을 보면 대체로 학교현장에서 인권담론이 크게 제고되었다고 하나,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강력한 규범의 요구에 대하여 동요하든지 수용하든지 학생생활문화에서의 주요 의제가 되었다는 점은 명확하지만 학생의 감정, 생각, 행동, 문화 등에서의 자유와 평등 가치를 ‘교사의 것처럼’ 또는 ‘교사만큼이라도’ 수용하겠다는 의지와 실천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한편 학생이나 청소년들의 요구는 거셌다. 그러나 그 요구가 결코 조직적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은 물론 경남의 모든 지역에서 균질하지도 않았다. 학교 밖의 청소년단체나 비상설적 조직에 의한 요구는 십수 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학생 인권의 보장을 외쳤지만 몇몇 학교를 제외하고는 학교현장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조직되지는 않았다. ‘학생다움’ 또는 ‘입시 걱정’ 때문에 학생인권담론의 입지가 어렵다는 지적도 있었으나 학생들을 향한 교사, 학부모(회)와 학교운영위원회, 학교관리자, 교육청, 시민사회 등의 합법적·비합법적 자극이 지속적으로 넓고 깊게 이어졌다면 학생들의 목소리는 분명 봇물 터지듯 솟아났을 것이다. 더 나아가 학교마다 크고 작은 인권동아리나 학습모임 등이 만들어졌어야 했다. 이렇듯 그 기운이 모이는 학교현장에서 학생인권담론이 의제로 정립되지 않는 한, 경남조례안은 그저 조례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고 그저 형식적·절차적 규범의 흐름에 끌려갔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교육청과 교육감은 교사와 학생 사이의 긴장과 토론을 이끌어내는 지혜와 용기를 끊임없이 제공하였어야 했다. 살아 있어야 할 학교현장에서의 전선이 간과되면서 경남조례안을 제정하고자 하는 동력은 결코 확보되지 않았다. ‘어떤 학생인권조례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담론이 형성되지 않았다. 학생인권조례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는 결코 이번 운동에서의 전선이 되어서는 안 되는 문제였다.
그런데 학교현장에서의 전선보다 더욱 중요하게 인식되어왔던 게 있다. 학교 밖의 반대 목소리를 어떻게 어느 정도 대응할지의 문제였다. 2017년 11월 박 교육감이 처음으로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의지를 보였을 때부터 일부 보수기독교는 매우 강력하고 조직적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드러냈다. 이 흐름은 박 교육감의 재선 후 더욱 거세게 이어지면서 공청회, 설명회, 도의회 발의, 도의회 심의 등 모든 단계마다 그들의 목소리는 집회 현장뿐만 아니라 교회당과 거리에서 넘쳐났다. ‘조례보다는 학교의 자율권을 존중하여야’ 한다는 점 외에 경청할만한 논리는 전혀 없었다. 왜곡과 가짜뉴스 등으로 포장되었으나 예상보다 강력하게 전파되는 반대의 목소리에 교육청과 촛불시민연대 등 경남조례안의 제정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문제는 이 와중에 이번 경남조례안 제정운동의 전선을 사실상 놓치게 되었다는 데 있다. 이들의 목소리로 전달되는 반대흐름을 차단하는 것 역시 중요하나, 무엇보다도 이번 운동의 전선은 교회당이나 거리가 아니라 학교현장인 점은 점점 잊혀 갔다. 학생인권조례를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를 둘러싼 진영싸움으로 학생인권담론이 흘러가면서 진작 학교현장에서 살아 있어야 할 ‘어떤 학생인권조례인지’의 토론이 사라져버렸다. 교육청조차 2차 권역별 설명회부터는 학생인권담론의 프레임을 스스로 찬반 싸움으로 설정하기 시작하였고, 도의회는 애초부터 그런 프레임에서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촛불시민연대나 여기에 가입된 110개 단체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거리에 붙인 현수막을 읽다 보면 우리 스스로 찬반 또는 지지·반대의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언론의 취재기사나 논설도 찬반 프레임에 포위된 채 진영싸움을 생중계하다시피 하여 무엇이 중요한지에 관한 언론의 역할은 거의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의 역사와 쟁점 등을 중심으로 ‘어떤 학생인권조례이어야 하는지’를 다루고자 했던 <경남도민일보> 이혜영·우귀화·민병욱 기자의 빛나는 취재와 탐사보도는 오래 기억될 것이다.

