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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물론 답신을 주지 않았다

림수진 교수의 중앙아메리카 이주자 리포트 4

림수진( icomn@icomn.net) 2019.12.24 01:45

희망의 관문인가? 출구없는 절망의 도시인가?

 

2018년 11월 11일 밤 8시 경, 이주자 카라반의 제 1진이 멕시코 내 최종 목적지인 티후아나에 도착하였다. 미국과 바로 맞닿은 곳이었다.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수 천 킬로미터 이상 진행해 온 그들의 여정도 어느 정도 막을 내리는 듯 했다. 물론, 그간 멕시코를 거쳐오면서 그들 스스로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우호적인 지원을 받았던 만큼 티후아나에서도 이와 같은 환대가 이어질 것임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티후아나라면, 도시 자체가 20세기 전반 미국을 향하던 이주자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역사적으로도 이주자들 사이에 ‘구세주의 도시’라 불릴 정도로 호의적인 곳이었다. 누구라도 이곳에만 도착하면  ‘아메리칸 드림’을 바로 목전에 두고 다양한 도움을 받아가며 마지막 여정을 정비할 수 있는 도시였다. 그러기에 이주자들도 일부러 가장 먼 거리를 감수하면서 미국에 닿기 전 그들이 거쳐야 할 최종 관문으로 티후아나를 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도착과 함께 전혀 예상 밖의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1월 11일 밤, 이들이 꼬박 한 달 간의 여정 끝에 마지막 관문이 될 티후아나에 도착했을 때, 이들을 맞이한 것은 지역 주민들의 반대 시위였다. 그간 이들이 멕시코의 남쪽으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받은 환대나 우호와는 너무도 상반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주자의 도시’라 불리는 티후아나에서 벌어진 상황이라면 더욱 놀랄만한 일이었다. 티후아나 시민들은 ‘침입자들은 물러가라’라는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나와 도착하는 이주자들을 향해 강한 반대 메시지를 표현했다.

 

수일 전 멕시코시티에서 이주자 카라반의 멕시코 내 최종 목적지가 티후아나로 정해지면서 국내외 언론들이 연일 이들의 진행을 좇아가며 보도했다. 멕시코 각 주요 방송사 뉴스의 메인데스크도 이미 티후아나로 옮겨진 상황이었다. 사상 유례 없는 상황이 연일 방송을 통해 보도 되는 가운데, 미국에서 날아오는 도날드 트럼프의 트위팅 역시 점점 압력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다. 그 중 최후수단은 국경폐쇄였다. 세상의 관심이 티후아나로 집중되는 가운데 티후아나 시민들은 연일 자신들의 도시를 향해 다가오는 이주자 카라반과 미국 대통령의 최후통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긴장과 갈등, 그리고 두려움이 고조될 수밖에 없던 중이었다.  특히, 시민들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미국과 연결된 경제활동에 기반하여 삶을 꾸려가는 상황에서 국경폐쇄라는 압박은 이들에게 생존에 대한 위협과 별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공교롭게도, 11월 11일 오후 8시 경 최초로 도착한 이주자 카라반 그룹은 80여 명 정도의 성소수자 집단이었다. 수천 명의 이주자 카라반 가운데서도 여전히 멕시코 내에서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은 성소수자 집단이 제 1진으로 도착하면서 이주자 카라반의 도착과 함께 수위를 높여가던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게다가 이들이 다른 이주자들과 섞이기 싫다는 이유로 정부에서 제공한  알베르게(숙소)로 가지 않고 티후아나 해변가에 위치한 중산층 거주지로 들어가면서 이주자 카라반의 티후아나 입성 첫 날부터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시위는 티후아나에 도착하는 이주자 카라반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리고 이로 인한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이 커지면 커질수록 격화되었다. 티후아나  자체가  20세기 초반 이주자들이 모여들면서 만들어진 도시일 뿐 아니라, 그간 미국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이주자들에게 최종 관문 역할을 하며 그들이 만들어 내는 경제적 파급 효과를 누렸다는 점에서 볼 때 이주자들에 대한 반대 시위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간 멕시코 정부나 시민사회가 보여준 반응과도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마침 외국에 출장 중이던 티후아나 시장 Juan Manuel Gastélum도 출장지에서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주 내용은 이주자 카라반을 통제하지 못한 채 티후아나까지 올려 보낸 연방 정부에 대한 성토였다. 멕시코 모든 곳에서 이주자 카라반이 ‘통과 이주자’이지만, 티후아나에선 더 이상 이들이 갈 곳이 없는 ‘정체 이주자’일 수밖에 없는 상황과 맞물렸다. 더불어 당장 미국으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압박에 대한 자구책이었다. 이주자들은 계속하여 티후아나를 향해 쏟아져 들어왔지만, 티후아나 시장은 단 한 푼의 시 예산도 이주자들을 위해 집행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 역사적으로 티후아나가 이주자들을 위한 ‘희망의 관문’이었음이 분명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출구 없는 절망의 도시’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티후아나 시 정부와 시민들의 반응이었던 셈이다.

