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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경계(境界) 다원주의: 힘이 아니라 권한 배분이다

이창수( icomn@icomn.net) 2020.09.05 13:24

미래통합당이 9월 2일 전국위원회를 열어 90%의 찬성으로 ‘국민의힘’으로 개명하고, 기본소득과 교육평등의 ‘좌파적인’ 정책을 그 정강에 포함시켰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바뀐 당명의 의미를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힘, 국민을 위해 행사하는 힘,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라고 설명했다. 액면 그대로 이해하면, 국민의 힘으로 자유민주주의 실천, 모든 국민을 위한 정책 추진, 국민 통합과 화해를 추구하는 국민적인 대중정당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보수와 자유 그리고 애국이라는 기존의 정치적인 가치와 이념이 수구, 극우, 대결의 기존 보수진영 기류와 ‘경계’를 획정하겠다는 메시지도 있다. 하지만 그 경계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실천이 따라하다. 일각에서는 이런 정치적인 선언이 실현될지 의구심을 갖는다. 그 근거로 그 당을 구성하는 ‘사람’이 바뀌지 않았다는 점을 들기도 한다. 한 마디로 진정성에 판단을 유보하거나 비판적인 경우도 있다.

 

어떤 국민인가?

 

이 명칭이나 진술된 뜻을 논리적으로 보면, ‘국민의’, ‘국민의 위한’ 정당을 천명했지만, ‘국민에 의한’ 정치적인 인식은 부족하다. 국민의힘에서 말하는 국민은 누구일까? ‘유권자’일 것이다. 유권자는 정치적으로 다수에 속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어린이, 청소년, 재소자나, 외국인노동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인식은 특별히 거론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의미가 없어진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실천이 없다면 다수의 중산층 ‘유권자’가 국민일 뿐이다. 또 국민을 위한 정당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국민은 정책 수혜자인데, 기본소득과 교육평등을 말하고 있어 구성원 모두에게 정치와 정책의 수혜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기득권을 점하고 있는 세력들인,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뿐만 아니라 검경과 법조, 의사, 언론인 등의 권력에 대한 적절한 개혁을 통하지 않고 쉽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분배 정책을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층위와 변종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실천될 정치정책적인 방향을 더 지켜봐야 한다.

그런데 ‘국민에 의한 정치’ 즉 국가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층위와 분야의 국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제도인 ‘국민발안’, ‘국민소환’ 등에 대해서는 인식조차 없다. 철저하게 정치집단과 정치인이 독점하는 현재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간접민주주의가 곧 의회주의로 오해되는 연장선상에 있다. 현재 유지되고 있는 ‘국민동의청원’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겠다는 정도의 선언이라도 있어야 한다. 국민은 정책 수혜자일 뿐이지 정책 결정자의 지위는 보장하고 있지 않는 정치는 여전히 국민주권이 실현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핵심은 단순히 의견 수렴이거나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결정하는가 이고, 국민은 정치적인 결정자인가의 문제다. 물론 이런 국민의 직접 정치 참여는 집권 더불어민주당도 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민주주의의 최종적인 방식이 여기인데도 말이다.

 

하필왈력(何必曰力)인가?

 

맹자가 양혜왕이 자국에 이익될 방책을 묻자, 맹자는 ‘어떻게 반드시 이익을 말하는가’를 되묻고 ‘인의(仁義)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여기에서 따와 나는 ‘국민의힘’이 왜 하필 ‘힘’을 말하는지 자문했다. 힘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결국은 물질적인 힘인, 물리력이다. 이런 힘은 일종 투쟁과 충돌을 내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이런 힘으로 이념 세력간의 자신의 자장에 있는 공간을 지키거나 확대를 꾀했다. 물론 이런 힘들은 나름의 ‘의(義)’나 ‘인(仁)’을 표방했지만 기본적으로 힘으로 상대를 제압라는 방식이다. 정치적인 이념으로 ‘힘’은 물리력을 의미하기 보다는 정당성, 주권의 원천, 다수의 위력적인 시위, 심지어는 표심으로도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여론이다. 그렇지만 이 여론이라는 것도 결국은 다수이거나 정치경제사회적인 영향력이 큰 사람이나 집단의 물리적인 힘이 반영된 것이다. 결국 나는 국민의힘이 하필 왜 ‘힘’을 말하는 것일까 의문을 제기한다. 힘의 논리는 전쟁, 대결, 파괴를 의미한다. 이런 힘은 정치적인 열망이 아니다. 후자는 혁명이나 피억압된 사람들의 단결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힘은 어떠한 경우라도 충돌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경계(境界)의 다양화와 주권의 평등

