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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왕 공평하지 않았으나 더 불공평해진 교육의 기회

코로나 시대, 멕시코의 ‘어떤’ 교실들

림수진( icomn@icomn.net) 2020.10.06 11:26

아무래도,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시작을 해야겠다. 지난 9월 8일 집에서 인터넷 신호가 사라졌다. 눈 앞이 아뜩했다. 6개월 여, 역병이 창궐하는 가운데 고립 생활을 이어가던 중이라, 어쩌면 인터넷은 내가 외부와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인터넷이 있었기에 고립의 와중이라도 대한민국에서 송신되는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었고 전자책을 다운 받아 읽을 수 있었으며, 가족 혹은 친구들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을 할 수 있었다. 시시로 이메일을 체크하며 학생들의 과제를 확인했고, 시시로 온라인 회의에 접속하여 학과 행정 업무에 참여하였다. 게다가 때로는 다른 도시 혹은 다른 나라의 동료들과 회의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그럭저럭, 살아가던 중이었다.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르겠으나, 나의 경우 ‘어쩌면 온라인 상에서 살아가는 생활이 오프라인 상에서 살아가는 생활보다 좀 더 편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던 즈음이기도 했다. 특히 간혹 일 때문에 멀리 떨어진 도시로 이동해야 했던 지난 날과 달리, 집에서도 그 일을 해결할 수 있음이 좋아지던 즈음이었다.

이 세상에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 종종 멕시코시티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나는 왕복 2000km를 이동해야 했다. 미리 비행기 표를 사야 했고, 호텔 예약을 해야 했다. 그리고 최소 2박3일간 집을 비워야 했다. 그런데 지난 3월 이후, 비대면 화상 회의로 전환되면서 비행기 표를 사지 않아도 됐고 호텔을 예약하지 않아도 됐다.  2박 3일 집을 비우게 되면서 이웃에 부탁해야 했던 개밥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회의가 시작되기 5분 전 컴퓨터 앞에 앉으면 되는 일이었다. 나를 제외한 회의 참가자 모두가 멕시코시티에 거주하고 있기에 소수인 내가 이동을 하는 것이 공평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했었고 또한 나의 이동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모두가 어디에 살든 각자 살고 있는 그 곳에서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훨씬 더 공평하고 더 정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두세 번은 화상 회의가 익숙치 못해 어색했지만, 적응이 되자 왜 진즉 비대면 회의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섞인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여파로 숱한 슬픔과 불편함이 사회 전반에 칙칙하게 베어버렸지만 그 와중에 이런 편리함도 분명히 존재했다. 집에서 인터넷 신호가 사라지기 전까지 말이다.

어느 날 밤 홀연히 인터넷 신호가 사라지고, 놀라움 혹은 충격 가운데 가장 먼저 자기 위안의 기제가 발동했다. ‘괜찮을 거야, 아마도 비가 많이 내려서 일시적으로 발생한 장애일 거야’ 라고 생각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인터넷 신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멕시코 전화국에 고장신고를 했다.

절차가 복잡하진 않았지만, 반복하여 들려오는 기계 녹음 소리를 30분 이상 듣고 나서야 겨우 상담원과 연결이 되었다. 빠르면 당일 늦으면 익일 기술자가 방문할 것이란 안내와 고장신고 등록번호를 받고 고장신고가 마무리되었다.

물론, 전화국 기술자는 당일에 오지 않았고 또한 익일에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9월 30일 현재까지도 오지 않았다. 학교는 지난 3월 이후 정문에 쇠사슬을 걸어 꽁꽁 묶어 둔 상태니, 연구실이나 도서관도 들어갈 방법이 없다. 그리고 내가 사는 주는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 발생 빈도가 그 여느 주보다 높아서 유일하게 멕시코 전역에서 ‘최고 위험’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인터넷 이용이 가능한 까페 역시 문을 열 리가 없다. 게다가 내가 사는 마을 이웃들 중 우리집이 그간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받는 유일한 집이었으니 이웃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당장 내가 호스트인 회의들이 취소되었다. 학교에는 우리집 사정을 말하고 이메일을 읽을 수 없으니 급한 연락은 전화로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마침 개강을 앞두고 이러저러한 회의가 많았지만, 모든 학과 회의에 불참했다. 인터넷 서비스가 없는 상황에 처음 사나흘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힘들었지만, 이후 차츰 익숙해졌다. 그러나 9월 28일 개강, 그것도 온라인 수업을 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해결해야 했다.