 

하루 경제 손실 17억 달러

 

티후아나에 도착한 이주자들과 티후아나 시민들 사이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격해졌고, 물리적 충돌로 이어졌다. 이주자들이 연일 국경선 근처에 모이면서 미국은 국경 통과 지점에 무장병력을 배치하고 부분적으로 폐쇄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한 티후아나 시민들의 경제활동에 대한 제약이 발생하면서 이주자들에 대한 시민들의 집단 린치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갈등은 추수감사절이 낀 11월 마지막 주에 절정에 달하게 된다. 11월 25일 이주자 카라반이 미국 측 국경 진입을 시도하면서 미국 국경 수비대가 이들을 향해 최루가스를 난사하고, 즉각적으로 국경도 전면 폐쇄하였다. 전 세계에서 차량과 사람의 통행량이 가장 많은 국경일 뿐 아니라, 그 중 추수감사절은1년 가운데 더욱 많은 차량과 사람들이 이동하는 날임에도 국경이 전면 폐쇄된 셈이다. 이로 인한 양쪽 국경 도시인들이 감수해야할 삶의 불편과 경제적 손실은 자명한 일이었다. 국경 폐쇄로 인한 하루 경제 손실이 17억 달러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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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및 출처: 2018년 11월 25일 티후아나에 정체하던 이주자 카라반이 미국 국경으로 접근하면서 미국측 국경수비대에 의해 최루탄이 발사되었다. 건너 보이는 철조망이 미국측 국경이다.  https://widerimage.reuters.com/photographer/kim-kyung-hoon )

 

당시 티후아나는 부글부글 끓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압력솥 같았다. 지난 며칠 사이 만 명에 가까운 이주자들이 들어왔지만, 미국 정부의 입장은 이들의 입국에 대해 한치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국경 폐쇄라는 강수까지 들고 나왔으니 결국 티후아나 국경에서 이주자들에 대한 반감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더해,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에 대해 ‘안전한 제3국’ 역할을 요청하였다. 미국이 백 번 양보하여 이주자들의 난민 신청을 받긴 하겠지만, 5년이 걸릴지 혹은 10년이 걸릴지 모를 난민 심사 기간 동안 이주자들은 미국이 아닌 멕시코에 머물러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멕시코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고, 현실적으로도 멕시코 치안을 고려한다면 과연 멕시코가 ‘안전한 제3국’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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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및 출처: 이주자 카라반에 반대하여 모인 티후아나 시민들의 시위. 멕시코 국기와 Fuera!! Invasores(침략자들은 물러가라!!)라는 글귀가 적힌 피켓을 들고 모였다. 멕시코 정부가 이주자 카라반의 입국을 허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티후아나에서는 이들을 ‘침략자’로 규정하였다.

https://www.dw.com/es/m%C3%A9xico-protesta-en-tijuana-contra-caravana-migrante/a-46350162 )

 

