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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흐리멍덩한 선택

김수연( icomn@icomn.net) 2020.09.05 13:34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한테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고 물어본다.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 그 질문을 받고 고민에 빠진 적이 몇 번 있었다. 하얀 종이에 만화 그리는 것을 좋아했으니 ‘만화가’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 당시의 어른들은 그 대답을 싫어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나에게 “만화 아니면 죽는다!”라는 투철함도 딱히 없었고 해서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을 받으면 한참 생각하는 척을 하며 즉답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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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 돼서는 막연하게 ‘천문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다. 한 달 용돈을 받으면 항상 제일 먼저 버스 회수권을 30장 사고 매달 발간되는 『르네상스』, 『하이센스』라는 만화잡지를 사고 추가로 『뉴튼』이라는 과학잡지를 샀다. 빳빳한 종이에 전장으로 ‘올 컬러’의 화려한 우주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수많은 우주 사진 중에서도 오리온자리 바로 아래 위치에 존재한다는 암흑성운 ‘말머리 성운’을 좋아했다. 언젠가 우주비행사가 돼서 그곳에 가리라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우주비행사가 되려면 ‘나사(NASA)’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려면 ‘천문학자’가 돼야 한다고 또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뿔싸. 수학이 발목을 잡았다. 수학을 잘해야 이과를 갈 수 있었고 이과를 가야 천문학과를 갈 수 있었다. 수학이 너무도 싫었던 나는 별 노력도 하지 않고 그냥 그 꿈을 포기했다.

 

고3이 되고 수능을 봤다. 최초로 수능을 본 학년이었다. 8월과 11월의 두 번의 수능 중에서 제일 좋은 점수로 대학을 골랐다. 문제는 ‘과’였다. 이과가 아닌 문과였던 나는 그 어느 과를 간다고 해도 별 상관이 없었다. 다만 가지 않을 대분류만 결정해 놓은 상태였다. 영어영문, 중어중문 등의 어문학 계열만 선택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나머지 사회과학 계열 그 어느 곳이든 상관이 없었다. 딱히 내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니 아버지는 당신이 공부한 ‘정치외교학과’를 권유했다. 딱히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을 정도였기 때문에 별 불만 없이 진학했다.

 

애틋하고 강렬하게 원해서 간 과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전공 공부는 별 재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 싫지도 않아서 그러저러하게 무난하게 졸업했다. 하지만 문제는 ‘취업’이었다. 정치에 뜻이 없으니 정당 사무직으로도 들어가기 싫었다. 그 당시 유명한 국회의원 보좌관 자리도 제안을 받았지만 반나절도 고민하지 않고 고사했다. 나중에 그분은 대통령이 되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딱히 배가 아프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행정고시, 외무고시를 보라는 조언도 싸그리 무시하는 장녀를 그냥 별말 없이 두셨다. 여자의 직업으로 학교 선생님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그 당시의 아버지들처럼 혹시 모르니 학교 다닐 때 교직을 이수하라는 조언도 난 듣지 않았으니까.

 

IMF가 터지고 이력서만 수십 장을 썼다. 연락이 안 오는 회사도 많았고 지원할 수 있는 분야도 ‘비서직’, ‘사무관리직’, ‘총무직’에 한정돼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성격에 전혀 맞지도 않는 분야를 뭣도 모르고 지원하고 다녔다. 취업은 하고 싶었지만 ‘그 일’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 간절함이 덜 했다. 1년을 백수로 보내다 우연히 신문 하단에 난 만화출판사 채용공고를 봤다. 난 두 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지원해서 합격했다. 적어도 내가 만화를 너무 좋아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2년 반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출판사를 다녔지만 그 시간 동안 상당히 행복하고 즐거웠다.

 

이후 생계를 위해 시장에서 옷도 팔아보고 작은 쇼핑몰에 허드렛일을 하는 아줌마 사원으로 1년을 다녀보기도 했다. 그렇게 10년이 흐르고 “나란 인간은 대체 무엇일까?”라는 방황도 끝나니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더 명확해져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난 역시 만화를 보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책을 보고 글을 쓰는 일이 제일 재미있다. 사람을 관찰하고 파악하고 사람의 이야기를 쓸 때 행복하다. 어릴 때 흐리멍덩한 생각들과 방황의 시절이 끝나고 나니 비로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인간인지가 보인다. 지금 흐리멍덩한 선택 좀 하면 어떤가. 어떤 확고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그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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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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