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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저출산’을 위한 변명

고영남( icomn@icomn.net) 2019.06.13 21:07

‘돈’도 어쩔 수 없는 합계출산율 0.98명

 

2018년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수 있는 자녀수의 평균치)이 0.98 명이라는, 초유의 기록을 남기며 한국사회는 충격에 빠졌으나 이미 젖어버린 패배주의 때문인지 이젠 돈타령도 하지 않는다. 이 수치는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꼴찌를 뜻한다. 2017년생의 조부모인 1958년생(개띠)이 100만 명, 부모인 1987년생이 61만여 명이라고 하니 1세대가 지날 때마다 3분의 1 정도씩 사라진 셈이다. ‘저출산’을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인식한 정부의 대응책은 2006년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제정하기 시작하면서 2005년 출산율 1.08명을 기록한 이후 12년간 저출산 대책에 126조 4000억 원의 예산을, 2017년에만 24조 원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반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돈’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미궁의 난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혹시 정책이나 그 방향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저출산’을 문제시한 의식 그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즉 ‘저출산’의 원인과 해결책에 관한 모색 자체가 어리석은 질문은 아니었는지 되묻는다.

 

출산에 대한 편견

 

‘저출산’ 담론에 앞서 출산에 대한 편견 자체가 이미 널리 퍼져 있음을 짚어본다. 첫째, 출산의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의 질문이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통하여 출산의 고통을 호소하지만, 세상은 태어나는 아이의 숫자에만 관심을 둔다. 한국의 여성은 분명 호주제로부터 해방된 지 십 수 년이 되었으나 여전히 생활 전반에서 삶의 주체로서 당당하게 인정된다고 평가하기에 부족하다. 두 번째 편견은 ‘저출산’과 관련하여 ‘선진국에서는 여성의 사회 참여가 증가하면서 출생률이 낮아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저출산의 원인을 여성의 사회 진출 증가에 있다고 단정해버리면 저출산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꼴이다. [여성의 높은 스펙이 저출산의 원인]이라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2017년) 역시 저출산에 대한 편견을 보여주며 그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학력과 소득수준이 높은 이른바 높은 스펙의 비혼 여성들이 기회비용을 따져 결혼시장에 늦게 진입하고, 이는 비혼·만혼과 저출산을 심화시키기 때문에 이들의 불필요한 스펙 쌓기를 막아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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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오마이뉴스)

 

‘저출산’에 관한 국가주의의 통념

 

여성을 출산기계로 취급하는 편견은 ‘저출산’에 대한 국가주의의 통념과도 연결된다. ‘대한민국 출산지도’ 논란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었던 국가주의의 통념은 다른 곳에서도 확인된다. 저출산 관련 통계가 발표될 때마다 언론과 전문가들은 향후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저출산’을 꼽으며 ‘국가적 재앙을 막을 특단의 대책’이 빨리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8월 말 여성가족부 등의 업무보고를 받으러 정부세종청사를 방문한 때 점심 식사를 함께 한 사람들이 4명 이상의 아이를 둔 부모와 육아휴직에서 막 돌아온 공무원들이었는데, 대통령은 이들을 ‘애국자들’이라고 추켜세웠다. 이어서 대통령은 2017년 12월 대통령 자신이 그 위원장으로 되어 있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 ‘이제는 생산가능인구가 줄고 경제가 어렵다는 차원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근간이 흔들리는 심각한 인구위기 상황을 맞게 될 것’이라며 인구위기상황을 지금 해결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여전히 출산의 주체가 여성이라는 점이 가려졌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태어난 아이가 장차 군인이 되기도 하고 세금 또한 잘 납부하는 국가의 충실한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의 ‘애국자’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애국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처럼 ‘저출산’ 담론은 이 낮은 수치를 극복하려는 국가주의의 통념에 구속될 수밖에는 없는 운명 때문에 그렇게 정책을 구현할수록 본질과는 먼 수렁에 빠지기 때문에 ‘저출산’을 극복한다는 것은 그 진실 속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됨을 의미한다.

 

‘저출산’ 담론의 본질은 어디에?

 

‘저출산’을 극복하는 데에는 본질에 접근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구체적으로 저출산의 현상에 대한 이해당사자의 미시적 욕구를 구현하는 미봉책들이 제시되는 경우가 있다. 이 미봉책들은 주로 출산보조비, 보육비 보조, 교육정책의 개선, 의료비 보조정책 등이 단편적으로 제시된다. 황당한 미봉책은 ‘짝 찾기 프로그램’의 구상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위 2017년 보고서에 의하면 ‘교육투자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한 남녀가 서로 원하는 상대를 만날 수 있는 가상현실기술’과 같이, 가상공간에서 자신을 대신하여 배우자를 탐색할 수 있는 정보기술을 개발하여 대학에 보급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발상은 정부 주도 ‘맞선 프로그램’과 너무도 비슷하다.