4,000km의 여정을 이어 왔지만, 더 이상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한 이주자 카라반은 출구가 없는 그 곳, 티후아나에서 딜레마에 빠져버렸다. 티후아나 시 정부와 시민들이 보인 반응 또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에 또 다른 악재가 겹쳤으니, 12월 티후아나의 기상 상황이었다. 북위 31도에 위치하는 티후아나의 기온이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연일 기온이 섭씨 영상 10도 언저리에 머물렀고, 계절적 특성상 비 내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중앙아메리카에서 올라온 이들 대부분이 자신들이 살던 곳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추위였다. 더 이상 풍찬노숙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간 페이스북을 통해 응집력을 가지고 행동하던 이주자들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뚜렷한 지도부가 없는 상황에서 일부는 멕시코 정부가 제공한 항공편을 이용해 본국 귀국을 희망했고, 일부는 어떻게라도 티후아나에서 시간을 벌기 위해 그 곳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시작했다. 다만 당시 1일 최저임금이 미화 5달러를 넘지 못하는 티후아나가 이들에게 큰 매력일 수는 없었다. 12월 6일 유엔 고등 난민 판무관이 개입하여 이들의 난민적 지위를 인정했지만, 이들이 난민 신청을 하고자 하는 미국은 요지부동이었다. 굳이 자국의 치안 부재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껴 난민 신청을 하려거든, 현재 있는 그 곳, 멕시코에서 하라는 입장이었다. 이주자들에게는 사면초가였다. 

 

결국 12월 11일 이주자 대표로 뽑힌 이들이 티후아나에 있는 미국 영사관을 방문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적힌 서한을 전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왜 미국으로 이주하려 하는지에 대한 내용과 미국이 그들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을 경우, 자국(온두라스)내에 주둔한 미군과 미사일 기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더불어 친미 성향인 자국의 대통령도 제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급하게 작성된 듯한 서신은 논리적이지 못했고, 또한 구체적이거나 날카롭지도 못했다. 게다가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 적힌 경제적 요구는 오히려 그간 이들이 힘겹게 이뤄온 어떤 성과들을 한꺼번에 깡그리 무너뜨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물론, 도날드 트럼프는 답신을 주지 않았다

 

두 달 여에 걸쳐 4000km의 거리를 도보 위주로 이주해온 만 명 이상의 귀국 비용으로   이주자 대표가 미국 측에 요구한 돈은 5만 달러였다. 한 사람 당 미화 5달러도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그들 스스로 지난 세기부터 이어진 미국의 개입으로 자국의 경제와 정치가 망가져 어쩔 수 없이 이주를 선택했다면서도, 미국을 바로 목전에 두고 돌아서는 댓가로 5만 달러를 요구한 것이다. 차라리 요구하지 않음만 못한 금액이었다. 5만 달러라는 돈이 그들 수준에서 요구할 수 있는 최고 금액이었다는 사실이 슬픈 현실이다. 그간 이주자 카라반이 특별한 조직이나 지도부가 없이 이어져 왔음을 증명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서한에 적힌 모든 요구가 엉성하고 어설펐다. 이주자들은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에서 서신을 전달하면서 3일 내에 답신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물론, 도날드 트럼프는 답신을 주지 않았다. 

 

티후아나에 정체된 이주자 카라반은 그들의 존재 자체로 더 이상 이슈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들 스스로 더 이상 견디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멕시코 남쪽 국경에서부터 한 달 넘게 그들의 행로를 좇던 국내·외 언론의 관심도 시들해졌다. 이주자들도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수천 명에 달하던 이주자들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다. 더러는 그들 스스로 떠나온 자국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더러는 여전히 티후아나 어디쯤 머물고 있을 것이다. 이주자들이 흩어지면서 그들에 대한 혐오와 공격도 수그러들었다. 다만, 더 이상 그들에 대한 멕시코 사회적 호의와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미 물어 놓은 짐승의 마지막 숨통을 끊 듯, 2019년 5월 미국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를 다시 한 번 압박했다. 계속하여 이주자 카라반에 길을 내준다면 멕시코에서 들어오는 모든 상품에 대해 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즉각적으로 중앙아메리카 이주자들에 대한 단속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매 달 5%의 관세가 추가 인상되어 10월이 되면 멕시코에서 들어오는 모든 품목에 25%의 관세가 부과될 것이라고 공식 발표하였다. 관세 부과 개시 일자는 2019년 6월 10일로 정해졌다.