누군가 조언하기를, 멕시코 전화국에서 운영하는 ‘데이타 상점’에 가면 일정 액의 데이터를 사서 급한대로 집에서 포터블 형태의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횡행하는 도시로 차를 몰아 갔고 ‘데이터 상점’ 앞에 한참 줄을 선 다음 겨우 입장 허락이 되어 들어갔다. 동료의 조언과 달리, 코로나 시절을 맞이하여 데이터 가격은 기존의 가격에 비해 약 열 배 정도 올라있었다. 수중에 돈이 있었지만, 기가 막혀 사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열흘 넘게 ‘고도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오지 않는 멕시코 전화국 기술자를 기다리다가, 결국 어느 날 새벽 짐을 챙겼다. 의자와 우산과 물과 책. 내가 사는 주 전체에서 딱 한군데 업무를 본다는 전화국으로 향했다. 새벽 동이 트기 전 도착하여 받은 번호표는 9번.  이미 내 앞으로 여덟 명의 사람들이 와 있었다. 혹여 줄이 틀어질 새라, 8번의 뒷모습을 째려보듯 주시하면서 의자를 펴고 앉았다. 날이 밝으면서 나는 가져간 책을 읽기 시작하였고, 그 사이 내 뒤로도 약 4-50명이 더 줄을 섰다.

열흘 넘게 인터넷이 없이 생활하면서,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는가? 라고 생각하며 분개했지만, 그 새벽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성토를 듣자 하니, 나는 명함도 못 내밀 형편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이미 두서너 달 이상 인터넷 없는 시절을 살고 있다고 했다. 지난 8월 말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100%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수업에서 그들의 자식들은 수업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화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나도 당장 9월 28일부터 온라인 수업을 해야 하는데, 우리 집은 이제 겨우 보름 정도가 지났을 뿐이니 앞으로 두 서너 달을 어찌 견디나 싶어 막연해졌다.

해가 중천에 뜰 즈음, 겨우 멕시코 전화국 입장이 허락되었다. 전화국 측의 설명은 간결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로 일부 기술자들이 사망했고, 그 와중에 기저질환이 있는 기술자들이 작업에서 배제되었고, 또한 갑자기 온라인 수업이 시작되면서 너도 나도 인터넷 개설을 신청하는 와중이고, 게다가 지금이 매일 천둥 번개를 동반하는 비가 내리는 우기이니 전화국으로서도 상황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화국에서 반드시 고쳐줄 것이니 걱정말라는 말로 설명을 마무리지었다. 다만 앞으로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더 소요될 것이라 했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굳이 그들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멕시코에서 전화국 서비스의 부실함은 이미 악명이 높던 차였기에, 실망하지도 않았다. 1990년대 초반 민영화되었고 이후 멕시코뿐 아니라 중미 여러 나라들까지 진출하며 철옹성 같이 견고한 독점 체제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덕분에 그 주인은 늘 세계 최고 부자 중 1.2위를 다툰다 하지 않던가. 그 앞에 소비자인 나는 나약한 ‘을’이었다.

이후 두 번 더 의자와 두꺼운 책을 챙겨 들고 새벽부터 전화국 앞에 가서 줄을 선 끝에, 인터넷 모뎀 단말기를 교환할 수 있었다. 물론 기술자는 여전히 오지 않았지만 단말기를 교체한 이후 간혹 인터넷 신호가 잡힌다. 그렇게만 되어도, 살 것 같다. 인터넷 신호가 잡힐 때마다 서둘러 이메일을 확인했고, 화상 회의에도 참여했다. 물론 중간에 끊어지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이만한 정도로도 충분히 숨통이 트였다. 그야말로 감지덕지다.

9월 28일 개강을 했다. 원래 8월 중순에 이루어져야 하는 개강이지만, 이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를 피하지 못한 채 늦어졌다. 이번 학기는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된다. 당일 아침 학과에서 연락이 오길 학생들 중 30% 이상이 실시간 비대면 수업에 참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나머지 70%가 비대면 수업이 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70%가 될 수도 있고 50% 혹은 그 이하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상황’이라 함은, 수업 당일 학생들이 각자의 집에서 온전한 수준의 인터넷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수업 참여 가부가 갈린다는 의미다. 하긴 당장 우리집만 해도 인터넷 연결과 불연결이 그날 하루 바람의 결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그나마 집에 유선 전화를 통해 연결되는 인터넷 서비스가 있다면 다행지만, 학생들 중 상당수는 핸드폰에 선결제를 하면서 아주 적은 양 얻게 되는 데이터를 사용한다. 그러니 수업 당일 전화기에 남아 있는 데이터가 있으면 연결이 가능할 것이고 그 반대라면 불가능하다. 지난 학기 일부 학생들이 학교 근처의 자취나 하숙 생활을 접고 고향 마을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피해 대피하면서 더러는 핸드폰 신호도 잡히지 않는 곳에서 살아간다.

