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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불신과 과신의 사회를 넘어

이창수( icomn@icomn.net) 2020.02.25 09:26

한국 사회는 정치적으로 불신과 과신이 교차한다. 이는 상식적인 정책결정 조차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규정하여 결국 끝없는 ‘적대적인 공생’의 정치 문화와 지형을 만들어 놓았다. 정치를 비롯한 모든 공적인 시민으로서의 활동은 모두가 이런 대결 구조로 박제화 되어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껍질처럼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반대하는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극도로 불신을 표하고 자신이 속하거나 지지하는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과신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여기까지가 내가 보는 한국사회의 정치적인 지형에 대한 통론이다.

 

문 안쪽 소수의 불신과 과신구조: 과잉 정치화

 

나는 이런 정치적인 불신과 과신의 현상이 국가시스템과 공식적인 정치가 과잉 대표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부가 국가 정책과 정치의 과정과 결과를 독점하고 있는데 이 기제가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는 힘을 대표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소수의 정치인과 행정 관료가 독점하고 언론이 강고하게 만드는 이런 정치와 정책의 결정과 집행 그리고 평가라는 관행들은 결국 정치와 국가기관 특히 국회와 법원의 불신으로 이어진지 오래다. 정치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작동되지도 않는다. 공식적인 기구의 작용들은 이들 소수꾼들 놀잇감이 되었고, 이런 기구들은 독점 권력을 행사하는 집단에 속한다는 확인 절차에 불과하게 되었다. 어쨌든 시민 다수에게 권력을 분산하려는 개혁의 시도는 없다. 소수의 공간에 들어 올 때만 그런 개혁을 추진할 기회가 주어진다. 총선을 준비하는 정당들이 이른바 외부 영입인사라는 프레임으로 여러 가지 이벤트를 하는 것이 그런 현상이다. 일제강점기 신문 하단 광고에나 나올 법한 (정치)신인들의 유일한 등용문 구조와 유사하다. 이런 정치와 국가 권력을 소수가 독점하는 구조에서는 이 구조에 들어가는 ‘문’이 중요하다. 이 ‘문’을 지키고 여는 선택적으로 들여보내는 힘은 소수의 공식기구들의 문 안에 들어 사는 소수가 행사한다. 그리고 그 문 안에서 과신과 불신의 정파적인 투쟁이 이루어진다. 문 밖의 삶은 그저 장식이다. 이걸 소수가 정치를 과잉대표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국민이 원하는 개혁이 잘 되지 않는 이유이다.

 

문 밖에서 내통하는 자와 부수려는 자

 

이런 소수의 딱딱한 문 밖에 있는 시민 일반은 이 문 안의 공식 권력자들에 대해서 불신한다. 국회의원을 불신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법원이 신뢰받은 적이 있었던가? 그렇지만 개혁되지 않는다. 문 안에 있는 소수가 문 밖의 다수 가운데 일부를 포섭하는 공학에 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요한 전략은 필요 이상의 적을 만들고 악마화하고 불신을 만들면 된다. 진영 논리가 작동한다. 진영 논리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문 밖 사람들은 문에 들어갈 확률이 낮은 가운데 나름 생존 전략을 짠다. 마치 문 안쪽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문 안쪽의 소수와 내통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실질적인 힘이 없지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내통 관계에 속하는 문 밖 사람들도 일부에게만 주어진다. 정치 또는 공식 권력은 늘 희소해야만 가치가 있다는 관념도 광범하게 신념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신은 문을 깨고 벽을 허무는 개혁까지 가지 못한다. 또 이런 문의 안과 밖이 내통하는 자원이나 기회가 희소하기 때문에 일부의 문밖 사람들은 문을 깨려고 문 안 쪽을 절대적인 악으로 본다. 전광훈 목사와 그의 추종자들이 문재인 탄핵을 종북 이데올로기와 함께 주창하는 것은 문을 깨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그 문에 들어가려는 것이다. 그건 개혁도 선도 아니다. 끼기를 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문과 벽을 부수고자 한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부순 문과 벽의 정점인 권력을 대체하려는 것이다. 이렇더라도 문의 안과 밖은 존재한다.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문 밖의 사람들이 문 안과 거기에 기생하는 소수를 ‘불신’하고 그런 기초에서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 경우는 다 문 안쪽을 바라보고 있다.

