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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전회 매진, 개봉하니 망했다. 왜?

[새벽바다의 영화읽기] 영화 <변태 가면>의 흥행 성적이 보여준 장르영화의 한계와 가능성

새벽바다 시골잡학덕후( jbchamsori@gmail.com) 2015.02.03 18:19

90년대 우리나라 영화계에는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당시 영화계에서는 “영화 마니아”라는 관객층이 생겨나고 있었는데, 이들은 엄청난 영화 소비, 일반 관객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독특한 취향, 장르 영화 또는 B급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 비평가와 같은 전문가들에 대한 저항 등의 특징을 지녔다. 이들을 위한 영화제가 97년에 부천에서 생겼다. 부천 국제판타스틱 영화제다. 현재는 아시아의 중심적 장르영화축제가 되었고, 영화 마니아들의 천국이기도 하다.


작년 7월 부천 국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이고, 전회 매진 그리고 관객들이 선정한 최고의 영화가 되면서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영화 <변태 가면>은 영화 마니아들에게 분명 기대작이었다. 나 자신이 영화 마니아인지 일반관객인지 아니면 전문가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이 영화를 먼저 접하고 “도덕적 변태의 자기 긍정”을 그려내는 장르 영화적 솜씨가 뛰어나 많은 사랑을 받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지난 11월에 정식으로 일반 극장에서 개봉되었고 참담한 흥행참패를 겪었다. 정식 누적 관객수는 2000명 수준이다. 왜 일까? 왜 마니아와 일반 관객에 이런 간극이 존재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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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태 가면> 스틸 컷. 출처 : 에이원엔터테이먼트 (www.facebook.com/aonent.movie)



다른 나라에서는 상황이 다를까? <변태 가면>은 안도 케이슈의 원작 만화를 <꽃보다 남자>의 오구리 순이 각색하고 제작한 영화로 화제를 모았고, 일본과 대만에서는 예상외의 흥행으로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즉, 일본과 대만에서 이 영화는 어느 정도의 대중성을 지닌 영화로 소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비슷한 문화권과 경제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한국에서는 유독 그런 대중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영화 마니아들의 전유물로 낙인 찍혔다고 볼 수 있다. 왜일까?


자신을 부정이 아닌 긍정하면서 얻게 되는 삶의 즐거움


일단 이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은 부모의 변태적 성향(엄마는 사디스트적 성매매 여성이고, 아빠는 마조히스트적 형사인데 둘은 성매매 단속 현장에서 운명적으로 만났다)을 물려받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 한다. 주인공은 우연히 강도들에게 인질로 잡힌, 좋아하는 예쁜 전학생을 구하려다가 여자의 팬티를 얼굴에 뒤집어쓰면 자신의 변태적 성향이 엄청난 파워을 준다는 것을 발견하고 슈퍼 히어로가 된다.


그러나 팬티 가면을 쓰고 달랑 흰 팬티 하나만 입고 사람들을 구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 그야말로 변태로 비칠 뿐이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선행에 여론은 호의적으로 변해가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변해간다. 문제는 슈퍼 히어로가 되어도 그 전학생이 변태 같은 보습을 좋아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 앞에서(사실은 그녀도 변태가면의 도움을 받고 난 후 좋아하게 되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


이 때 등장하는 악당은 각종 자객들(착실 가면, 상큼 가면, 모호 가면, 멸치마초 가면 등이 있는데 이들이 유발하는 B급 영화적인 웃음은 정말 유쾌하다.)을 보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결국 악당은 최강의 변태를 불러낸다. 최강변태는 변태가면으로 변장해 갖은 악행(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즐거운 악행일 수도 있다.)을 일삼아 변태가면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킨다. 이에 더해 전학생을 납치하는 최강변태. 이제 변태가면은 그와의 한판 대결을 벌인다. 결투 중 위험에 처한 변태가면은 변태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그녀에게 팬티를 벗어줄 것을 부탁하고 좋아하는 이의 팬티를 통해 얻은 강력한 힘으로 악당을 물리친다. 마지막에는 일상으로 돌아와 그녀의 수영복 입은 모습을 상상하며 수업 시간에 졸다가 선생님에게 혼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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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태 가면> 스틸 컷. 출처 : 에이원엔터테이먼트 (www.facebook.com/aonent.movie)


<변태 가면>은 자신의 변태적 성향을 부정하는 주인공의 자기 긍정의 과정을 따라간다. 변태이기는 하지만 정의롭고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심지어 그런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성을 만나기까지 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여전히 변태로 살아가는 주인공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니체는 낙타, 사자, 아이와 같은 사람을 이야기했다. 간단히 말하면, 낙타는 타인의 짐을 지고 사막을 힘겹게 건너는 자다. 사자는 타인의 짐에 대해 분노하고 싸운다. 아이는 자신을 긍정하고 반복되는 상황을 새롭게 즐기는 존재라고 한다. 타인의 성도덕을 따라 살던 주인공은 낙타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변태로서의 자신을 긍정하고 매일을 즐겁게 살게 되는 그는 이제 아이와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마치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향을 긍정하고 당당하게 커밍아웃하고 즐겁게 사는 것과 같아 보인다.


“해외에서 호평 받은 <변태 가면>, 한국에서 실패한 이유는?”