인터넷 신호에 많은 것들을 기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요즘, 하루하루가 살얼음 판이다. 회의 약속을 잡아 놓고도, 그 시간에 인터넷 연결이 안되면 어쩌나 싶어 노심초사다. 물론 수업 시간도 마찬가지. 아주 가느다란 선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라도 끊어질 수 있는. 멕시코에서 코로나시대를 살다 보니, 인터넷이 꼭 그렇게 느껴진다.

우리나라는286 혹은 386 퍼스널 컴퓨터 시절부터 많은 사람들이 차근차근 경험과 인프라를 구축해왔다. 그런데 멕시코의 경우 인터넷 사용인구 대부분이 불과 지난 수 년 사이 핸드폰을 통해 인터넷을 사용하기 시작한 경우다. 그들 중 상당수는 유료 인터넷은 아예 생각지도 못하고 전화기 단말기를 들고 무료 무선인터넷 서비스가 되는 곳을 찾아다닌다. 또한 유료 인터넷을 사용하는 경우도, 우리나라처럼 월별 정액제를 이용하는 대신 대부분이 선결제 형식으로 그때 그때 전화기에 데이터를 구매하여 쓰는 형식이다. 그럼에도 이들 모두 통계에는 인터넷 사용이 가능한 인구로 잡힌다.

상황이 이러니, 학교에서 사상 유래 없는 온라인 개강과 함께 강조하는 것은 ‘유연성’이다. 절대로 학생들에게 인터넷 접속을 강요하지 말라는 지침이다. 또한 상당수 학생들이 집에 퍼스널 컴퓨터를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워드 타이핑을 해야 하는 과제물도 자제를 해달라는 요청이다. 타이핑하는 것도 힘들거니와, 인터넷을 통해 전송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00% 온라인 수업의 방침에는 변함이 없으니, 어느 기준을 따라야 할지 난감하다.

이제 막 개강인데, 앞으로 어떤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발생하더라도, 오직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뉘앙스다. 국가와 학교 당국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물론, 기대도 없다. 여전히 대학 진학율이 30%를 밑도는 이 나라에서 그나마 대학교에 진학을 할 정도라면 경제적 수준이 뒷받침되는 경우일 것이다. 그런 대학생들의 상황이 이러한데, 훨씬 광범위한 경제적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는 초등학생들의 상황은 감히 상상이 어렵다.  

더욱이, 농촌지역 중에는 여전히 인터넷 연결 인프라가 전무한 지역이 존재한다. 교육 당국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세계적 대세가 되어버린 온라인 수업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무수히 많은 공백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경우 이 사태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고자 인터넷 대신 공중파 채널을 이용한 tv 수업으로 돌렸다. 그럼에도 문제가 되는 것은, 상당수의 학생들의 과제물 제출이나 교사 면담에는 인터넷 서비스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한 집안에 학생이 여러 명 있으면 교육과정에 따라 여러 개 채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수업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도 제한된다. 결국 이런 상황들 앞에서 많은 초등학생들이 이번학기 등록을 포기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멕시코의 경우 초등학교에도 엄연히 유급이 존재하고 매년 10% 이상의 학생들이 유급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니 한 학기 혹은 1년을 쉬는 일이 한국 보다는 일반적이다. 다만, 지금과 같이 코로나바이러스의 여파가 길어진다면 수많은 학생들이 오직 그들에게 컴퓨터 혹은 TV 수신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터넷 서비스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초등학교 과정에서부터 학업을 영영 포기해야하는 일이 속출할 것이다.

불과 6개월 사이 비교적 공정하고 정의로웠던 지난 날의 교실 수업이 실로 요원하게 느껴지는 즈음, 수업권으로부터 소외된 학생들에게 수업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만들어주려는 ‘교실’들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 8월, 소셜미디어 상에 사진 한 장이 회자되었다. 멕시코 중부 내륙 과나후아토 주의 어느 벽촌 마을 선생님과 학생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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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멕시코 내륙 과나후아토 주 어느 시골 마을에서 Nay라는 이름의 선생님이 자신의 픽업 트럭을 이용해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동식 교실을 운영하고 있는 사진이 코로나바이러스 시절 멕시코를 감동시켰다. 출처: Twitter@somosdeleon)

 