 

문 밖에서 과신의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

 

문 밖에 있는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이런 문에 들거나 부수려 하지 않고 자기 삶과 만족을 추구해 간다. 국가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자각은 선택적이다. 유리할 때 국가사회를 선택하고 불리하면 이를 거부한다. 문 안으로 들어 갈 수도, 그 문을 깰 수도 없고, 그럴 가치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삶을 추구한다. 문 안쪽의 소수이거나 그 소수와 연통하거나 그 문을 깨려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탈정치적인 삶을 산다. 이 경우는 삶에 대한 신념체계를 형성한다. 백지위에서 생각하거나 지난 삶을 성찰하면서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그것은 나를 발견하거나, 신념을 재구축하는 것이다. 전자는 개체적이거나 조직될 가능성이 적다. 문 안쪽 사람들의 위협이 되지 않는다. 진정한 탈정치화된 삶이다. 그렇지만 그 문 안쪽의 공식 질서와 다른 세계를 구축하는 신념의 세계가 만들어 진다. 신념의 삶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다른 세계는 결국 문 안의 소수에 위협이 되고 그런 과정에서 자기 신념의 세계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그게 과신하는 가상의 세계가 된다. 여기까지가 문 밖의 삶이 왜 탈정치가 되고 일부는 다른 세계를 과신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문자체를 없애는 시민의 연대의식: 차별 없는 진짜 정치로

 

코로나19 감염이 확산되고 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두 가지를 주목하고 싶다. 문 안에 있는 정치와 국가 기구의 소수는 ‘왜 청도대남병원의 정신장애 병동에서는 코로나19 감염 확진자 전원이 나왔는지? 왜 그들을 치료가 아닌 감금상태에 놓았는지’에 대해서 답하지 않고 있다.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는 이들도 이 문제는 서로 언급하지 않는다. 소수의 독점 체제가 선이 될 수 없는 것은 위기에 약자를 배제하는 정책을 쓴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가능한 이유는 문 밖에서 문 안쪽의 소수와 내통하는 사람이나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 사람들이나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사람이나 새로운 과신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에게 이들은 자기의 유형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에서 한 정치 공동체에서 추방시키고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는 습속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차별 관행의 해체와 인권 침해를 해결하려는 지금까지의 노력이 장식이었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기껏 이런 위기(?)에 말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감염 확진자를 병원과 보건당국은 치료해야 할 의무가 있다. 또 확진판정을 받은 사람은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 누구든지 건강하게 살 권리가 있고 국가 공식 체계는 이를 보장해야 한다. 그게 우리의 공식 국가법 체계다. 우한 교민을 공수해 올 때, ‘우한’ 교민이라는 이름으로 거부하려는 지역이 있었다. 특정 지역, 집단, 인종 등으로 규정하고 위험과 위기의 원인을 말하는 것은 치료와 확산 방지를 위한 측면과 그 낙인찍기를 규정하는 양가적인 행위이다. 전염성이 강한 질병에 대처하는 자세는 과신에서 벗어나 실천해야 한다. 위의 장애인병동 확진자 사례나 특정교파에 대한 네이밍의 배면에는 내가 거기에 속하지 않았고 또 나는 다수에 속해 있기 때문에 다수를 위한 대처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암암리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문 안쪽의 소수와 문을 부수려는 사람들, 문 안쪽과 내통하는 사람들이나 문 안쪽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은 모두 문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닌가? 불신 아니면 과신의 그 문 말이다. 시민 누구나 코로나19의 확산을 막는 예방 조치들을 실천하는 것, 그리고 확진자들은 당연히 치료받아야 한다는 상식을 굳건히 갖는 것, 이것이 소수가 독점한 정치와 국가 기구의 힘을 해체하는 것이 아닌가? 안과 밖이 없고 오직 시민의 연대의식, 즉 한 사람이 다치면 내가 다친 것이고, 그 사람의 어려움은 곧 나의 어려움이라는 일치단결이 중요하다.

 

이것이 문과 벽을 허물고 안팎이 없는 진정한 개혁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배제 없는 일치단결로 이 코로나19 확산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지혜가 쌓이고, 이런 맥락에서 시민에게 지혜를 구하는 정치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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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수(법인권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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