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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는 사학에서 그 ‘주인’을 몰아내고 그 주인이 아니었던 사람이나 집단들의 자치역량으로써 사학을 운영하는 또 하나의 ‘거친 꿈’을 꾼다. 여럿이 꾸면 그 꿈도 현실이 된다."

 

사학의 주인은 누구인가

사학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고들 흔히 말한다. 설립자를 일컫는 말일 수도 있고 학교법인 이사장이나 총장을 일컫는 것일 수도 있다. 형편과 그 처지가 워낙 다르니 모든 사학에 대하여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는 노릇이나 사학에는 주인이 있고, 주인이 있으니 그 소유관념은 지극히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다. 별도로 인정투쟁을 하지 않아도 국가권력은 물론 시민들 또한 오랫동안 그렇게 인식하여 왔다. 그러나 하나의 강한 의문이 든다. 그 어려운 시기에 막대한 재원을 집어넣어 사학을 세웠으니 그 영광은 영원토록 상찬받아 마땅하지만, 왜 그 주인이라는 분 또는 그 족속들이 지금까지 그 사학을 지배하며 제왕처럼 군림하는 것일까? 한국의 대학, 구체적으로 사학의 대학경쟁력이 뒤쳐진다는 지적은 혹시 여기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 물음이 꼬리를 문다. 그래서 나는 사학에서 그 ‘주인’을 몰아내고 그 주인이 아니었던 사람이나 집단들의 자치역량으로써 사학을 운영하는 또 하나의 ‘거친 꿈’을 꾼다. 그런데 가당키나 한 일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럿이 꾸면 그 꿈도 현실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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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2017년 7월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제8 간담회실에서 열린 공청회 '사학비리 없는 깨끗한 사립학교 만들기'에서 참석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보미 성신여대 졸업생, 김봉수 성신여대 교수, 정대화 상지대 교수 겸 사립학교 개혁과 비리추방을 위한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김명연 상지대 교수, 고영남 인제대 교수, 김영준 민변 교육위원회 변호사)

 

사학에서의 봉건적 지배구조

한국 사학에서의 봉건적 지배체제를 확인하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그 어떠한 정당성도 확보하지 않은 그 ‘주인’이 사학을 제왕처럼 운영한 사례를 확인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교육부의 ‘감사정보’ 웹사이트를 방문하면 지금이라도 수많은 비리의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학교법인과 사학은 그 ‘주인’에게 왜 이리도 쉽게 장악 당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답은 간단하다.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거나 너무 허약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헌법’은 매우 추상적 수준에서 대학에서의 민주주의를 외재적으로나 내재적으로나 보장하지만, 이는 대체로 국공립대학을 전제하고 있다. 한국의 고등교육 중 85% 정도를 사학이 담당하고 있다는 현실을 고려해보면 헌법에서 답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헌법은 하위 법률을 통하여 사학에서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보장하고 영속할 것인지의 고민을 담아야 하는데, 오히려 ‘사립학교법’은 사학의 자주성이라는 빌미로 학교법인에 공공성의 외피를 덮는 데에만 주력할 뿐 사학에서의 민주주의에 관해서는 사실상 침묵한다. 예를 들어 개방이사제도가 학교법인의 공공성을 짙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됨은 분명하지만 이는 그저 제도의 차원일 뿐이다. 개방이사를 어떻게 선출하고 어찌 운영하는지가 핵심인 데 반해 사립학교법은 이것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 오히려 학교법인 이사회를 장악한 ‘주인’과 그 아군에 정당성만 더욱 부여해줄 뿐이다. 이렇듯 사립학교법은 사학의 공공성과 자주성이라는 짙은 색조로써 진작 구축되어야 할 사학에서의 민주주의만 가리고 있는 셈이다.

 

주인의 소유물인 한국의 사학

그러니 사립학교법을 그저 ‘학교법인의 구성과 운영에 관한 법률’이라고 풀어써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 설립자와 그 족속들이 학교법인의 주인행세를 하며 소유하고 그 학교법인이 사립학교를 소유·경영하니, 대학의 구성원들은 물건의 법적 지위만 아니었을 뿐이지 사실상 일회용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 주인과 그 소유물이 너무 명징하게 대칭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 바로 한국 사학이다. 학생은 4년 동안의 소비자이고 직원이나 교수는 마치 이사장이 건네주는 급여를 받는 양 주인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충만할 정도로 이미 이념적이다. 학문의 자유를 이끌 교수가 흩어지고 학습권의 주체가 사라진 사학에서 민주주의는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으며 이제 ‘대학자치’는 들어본 지 꽤 오래된 고사성어에 다르지 않다. 사학에서의 대학운영, 연구 그리고 고등교육은 ‘주인’이나 그 족속의 욕망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에 부합한 대학자치의 엄밀한 실천에 의하여 구현되어야 한다. 그 거친 꿈은 이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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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민주화의 꿈은 이렇게 시작한다

