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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어떤 감사패의 문구 - 詩와 생활

김정환( icomn@icomn.net) 2019.12.14 22:56

* 만남 - 이성복

 

내 마음은 골짜기 깊어 그늘져 어두운 골짜기마다 새들과 짐승들이 몸을 숨겼습니다 그 동안 나는 밝은 곳만 찾아왔지요 더 이상 밝은 곳을 찾지 않았을때 내 마음은 갑자기 밝아졌습니다 온갖 새소리, 짐승 우짖는 소리 들려 나는 잠을 깼습니다 당신은 언제 이곳에 들어오셨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모였고, 공부했습니다. 함께 울고, 웃고, 걷고, 다투고, 또 쉬며 오늘을 만났습니다. 선생님은 지나갈 인연이 될 수 있었던 우리의 만남을 향기롭고 의미있게 해주셨습니다. 우리 학회 창립 *주년을 맞아 감사의 마음을 이 시와 문구에 담아 *** 선생님께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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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속한 한 학회에서 누군가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감사패를 준비하던 한 임원이 위와 같은 감사패 문구를 제안했고 모두들 동의했다. 나는 단체 대화창에 올라온 위의 감사패 문구를 읽고 또 읽었다. ‘지나갈 인연이 될 수 있었던 우리의 만남을 향기롭고 의미있게 해주었습니다.’라는 시와 같은 인사말이 진짜 詩를 통해 의미가 완성돼 보였다. 내가 받은 감사패도 아니고 내가 드리는 감사패도 아니지만 ‘감사’의 진짜 의미가 ‘만남’이라는 제목의 詩를 만나 빛나보였다.

 

*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생물학적인 생활을 기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그 안의 의미있는 사회학적인 삶의 하루는 언어를 통해 만들어진다. ‘안녕하세요’ 인사 한마디가 의례적으로 건네지면서도 안녕의 의미가 닿아 관계는 아름다워지고, ‘오랜만이네’ 한마디에 시간과 애틋함의 의미를 담아 마음을 전한다. 언어가 없었다면 마음은 공허했을 것이다. 이것이 슬픔인지 괴로움인지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고 외로움인지 심심함인지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언어는 나를 완성시켜 주고 관계를 완성시켜주고 우리가 인간임을 완성시켜주는 대단한 존재이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를 만났을 때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경험이 있다. 나는 나의 언어로 인해 나였던 것을 어릴 때는 잘 몰랐다.

 

* 詩를 사랑한다. 시는 언어로 그 어떤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최고의 수준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아닌 나의 하루는 내가 알고 있고 읽었던 詩만큼의 정도로 더 고양되어지더라.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기형도, 대학시절)”는 시인의 두려움을 이해하게 되니 오히려 떠남에 대해 담담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기형도, 그 집 앞)”의 취함과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최영미, 사는 이유)”의 취함의 차이를 어렴풋이 인식하고서야 취한 내 모습이 왜 때로는 그렇게 미웠다가 때로는 부끄럽고 슬픈지 알게 되었다. “찰랑대는 마음으로 나는 서성거린다(정현종, 찰랑대는 마음으로)”를 만나고 나서 진짜 ‘축하하는’마음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고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의성어 하나가 기다림에 대한 의미를 완성시켜 주었다.

 

* 인생을 소풍에 비유한 한 시인의 짧은 글 덕분에 아주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어느 날에도 즐거움을 잊지 않고자 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져서 도로 가 그 사나이를 들여다보았다는 시인의 자기 연민 덕분에 위로의 소중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詩는 내 생활을 풍성하게 하고 내 삶의 의미를 하나씩 만들어준다. 詩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법을 전공 삼아 공부를 하고 생활을 하니 詩와 한참 멀어져 시간을 보냈다. 감사패 문구를 반복하여 읽다가 내 인생의 고마운 詩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번 주말에는 나의 책장에 꽂힌 시집들을 다시 찬찬히 살펴봐야겠다. 그 어떤 시를 다시 읽고 엉엉 울게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마음이 밝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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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법학박사, 법무법인 도담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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