시골이다 보니 상당수 학생 집에 인터넷은 없었을 것이고 또한 TV 수신도 쉽지 않은 상황일터. 그 와중에 ‘Nay’라는 이름의 선생님이 당신의 트럭 짐칸을 이동식 교실로 만들어 가가호호 학생들을 방문하며 학업을 살펴주는 사진이었다. 물론 학생과 선생님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였고 서로 간 거리두기를 위해 야외에 세워진 트럭 짐칸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선생님의 트럭 짐칸에는 이미 커다란 책상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비단 Nay 선생님뿐 아니라 어쩌면 이 나라의 많은 선생님들이 이런 식으로 인터넷 서비스를 받지 못하거나 혹은 퍼스널 컴퓨터가 없어 과제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코로나바이러스 시절 ‘멕시코식 비대면 수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도시에서도 인터넷에 접근하지 못하여 수업권을 박탈당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기꺼이 ‘멕시코식 교실’을 제공해주는 이들이 나타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밤의 세계에서 영업을 하는 술집이나 나이트클럽이 가장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말 그대로 대부분 이들 업종의 영업 시간이 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낮 시간 동안 주변 지역 학생들에게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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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학생이 마스크를 쓴 채, 멕시코 시티 Tlachiquero라는 술집에서 화상 수업을 받고 있다. 이 술집의 경우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영업을 하지 않는 시간대에 인근 학생들에게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출처: Imagen 뉴스 화면 캡쳐)

 

소식을 들은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자, 일부 술집이나 나이트 클럽에 컴퓨터 교육 전문가나 아동심리 상담사 등이 같이 모여 그 곳에 온 아이들을 다방면에서 지원했다. 그리고 일부 시민들은 그 곳에 모이는 아이들을 위해 간식을 싸오기도 했다. 다만, 부모님이 동행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 곳이 많았다. 주류를 판매하는 곳이기에 어쩔 수 없는 조치였을 것이다.

도시에서 술집과 나이트클럽들이 나서면서 차고나 마당을 갖춘 가정집에서도 주변의 어린 학생들에게 교실을 자처하고 나섰다. 낮 시간 동안 언제라도 인터넷 서비스가 필요하면 와서 사용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무선 인터넷 아이디와 암호를 집 밖에 걸어 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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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어느 가정집에서 내 건 안내문. 주차장에서 무료 인터넷 서비스, 의자, 책상 등이 제공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단, 이용자는 반드시 학생이어야 함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출처:Twitter @ Claudia Adame)

 

선생님들이라고 모두가 집에 인터넷 서비스를 갖춘 상황이 아니기에, 일부 선생님들은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사이버 까페를 이용하기도 한다.  나 역시 우리집 인터넷 서비스 신호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사라진다면, 어쩌면 사이버 까페에서 수업을 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모두가 갑자기 달라진 교육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마음을 모으고 같이 애를 쓴다. 덕분이랄까, 모든 교육과정의 2학기 개학이 조금 늦어졌을 뿐, 어쨌든 온라인 수업은 진행 중이다. 그러니 위정자의 눈에는, 혹은 이 세상의 통계에는 멕시코 역시 세상의 여느 나라들처럼 무난히 온라인 수업을 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절 이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세계적으로 창궐한 이 역병의 시절에 수많은 학생들이 그나마 공평하고 정의로웠던 그들의 교실에서 밀려 결코 평평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각자의 교실에서 정부나 교육 당국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각자도생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심각하게 기울어져 낮은 쪽에 선 학생들이 자꾸만 떨어져 나가는 상황에서 그나마 그들이 서있는 낮은 쪽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려 주려 노력했던 ‘어떤’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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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수진(Lim, Su Jin),

멕시코 콜리마주립대학교 정치사회과학대학

(Facultad de Ciencias Políticas y Sociales, Universidad de Colima)

 

일곱 살 먹던 해 겨울, 할머니를 따라 서울에 갔습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서울역 광장에 단아하게 선,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서울역사 앞에서 짜릿한 흥분을 느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각인이었습니다. 이후 늘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였습니다. 결국, 이다음에 크면 반드시 관광버스 운전수가 되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진 못하였습니다. 대신, 지리학을 공부했습니다. 공부를 핑계 삼아 원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만 서른 살이 되던 2001년, 코스타리카로 갔습니다. 19세기 말 파나마 운하 건설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의 증손자 쯤으로 신분을 둘러대고 커피밭에 ‘위장취업’을 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커피를 따면서 3년을 보냈습니다. 하루 1달러도 벌지 못하는 저 ‘불량노동자’를 걱정하며 자신들이 딴 커피와 음식과 마음을 나눠준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대부분이 니카라과에서 건너온 불법 이주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들의 삶을 좇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2006년 이후 현재, 멕시코 콜리마주립대학교 정치사회과학대학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주’, ‘국제분쟁’, ‘지정학’ 등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2010년 이후 멕시코 연방정부 고등과학기술위원회 소속 국가연구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커피밭 사람들: 라틴아메리카 커피 노동자, 그들 삶의 기록>, <21세기 중앙아메리카의 단면들:내전과 독재의 상흔>, <세계의 분쟁(공저)>, <디코딩라틴아메리카: 20개의 코드(공저)>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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