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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술이부작(述而不作) 과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

공자(孔子)와 토마스 쿤(Thomas S. Kuhn)의 학문적 방법론

한성주( icomn@icomn.net) 2020.06.04 10:01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제가 20여 년 전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의 신입생들은 가장 먼저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를 읽으며 혁명적인 학업을 통해 인류문화를 발전시키겠다는 의욕에 불타곤 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배워왔던 시절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이제 대학생이 되었으니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거대한 기존 학문을 무너뜨리는 과학 혁명(scientific revolution)의 꿈은 생각만 해도 어찌나 매력적이던지. 물론 이런 패기가 오래가지는 않았고 첫 학기 중간고사 문제들을 만나는 순간 상아탑의 권위에 굴복하고 아직은 나의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존경하는 석학들의 업적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람이 있는 일이라며 겸손(?)하게 타협하긴 했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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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과학 혁명의 구조 책 표지)

 

서양 과학의 학문적 방법론을 대표하는 이 과학혁명의 구조는 모두에게 진리라고 인정받던 정상과학(Normal science) 기반에서 새로운 인식 체계가 등장하여 기존 학설을 흔드는 ‘패러다임의 변화 (paradigm shift)’ 를 통해 기존 정상과학을 폐기하고 새로운 정상과학을 수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굳건하던 정상과학이 폐기된 예로는 천동설을 무너뜨린 지동설이 대표적이죠. 심지어 여러 가지 실험연구를 통해 지동설을 확인한 과학자들도 종교재판이 무서워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과학혁명도 정치적 혁명처럼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얘기 말고 가까운 예로는 미각지도를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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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미각지도)

혀에는 단맛 짠맛 신맛 쓴맛을 느끼는 부위가 따로 정해져있다고 배웠던 내용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데 그게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19세기 말에 한 연구자가 혀 부위마다 맛에 대한 민감도가 다르다는 보고서를 냈는데, 이를 오해한 학자들이 혀에는 각각의 맛을 느끼는 부위가 따로 정해져 있다고 잘못된 해석을 한 탓에 미각지도까지 교과서에 실리게 된 것이죠. 1974년에서야 이것이 틀린 학설이라는 걸 밝혀냈는데, 그러고 나서도 한참동안 의대 교과서에 계속 미각지도가 있었던 걸 보면 정상과학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서양의 자연과학은 대부분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이렇게 늘 과학혁명을 통해 발전해왔기 때문에, 점차로 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이 누군가에 의해 깨지는 것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거나 괘씸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패러다임의 변화는 꽤나 어려운 일이지만, 예전처럼 지동설을 주장한다고 해서 재판에 회부되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공자왈 맹자왈을 외치는 동양의 학문은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 걸까요? 한의학 원전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문을 공부해야 하는 덕에 저는 사서삼경 등의 고전을 통해 동양학의 재미를 알게 되었고, 그 발전 과정이 서양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양학의 재미있는 학문적 방법론을 설명해주는 구절이 바로 ‘술이부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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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논어 ‘술이(述而)’ 편)

논어 ‘술이(述而)’ 편에 나오는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은 ‘기술할 뿐 지어내지 않았다’는 말로, 옛 선현의 말씀을 풀어서 이야기 할 뿐 새로운 것을 창작해내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공자는 스스로가 유가의 창시자면서도 늘 은나라 노팽이나 주나라 문왕처럼 전설속의 어진 선비 혹은 임금의 말씀을 인용하며 철학을 설파하였는데, 이것은 동양의 학문을 지배하는 특징적인 문화입니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지혜를 쌓아왔다는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생각하는 동양의 농경사회에서, 또 제사를 통해 조상과 선현들의 지혜를 받드는 전통사회에서 감히 ‘옛 조상들은 모두 틀렸다!’ 라는 외침은 바로 건방지고 근본 없는 천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발상이기 때문에 누군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더라도 반드시 ‘옛 선현의 말씀을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실은 이런 뜻이었다!’ 라며 이제야 선현의 학문을 이해한 것처럼 발표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여기에는 사실 한자의 모호성도 한 몫을 하는데, 대부분의 문장이 조금씩은 해석을 달리 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사고의 유연성을 가질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있죠. 노자의 도덕경 첫 문장인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라는 말은 중국에서의 주류 해석이 무려 7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조선의 사대부 대부분은 만주족이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운 청나라를 오랑캐라 무시하던 시대에 청나라의 실용적인 상공업 위주의 정책을 도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던 북학파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낡은 것을 버리고 청의 문물을 본받자’ 고 주창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지혜롭게도 그들은 ‘청나라에도 중화(中華)의 문화가 남아있다’ 며 비록 만주족이 세운 나라지만 청나라는 명나라의 문화에 흡수되어 이미 옛 중국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시작합니다. ‘이제 명을 버리고 청을 받아들이자’ 가 아니라 ‘명이 워낙 위대한 나라이기에 청나라도 사실은 명나라의 연장선상에 있으니 우리가 배격할 이유가 없다’ 는 논조로 듣는 이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죠. 연암 박지원의 그 유명한 작품 ‘허생전’을 보면 연암은 자신의 페르소나인 허생을 통해 조선의 답답한 정책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만 현실 속의 한계를 알기에 결국 허생도 상공업의 성공모델을 보여주기만 하고는 목숨을 부지하고자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면서 충격을 완화하는 걸 보면 정말 여우같은 지혜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제가 배운 한의학 분야에서 보자면, 대한민국 한의학의 바이블인 동의보감은 정말 재미있는 책입니다. 애초에 이 책의 편찬 목적은 선조가 허준을 불러 ‘중국의 의서를 다 읽어봤는데 너무 번잡하고 오류가 많으니 제대로 된 의서 하나 만들어보자’ 고 명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매우 혁신적인 의서입니다. 그런데 책을 보면 오히려 온통 중국 의서를 인용한 짜깁기 형식으로 이루어져있어 한동안 독자적인 내용이 없다며 그 가치가 폄하되기도 했습니다만, 사실은 어느 의서에서도 말하지 않았던 실질적이고 임상적인 내용들을 새롭게 실으면서도 마치 수 천 년 전 중국 의서에서 인용한 것으로 위장하고 있습니다. [내경] (황제내경)이니 [입문] (의학입문) 이니 이런저런 인용 출처를 밝혀놨지만 실제 원전에는 없는 내용들도 허다하고, 문장을 조금씩 바꿔놓은 것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천재적인 술이부작의 의서 편찬 스킬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의사들이 오래된 의서를 가지고 공부를 하는 건 비판의식이 없이 교조적으로 수 백 년, 수 천 년 전 내용을 그대로 가져가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익숙한 문장으로 설명하는 고급 스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물론 꾸준히 새로운 자연과학을 통해 전통 한의학의 내용을 설명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동양의 학문 방식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전통문화와 첨단기술이 잘 융합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한류 문화와 의료 분야, 그리고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이미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만큼 곧 학문적으로도 K-인문학이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술이부작과 패러다임 시프트의 적절한 융합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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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주 : 한의사 ,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IBM Korea 에 잠시 근무를 했다가 세명대학교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한성주한의원(경기도 성남시 판교지역) 원장으로 진료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센인들을 위한 회보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한 적이 있고, CBS 팟캐스트 '스타까토' 에서 정치시사관련 인터넷방송을 한 적이 있으며 국방FM '너를 사랑하기에 전유나입니다' 에서 수요일 고정 코너로 '한성주의 세상풍경' 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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