교수와 학생이 교육과정을 함께 고민하고 설계하며 학습의 수준과 넓이를 모색한다. 전공과 트랙을 학생이 설계하여 개설하기도 한다. 강의실과 연구실은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하고 지치지 않는 열정이 묻어나는 토론과 학습의 마당으로써 고등교육의 공동체는 날마다 익어간다. 나는 누구이고 사회는 무엇을 하며 국가는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이 세계와 자연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토론하고 지혜를 나눈다. 그리고 서로의 용기와 격려에 의하여 지식공동체는 사회운동이 되고 자기 수행이 되기도 한다. 이 공동체는 학문과 학습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처지를 고려한다. 교수는 자신이 차별 없는 교수의 위치에 있는지, 학생은 모두 나만의 길을 만들어낼 준비를 하였는지 묻는다. 그리고 격려한다. 어느 누구도, 어느 집단도 낙오되지 않는다. 소외되지 않는다. 그 ‘거친 꿈’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 될 것이다. 총장은 그저 사무총장의 지위에 불과하다. 학장도 그렇고 처장도 그저 참모에 지나지 않는다. 교수마다, 학생마다 자기 세계를 만든다. 교수가 주인이고, 학생이 주인이다. 월급이나 받아먹는 생활인이 아니고, 등록금만큼의 지식과 학위를 거래하는 소비자가 아니다. 학습하고 학문을 닦는 원래의 대학으로 되돌린다. 하나의 연구에 매몰되지 않고, 두세 영역으로 연구가 펼쳐진다. 하나의 전공학습에 머물지 않는다.

어느덧 사학의 학교마당은 사회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어디가 대학이고 어디가 사회인지 알 수 없을 뿐더러 구분되지도 않는다. 주민들이 대학도서관과 강의실로 스스럼없이 찾아간다. 대학의 강의실은 주민들의 학습 열기로 가득 찬다. 학생회관과 식당에의 주민들 발길은 결코 어색하지 않다. ‘이 대학은 누구의 것이요’ 라고 물으면, 그들은 우리 주민들의 것이라고 주저 없이 대답한다. 학생들이 주민행정복지센터와 시청, 그리고 여러 시민·사회단체에서 경험을 쌓는다. 그 학생의 피부색과 국적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교수는 대학이 아닌 사회의 작은 공동체에서 시민들과 고민거리를 나눈다. 시민들과 대화를 하며 그들로부터 기운을 얻는다. 교수들은 지역사회에서 요구되는 지식인의 표본이 된다. 주민들은 자부심을 갖는다. 헌신과 연대에 기댄 학자는 교수라는 직업에 머물지 않고 실천하는 인텔리겐치아로 존재한다. 그리고 대학은 풍성해지고, 대학에서 무르익은 자치역량은 사회 곳곳에 다시 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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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2012년 8월 17일. 인제대학교가 졸업이수학접을 감축하는 학칙개정안을 교무위원회에서 의결하려 하자 이에 항의하여 고영남 교수평의회 의장이 5일간 단식투쟁하고 교무위원회 당일 17일 교수 3명이 동조 삭발하고 학생들도 동조 시위를 함)

 

함께 꾸는 꿈

주인 행세하던 분들이 물러나거나 사라지고 민주주의에 충만한 자치역량이 대학을 운영하고 그 교육과정과 학문연구를 감당하며 사회와 주민 속에서 번영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또 하나의 걱정이 어쩔 수 없이 스멀거린다. 사학이 감당해야 할 고등교육재정이다. 민주주의와 대학자치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의 사학에서 국가가 오롯이 재정과 권한을 독점하려는 그 ‘웅대한 꿈’에도 나는 반대한다. 자유의 정신은 국가와 결코 양립하기 어렵다. 국가의 획일성과 폭력성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현대국가에서의 소금은 대학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점하지 않는 국가의 재정, 충분히 기여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주민의 호혜적 재정 등에 의해 형성되는 고등교육재정이야말로 사학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재원이다. 짧게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이기도 했던 ‘공영형 사립대학 육성사업’도 나쁘진 않고, 최근 일본의 지방정부가 사학과 함께 성과를 내보이는 공립대학으로의 전환도 좋다. 한국은 대학과 학생의 수가 많으니 구조조정이 되어야 한다는 깡패 같은 소리를 여기에서 질러대지 않아도 된다. 마치 교육자인양 사학을 장악한 채 곶감 빼먹는 데 탁월한 그 ‘주인’들을 몰아내고 민주주의에 토대를 둔 자치역량만 견고하다면 그 대학은 많아도 그리 걱정할 게 못 된다. 이미 대학은 담장에 갇힌 학위공장이 아니라 지식 사회의 뚜렷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라면 저 ‘거친 꿈’도 오롯이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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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남(인제대학교 공공인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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