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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결정적 순간

한성주( icomn@icomn.net) 2020.10.13 20:53

저의 취미 중 한 가지는 사진을 찍는 것입니다. 어릴 적 우연히 아버지가 구해주신 수동 카메라가 너무 좋아서 혼자 서점에 가서 오래된 카메라 교본을 샀는데, 카메라 사용 설명서 정도를 기대했던 저의 예상과 달리 그 책은 완전히 사진의 기본을 가르쳐 준 훌륭한 스승이었습니다. 조리개로 빛이 들어오는 구멍의 크기를 조절하고 셔터스피드로 빛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조절해 적절한 밝기의 사진을 담는 법, 그리고 그 조합을 통해 나타나는 피사계 심도 등 어린 나이에 쉽지 않았는데도 사진가가 되고 싶어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면서 개념을 익혔던 기억이 납니다. 거기서 처음으로 사진을 ‘결정적 순간’ 이라 부르는 것을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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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집 “결정적 순간 (Images à la sauvette)”, 1952)

 

사진을 표현하는 말 중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표현이 바로 이 ‘결정적 순간’ 입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Henri Cartier Bresson, 1908년 8월 22일 ~ 2004년 8월 3일) 의 작품집 “찰나의 장면 (Images à la sauvette)” 이 미국에서 출간될 때 ‘The decisive moment’ 라는 제목으로 나오면서 이 말이 브레송과 그의 사진 철학을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지만 ‘결정적’ 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 의미로서의 결정적인 순간이라기보다, 의미와 형태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찰나의 순간에 같이 조화되는 그 장면. 불어 원제목의 의미는 조금 더 ‘찰나의 순간’ 에 가깝다고 할까요.

 

이 결정적 순간을 찍기 위해 브레송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사진 속에는 마치 연출된 것처럼 ‘어떻게 이런 장면을 찍었을까’ 싶은 장면들이 많은데, 그는 이 장면을 모두 ‘기다려서’ 찍었다고 답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한 인물을 모델로 한 사진이 아니라면 그는 사진을 찍히는 대상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사진을 가장 좋아했다고 하죠. 그러다 보니 숨어서 오래 기다리는 과정은 필연적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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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쌩 라자르 역 뒤에서, ⓒHenri Cartier Bresson, 1932)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쌩 라자르 역 뒤에서’를 처음 봤을 때는 왜 이 사진이 유명한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주인공 인물이 멋지게 나온 것도 아니고, 기가 막히게 수려한 경관을 찍은 것도 아니고, 전쟁이나 스포츠처럼 결정적인 어떤 장면을 담은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런데 자꾸 보다 보니 이 장면에서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르는 브레송이 떠올라 미소를 짓게 합니다. 바닥에 고인 물을 피해 점프하는 사람과 물에 비친 그의 모습, 그리고 뒤편에 있는 포스터 속의 무용수의 모습이 그와 묘하게 비교과 되며, 사다리 주변에 둥글게 퍼지는 물결이 바닥에 둥글게 말려 버려진 자재의 모습. 피아니스트 Brailowsky 이 B 자가 가려지면서 railway station 의 바닥에 비쳐진 하늘과 왠지 말장난이 통할 것 같은 Railowsky 까지. 연출한 사진이면 뭘 찍은 거냐고 핀잔을 들었을텐데, 이 순간을 포착한 작가의 위트와 감각이 드러나고 또 그 순간에도 훌륭한 구도로 화면을 만들었기에 이 장면은 두고두고 명작으로 칭송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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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Hyeres, France, 1932 ⓒHenri Cartier Bresoon)

 

두 번째 작품은 프랑스 예르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특별히 어떤 의도로 찍은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나선 계단을 내려다 보는데 길도 둥글게 꺾어지고, 그 장면에서 달려가는 자전거가 완벽한 위치를 지나가는 순간에 포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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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Roma, 1959, ⓒHenri Cartier Bresson)

세번째 작품도 따로 설명이 필요 없죠. 네모난 창문을 통해 햇빛이 비추는 공간에 소녀가 뛰어들어오길 기다렸다가 찍음으로써 결정적 순간을 완성했습니다.

 

브레송은 기계 기술로 여겨지던 사진을 예술의 장르로 끌어들인 사진 작가라는 평을 받는 사람입니다. 물론 라이카(Leica) 라는 훌륭한 과학기술을 가진 브랜드에서 훌륭한 소형 카메라를 만들었기에 그의 작품이 가능했지만, 브레송은 본래 미술 공부를 많이 한 화가였기에 회화의 기본이 갖춰진 상태에서 붓 대신 렌즈를 사용하여 그린 미술 작품이 됩니다. 회화는 주제가 되는 순간이 결정된 후에 그리는 과정에서 작가의 철학과 사색이 가미된다면 사진은 작가의 사색이 선행된 상태에서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활약은 작품활동으로 끝나지 않고, 로버트 카파(Robert Capa), 데이비드 시무어(David Seymour), 조지 로저(George Rodger) 등과 함께 MAGNUM Photos 라는 사진 에이전시를 결성하여 사진작가의 활동영역을 넓히는 일을 하였습니다. 기존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들은 언론사 등에 소속되어 사측에서 지시 받은 사진만을 찍었다면 매그넘은 작가들이 직접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보도 사진을 찍어서 언론사에 제값을 받고 제공하는 구도를 만들었죠. 그러다보니 작가들의 저작권을 보호받을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자신들만의 철학과 작품 방향을 유지할 수 있어 역사적인 작품들을 많이 내놓을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물론 가입 자격이 엄격하게 제한되고 절차가 매우 까다로워 아직 대한민국에는 매그넘 소속 작가가 없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스마트폰이 일상화되고 SNS를 통한 미디어의 공유가 활발한 지금은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지요. 이왕 찍는 사진, 평소에 좋은 사진들 많이 보고 안목을 높여서 우리도 결정적 순간들을 많이 남겼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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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주 : 한의사 ,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IBM Korea 에 잠시 근무를 했다가 세명대학교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한성주한의원(경기도 성남시 판교지역) 원장으로 진료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센인들을 위한 회보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한 적이 있고, CBS 팟캐스트 '스타까토' 에서 정치시사관련 인터넷방송을 한 적이 있으며 국방FM '너를 사랑하기에 전유나입니다' 에서 수요일 고정 코너로 '한성주의 세상풍경' 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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