진관련 사진(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촛불시민연대 제공)_Page_24.jpg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실패의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반전을 낙관했던 이유는 우리의 운동이 옳다고 믿어서만이 아니다. 그 믿음 외에는 달리 마음 둘 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제는 실패가 명백히도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서 경기, 광주, 서울, 전북에 이어 학생인권조례의 당당한 후발주자가 되고자 했던 경남조례안 제정운동은 실패하였다. 그럼 앞으로 무엇을 어찌할 것인가? 이 실패에 대한 성찰과 평가에 공감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느슨하게 연대하는 수순이 예상된다. 학생의 인권에 한정하지 말고 소수자의 인권 전반을 지역에서 고민하는 보폭이 필요하다. 또한 인권의 전통적 가치를 넘어서는 인식의 확대와 꾸준한 실천 역시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이 징비록에서 다루었던 쟁점, 학생인권담론의 전선은 다름 아니라 학교현장이므로 교사와 학생이 학교 안팎의 인권 지평에서 어떻게 만날 것인지에 관한 지혜와 용기를 담아내야 한다. 시대에 따라 변수가 생기게 마련이긴 하지만 학교 안팎을 배제한 채 학생 인권의 고민을 갈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쟁점을 놓치는 순간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겠다는 의지는 공염불이 되며, 운이 좋아 조례를 제정하더라도 그것은 불행으로 뒤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학생 인권을 보장’하겠다는 것은 ‘학생의 생활문화에 대한 학교의 권력을 내려’ 놓겠다는 의지와 실천이기 때문에, 교사와 학교가 스스로 그 권력 작용을 버리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다. 학생인권의 보장은 그 조례나 법률이 제정되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꽃을 피워내려는 모든 이들의 존중·배려와 조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운동의 성과를 규범의 옷을 입었는가의 여부를 두고 다투는 관념은 쉽사리 바뀌지는 않을 듯하다. 따라서 향후 이번처럼 조례 제정을 시도할 수도 있고, 법률 차원에서 국가가 나서서 학생인권보장체계를 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어느 차원이든 경계해야 할 두 가지의 지점이 있기에 그것들을 미리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조례든 법률에서든 인권 쟁점의 구체적인 범위나 제한·예외사항 등을 학칙 또는 학교 자율에 위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매우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마치 학교의 자율권 내지 자치를 존중하는 듯 보이지만 이는 명분에 불과할 뿐,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관성에 관한 오해가 부르는 혼란만 생긴다. 제아무리 인권 감수성이 높은 정책이나 규정을 마련한다더라도 민주주의의 원리나 가치가 존중되지 않는 공간에서는, 다시 말해서 교장과 교사, 교사와 학생 사이에 권력이 작용하는 학교에서는 그 실효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다음으로 인권의 다양한 가치를 조례에서 규범화할 경우 특별규정을 둘 수는 있어도 원칙과 예외의 대립구도를 둬서는 안 된다. 그 대립구도가 빈번할수록 학생인권조례가 오히려 혼란을 야기하고 교육주체들 사이의 갈등을 유발할 수 있으며 행정력이 소모될 수도 있다.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겠다는 조례나 법률은 인권의 보편적 선언이자 강령이어야 하며, 더욱이 실천을 안내하는 지침이어야 한다. 다수의 위임규정이나 예외규정을 둬 형해화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한다. 나와 우리를 함께 되돌아보며, 학생을 존재하는 그 자체의 모순에서 벗어난 원래의 아름다운 인간으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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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남(인제대학교 공공인재학부 교수)

 

사진 : 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촛불시민연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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