변태들이 주인공처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변태란 여러 성적 지향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 영화 <페스티벌>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이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이렇듯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지닐 수 있는 그리고 제법 잘 만든 코미디 액션 히어로 영화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영화의 흥행 실패에는 첫째, 영화 마니아들의 취향에서 나타나는 자유주의적 태도와 일반 관객이 보여주는 보수적(또는 도덕주의적) 경향 간의 간극, 둘째, 영화 마니아들을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 셋째, 우리나라의 이중적 성 관념, 넷째, 장르영화 천시 태도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첫째, <변태 가면>뿐 아니라, <족구왕>, <악의 교전> 등의 영화제 화제작들은 마니아들의 취향을 대변하는데, 이들은 사회적 소수자를 다루거나 일반적 도덕관념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변태, 루저, 사이코패스 교사 등)을 상상력을 동원하며 장르적 재미를 자유롭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 <국제 시장>, <명량>, <7번방의 선물>, <광해: 왕이 된 남자> 등의 흥행작들은 소재의 보편성이 강하며, 정치적 성향이 다소 희석된 역사를 다루고, 일반 관객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도덕적 수준에서 조심스레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는 것 같다. 우리 관객들은 이를 ‘배려’라는 말이나 ‘정치적 중립’, ‘순수한 영화적 재미’라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전자에 해당하는 영화들을 감상하는 행위는 다소 순수하지 못하고, 배려심이 부족한 취향을 보여주는 일이라 여겨진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추측일까? 한번은 <월 플라워>라는 영화를 보고 얘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의 눈물겨운 성장과정을 그렸는데, 중간에 마약과 섹스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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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태 가면> 스틸 컷. 출처 : 에이원엔터테이먼트 (www.facebook.com/aonent.movie)


관객들이 영화에 대해 얘기할 때, “우리나라의 정서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청소년들이 보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등의 견해를 대부분 첨가하는 것을 보고 답답함을 느꼈다. 아마도 일반 관객들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한다면 <변태 가면>에도 같은 의견을 달지 않을까?


둘째, 영화 마니아들은 현재 영화 덕후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하진 않았지만, 상당한 내공을 지니고 나름의 영화 취향이 존재하는 이들은 일반관객이 범접할 수 없는 지식과 경험‘치’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학위 등의 공식적 인정을 받지 못했고,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취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기에 덕후다. 결국 영화 덕후란 영화 루저다. 초강도 경쟁 자본주의 사회에서 루저는 낙오자이거나 아니면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저항자일 것이다. 어느 쪽으로든 소수자일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가 과연 흥행할 수 있을까?


셋째, 이중적 성 관념. 마치 영국의 빅토리아조 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속물들의 시대. 정숙한 여성과는 낮에, 그렇지 않은 여성과는 밤에 만나는 신사들의 나라 영국과 지금의 한국이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성적으로 많이 개방되었다고 반론할지 모르지만, 개방된 사람들과 여전히 기존의 성 관념을 고수하는 사람들로 양극화되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후자의 경우, ‘변태’를 미화하기까지 하는 이 영화를 과연 볼 수 있을까? (영화를 소개하는 어휘의 ‘강도’와 어울리지 않게 <변태 가면>은 15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았다. 아마 여성 변태를 다룬 영화였다면 과연 이런 등급을 받았을까? 또, 변태가면을 검색해보면 대만에서는 여성 변태 가면도 있고, 제법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는 많다는 사실도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다.)


넷째, 우리나라에서 영화 좀 봤다고 하는 ‘고급진’ 사람들의 태도에서 묻어나는 장르영화 경시의 태도. 이들은 대체로 유렵의 유수 영화제 수상작들을 선호하고, 영화사(史)에서 소개되는 걸작 위주로 영화를 본다. 이 작품들은 헐리우드의 내러티브 중심의 장르적 관습에 저항하고 자본주의의 문화 상품화에 반발하기에 그 가치가 크며, 반면 장르 영화들은 ‘상품’의 전형이기에 외면한다.


아마도 이런 비판은 아도르노의 이론적 경향에 경도된 측면이 있는 것 같고,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이런 자세를 취하는 것이 진보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장르영화를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아도르노의 견해에 대해서는 대중의 저항적 성격, 창조적 능력을 간과하고 있고, 대중을 너무 수동적 존재 내지는 객체로 그린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가령, 장르의 관습은 <스크림>, <올드 보이> 등의 작품과 같이 언제든지 혁신이 가능하고, 그래서 더 재미를 준다.


장르영화는 영화적으로 중요하기도 하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작가주의를 부각시키는 영화평론 작업을 통해서 영화사적 거장으로 격상된 히치콕의 영화가 스릴러장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렇다. 또 존 포드, 세르지오 레오네가 서부극, 더글라스 서크가 멜로 장르의 대가였다는 사실은 말해 무엇 할까? 파스빈더, 짐 자무시가 이런 장르의 대가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을 왜 망각하는 것일까?


ps. 이 영화를 소개할 때 많이 망설였다. 또 글을 쓰면서 자주 막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내 자신 속의 도덕주의적 자아가 검열을 했기 때문이다. 그 검열에 저항하며 쓴 이 글은 여전히 그 검열의 자장에서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스스로 대견한 점은  영화처럼 나 자신을 더 긍정하게 되었다는 것. <변태 가면>을 소개하는 글쓴이를 변태로 여긴다면, 그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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