한편 문재인 정부는 종래 출산율과 출생아 수를 목표로 하는 국가주도 출산정책을 ‘삶의 방식에 대한 개인의 선택권을 존중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사람중심 정책’으로 그 패러다임을 재구조화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출산 여부는 개인의 합리적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다며, 20대, 30대, 40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가정과 일터에서의 균형을 강화하는 정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패러다임의 전환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에 의하면 ‘아동수당이나 보육율 역시 출산율과 무관하며, 결국 출산율은 한국사회가 어떤 복지국가를 지향하는지에 따른 결과’라고 한다. ‘저임금, 비정규직, 장시간 노동 등 만연한 노동시장의 문제들로 인하여 증가된 임금불평등’을 극복해야 ‘저출산문제를 해결하는 복지국가의 방향과 노동시장의 정합성’이 도모될 수 있다고 한다. ‘소득과 자산의 격차가 출산율로도 이어지므로 소득과 복지 확대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남녀가 노동시장에서 평등하게 일하며 아이를 낳아 기르고, 평등하게 돌봄을 분담하고 권리를 나누는 사회모델이 만들어져야 젠더 불평등이 완화되고 자연스레 저출산도 해소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사라진 ‘여성’과 ‘생명’

 

한편 ‘저출산’ 담론에서는 그 출산의 주체인 여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더라도 어느새 ‘여성’은 사라지고 만다. 동시에 그 여성에 의하여 태어난 새로운 생명마저 이 토론의 공간에서 사라지고 수십만 명의 숫자 속의 하나로 기록될 뿐이다. 출산을 숫자와 비율로 표 그리기를 하고 통계 속에 집어넣는 자가 누구인가? 국가가 그렇게 하고 기업이 그렇다. 이 민주공화국의 정치주체인 시민은 저 멀리 떨어진 채 ‘저출산’을 기록한 숫자의 책임만 추궁 당한다. 하지만 사람은 임신, 태아를 거쳐 태어나면서 하나의 생명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인구가 감소하여 비록 적은 수의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그 생명의 가치는 존중되어야 한다. 생명은 숫자, 즉 하나인지 둘인지가 중요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존귀한 것이다. 출산 자체를 제한하던 시대든 출산을 장려하는 시대든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관계에 대한 새로운 생각

 

‘저출산’이야말로 현재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새로운 현상이기 때문에 그 수치를 높이려는 목적의식적 해결은 적절하지도 않다. ‘비혼 출산이 정책적 대응의 영역이 될 수 없는 상태에서 저출산 대응은 혼인율의 유지와 상향, 그리고 국민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의 양육부담의 완화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국회의 현안분석보고서(저출산 관련 지표의 현황과 시사점, 2019.6.4.) 역시 문제의 본질에서 살짝 비켜 간다. 생명의 존재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존재양식은 강요될 수 없으며 다양하여야 한다.

프랑크 쉬르마허의 가족, 부활이냐 몰락이냐 (2006)에 의하면, ‘출산율 저하가 가족 형태를 변화시킬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가족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며 ‘우리 사회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할 수밖에 없는데, 혈연의 가족공동체가 아니라 여러 단계의 계약관계로 얽혀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공동의 선을 이끌어 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치 영화 <가족의 탄생>(2006)을 보는 듯하다. 이는 저출산을 인구학의 차원에서 고민하지 말 것을 의미한다. 법률혼으로만 묶인 혼인에 기초한 사람들만 대상으로 보면 결코 ‘저출산’이라고 볼 수 없다. 통계청이 2017년 11월 발표한 생애주기별 주요 특성 분석 자료를 보면 2010년부터 2015년 사이 법률혼 부부 중 무자녀 비율은 37.2%로 집계되는 등 과거 20년 전과 비교하여 무자녀의 비율이 높아지긴 했지만, 현재의 출생아 수와 추가적으로 계획하는 자녀의 수를 더한 ‘기대 자녀 수’는 2010~2015년 2.07명으로 나타났다. 이는 현재 인구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합계출산율’ 2.1명에 버금가는 수치인데, 이제 의제를 ‘저출산’이 아니라 다양한 가족의 형태로 돌려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다고 생각된다.

2016년 기준 한국의 비혼 출산 비율은 1.9%(일본 2.3%)로 사실상 가장 낮은데, 다른 국가들의 비혼 출산 비율은 20~70% 사이에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평균 40.3%). 멕시코·아이슬란드·코스타리카·칠레는 60% 넘고, 프랑스·노르웨이·스웨덴은 50% 훨씬 넘는다. 따라서 출생 셈법을 법률혼에 한정함으로써 그 나머지를 모두 불법화하려는 전략을 비웃고 그 법률혼 속으로 포섭되려는 방식을 거부하기 위해서라도 프랑스를 비롯한 덴마크·아이슬란드·뉴질랜드 등의 팍스(시민연대계약; Pacs)처럼 아무런 차별 없이 사람 사이의 최소 결합단위를 다양하게 인정하는 게 먼저일 것이다. 자유로운 믿음과 배려에 기초하여 형성된 사회공동체의 최소단위를 굳이 법률혼에 한정하지 않는다면 법률혼 외의 다른 커플의 결합양식을 부정할 이유가 없다. ‘저출산’ 담론의 본질을 따지고 그 셈법의 이견을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법률혼의 강요와 이에 관한 국가의 장악력을 이완시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칼럼은 고영남의 “여성의 몸은 출산기계인가”, [여성과 몸](공저), 소명출판, 2019, 11-38쪽 및 ‘김조광수를 위하여, 김조광수를 넘어서’, <민중의소리>(2013.5.20.)의 문제의식과 내용을 이어 재구성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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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남(인제대학교 공공인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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