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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 글이 길다고?>

서평-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김경민( icomn@icomn.net) 2020.05.09 08:04

온라인에 글을 올리면 가끔 달리는 댓글이 있다. “긴 글은 안 읽는데 님의 글은 끝까지 읽었어요.” 이런 종류의 댓글을 볼 때마다 나는 다소 복잡한 감정이 든다. 분명 내 글에 칭찬과 호의를 담은 댓글인데도 고마움 이전에 당혹감이 밀려드는 것이다. ‘엥? 이 글이 길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봤을 땐 긴 글이 아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보다도 대체로 짧다.) ‘세상에나 이 글이 길다니. 평소에 얼마나 책을 안 읽으면 이런 말을 창피한지도 모르고 당당하게 할까’ 속으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의 이런 생각에 묻어 있는 오만함에 찜찜해진다. 내가 뭐라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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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따비, 2020)는 응용언어학자 김성우와 사회학자 엄기호의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두 저자는 이 책에서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연대하고 성장하는 말은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문제의식 하에 ‘삶을 위한 리터러시’에 대해 깊고 넓은 대화를 나눈다.

여기서 ‘리터러시’란 ‘문자, 이미지, 영상 등의 매체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을 의미하는데, 이 리터러시는 두 가지 양상으로 드러난다. 두 저자의 비유를 빌리자면 ‘바벨탑을 쌓는 리터러시’와 ‘다리를 놓는 리터러시’로. 말하자면 위의 에피소드에서 내가 갖고 있었던,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고 무시했던 리터러시는 바벨탑에 비유할 수 있다. (나의 리터러시는 20층인데 너의 리터러시는 10층 정도밖에 안 되는군.) 반면에 다리를 놓은 리터러시는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이자 타인의 말에 응답할 줄 아는 능력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필요한 것은 바벨탑이 아닌 다리여야 함이 마땅하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반대다. 지금 이 땅의 제도 교육은 ‘객관적 평가’라는 감옥에 갇혀있고, 학생들은 남들보다 높은 등수를 차지하기 위해 각자 바벨탑을 쌓느라 정신이 없다.

게다가 그 평가 자료라는 것은 대체로 문자 텍스트다. 정답이 정해진 객관식 평가에서 기쁨과 자유를 얻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다 보면 보게 되는’ 유튜브 영상에서는 자유로움을 느끼지만 글에서는 평가의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요즘 10대와 20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쩌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스마트 폰이 있었다.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할 수 있는 그들에게 ‘요즘 것들은 유튜브나 보고 책은 읽지도 않아’라며 혀를 차는 것이 정당한 비판일까. 다른 한편으로 고등교육이 보편화되기 전에 태어난 60대 이상의 세대, 텍스트를 이해하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들을 ‘책은 안 읽고 유튜브나 보며 쓰레기 같은 가짜뉴스에 현혹되는 노인네들’로 무시하고 혐오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까. 어쩌면 이런 태도야 말로 다리를 놓으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자기 마음 안에 바벨탑만 쌓아올리는 오만이 아닐까.

 

물론 일상에서 영상이 문자를 압도하는 현상은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 대세는 이미 책에서 유튜브로 넘어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글은 영상을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일까. 구체성에 있어서는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 맞다. 예를 들어 아무리 글로 자세하게 ‘운동화 끈 묶는 법’을 설명한다 해도 영상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추상적인 개념이 필요한 사유는 영상으로 만들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관계’라는 개념을 영상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영상이 담을 수 있는 사유와 상상력은 그 스케일과 깊이와 디테일함에서 글이 표현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기 힘들다. (원작소설을 읽은 후에 영화를 보고 나서 실망했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영상에 비해 글이 담을 수 있는 사유의 길이와 스케일이 무한대에 가깝다보니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사유하는 역량을 비약적으로 키워줄 수 있다. 이 역량을 바탕으로 바로 ‘역지사지’가 가능해진다. ‘생각에서라도 남이 되어보는 것’ 말이다. 이는 그 자체로 매우 소중한 능력이자 태도이다. 이 능력과 태도에서 바로 ‘윤리적 주체’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엄기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만큼이나 사람에게 중요한 능력이,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미 충분히 복잡하며, 단순화되지도 않을뿐더러 단순화하는 게 좋은 것도 아니에요.”(p.142) 이러한 이유로 그는 분량이 워낙 많아서 삶에 대한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대하소설과 길이는 짧지만 언어 자체가 압축적이고 추상적이라 깊이 들어가게 만드는 시를 여전히 소중한 텍스트라고 말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요즘 뭐가 대세라더라’며 지금은 영상 시대니까 영상 만드는 것만 잘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하고 위험한 일인가.

 

그나저나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의 길이는 적정한가. 이 책엔 리터러시 전반에 대한 매우 폭넓고 깊은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지만 나는 특별히 내가 주목한 몇 가지 지점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썼다. 여기서 더 길어지면 사람들이 끝까지 안 읽을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에. 참고로 김성우는 이렇게 말한다. “긴 글이라는 게 단순히 길어서 가치 있는 게 아니라 읽어내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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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대학원에서 국어교육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지금은 교사를 그만두고 두 아이를 키우며 꾸준히 읽고 쓰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시 읽기 좋은 날>을 비롯해 네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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