 

힘은 (기득) 공간을 지키기 위한 물리력이거나 그 공간을 확대시키기 위한 정치경제적인 기득권 세력의 전략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병립되기 굉장히 어렵다. 민주화 이전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작동시켰던 것이 ‘힘’이고 그 ‘논리’였다. 국가권력은 검찰, 경찰, 국정원 등의 권력을 통해서 반대자를 탄압하고, 경제적인 권력을 통해서 노동자들을 굴종시키고 삶을 구걸하게 만드는 천박한 경제체제를 유지시켰다. 남과 북은 군사적인 대결구조를 통해서 자신들의 독재 권력을 유지시켜 왔다. 민주화 이전의 ‘힘’은 남과 북이라는 공간을 유지/변경시키는 군사적인 힘에 기대여 작동했고, 국가와 재벌이 정경 유착을 통해서 유일한 ‘힘’의 원천이 되었다. 이때는 경계는 국가라는 정치적인 공간에서 형성되었다. 즉 경계는 국가였고, 국민이라는 개념속에 포섭되었다. 경계란 남과 구별되는 어느 정도 안정된 선이다. 보이는 경계는 주로 토지를 기반으로 한다. 국경, 토지소유경계선이 그런 것들이고, 집이거나 공원이거나 하는 따위는 모두 이렇게 땅에 금을 긋는 일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군사력이나 법의 명령이고 이를 지탱하는 행정과 정치 권력들이다.

민주화 이후에는 다양한 사회정치적인 세력들이 형성되었다. 법조, 검찰, 경찰, 공무원, 정치인이라는 전통적인 국가권력의 기제를 뿐만 아니라 노동, 언론, 의료, 지식, 시민사회단체, 여성 등 크고 작은 사회가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동일한 국가사회 공간에서 민주화가 진행됨에 따라 남과 구별되는 경계가 형성되었다. 주로 직역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민주 사회는 국가와 정치만이 유일하게 갖는 경계 짓기 권력과 병립할 수 없다. 국민이 국가와 정치의 유일한 대상이 아니다. 국민은 개인으로 보면 어려 사회에 속해 살고 있다. 국가와 대비되는 지역민이기도 하고, 노동자이거나 전문직역의 종사자이기도 하지만 소비자이거나 법률고객이거나 예술의 행위자이거나 수요자이기도 하다. 개인은 다층적으로 경계 집단에 속한다. 민주 사회는 개인이 이런 다중적인 역할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다. 경계는 다층적이다. 유일한 경계를 만드는 권력인 정치권력이 그 권한을 시민들에게 분권시키는 것, 의사가 아닌 의료고객이 의료정책결정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 법률가가 아닌 시민의 상식으로 법을 선언할 수 있는 배심제를 확대하는 것, 입법 과정에서 국민이 일정한 권한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제도 도입과 같은 일들이 가능한 것이 질적인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것이다.

‘국민의’, ‘국민을 위한’ 정치적인 ‘힘’ 또는 ‘세력’의 출현은 여전히 반사적인 것이다. 본질은 ‘국민에 의한’ 정치와 정책이 실천되고 실현되는 것이다. 우리는 경계로 어느 정도 구별되는 집단들이 배타적으로 그 힘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흐릿한 경계이지만 다양한 경계에서 활동하는 개인들을 긍정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발전시키는 방식이다. 문제는 힘이 아니라 방식이고, 그 방식은 시민에게 공적 결정권, 즉 주권을 평등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공적 권한을 배분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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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수(법인권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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