 

6월로 접어들면서, 다시 국내·외 언론들의 관심이 멕시코로 모아졌고, 다가오는 6월10일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멕시코 외교부 장관이 미국으로 직접 날아갔지만, 미국의 입장은 단호했다. 결국 관세 부과가 예정된 하루 전날인 6월 9일, 멕시코 정부는 그간 이주자들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철회하고 통제와 단속 위주로 전환하겠다고 공식 발표하게 된다.

 

한 낮 꿈이었던가

 

한 낮 꿈이었던가 싶을 것이다. 2018년 10월 이주자 카라반이 만들어지던 시기, 누구라도 맘만 먹는다면, 그들 삶에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아메리칸드림’에 대한 희망을  품어 볼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죽음의 열차’에 올라 목숨을 걸지 않아도, ‘코요테’라 불리는 불법 이주 브로커에게 거액을 지불하지 않아도, 혹은 멕시코 어디쯤에서 만나게 되는 폭력조직이나 마약 카르텔 조직원에게 ‘목숨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될 법한 일이었다. 여성들이기에 더욱 위험하고 참담하던 이주였는데, 오히려 여성이기에, 혹은 아동이기에 더욱 보호를 받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설령 수중에 가진 돈이 없어도, 이주자 카라반에 합류하는 순간 미국에 이르기까지 최소한의 잠 잘 곳과 먹을 것이 제공된다 하였으니,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았다. 그렇게 수 만 명이 이주자 카라반에 합류했지만, 너무 빠르게 사그라져버렸다.

 

160명으로 시작된 숫자가 수만 명까지 불어나면서, 그들 스스로 미미한 시작의 끝에 분명한 창대함이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을 목전에 둔 티후아나에서 길이 막혔고 멕시코 정부마저 미국의 관세 압력에 중앙아메리카 이주자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낮 꿈은 깨어졌다. 2017년 온두라스의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불거진 개표 부정의 충분한 의혹과 그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 반대하여 “우리는 이제 발로 투표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등장한 2018년의 이주자 카라반은 그 끝의 창대함에 이르지 못한 채 신기루와 같이 사라졌다.

 

이제 다시 중앙아메리카 이주자들은 ‘죽음의 열차’에 올라야 할 것이고, 그들의 ‘목숨값’을 챙겨야 할 것이며,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코요테’에게 돈을 주고 그들의 목숨을 맡겨야 할 것이다. 물론 15미터 높이에 달할 것이라는 미국 국경에 닿기 전에도 그들은 여정 순간 순간 넘어야 할 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때론 그 벽 앞에 목숨을 내걸어야 할 것이다. 다만, 미국이 아무리 높은 장벽을 쌓아 올린다 해도, 혹은 그들이 순간 순간 만나는 이주의 장벽이 아무리 험하다 해도, 그들이 사는 곳의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계속하여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주에 나설 것이다. 그들이 사는 곳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살인율과 빈곤율로 점철된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들이 살아가면서 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목숨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는 곳이든, 혹은 아메리칸 드림을 향해 가는 길 위에서든 말이다.

 

2019년 말 현재 미국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은 단 한 명의 이주자도 난민의 자격으로 받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이지만, ‘북쪽’ 미국을 향한 이들의 이주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한 낮 꿈이 깨어졌다 해서 이주를 멈출 만 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살인과 빈곤이 횡행한 가운데 탈출에 가까운 이주인 셈이다. 비단, 이곳 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곳에서 적법하지 못한, 혹은 합법적이지 못한 이주가 계속되고 있다. 또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이주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낸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중앙아메리카 북부삼각지대라 불리는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그리고 과테말라의 경우, 이 세 나라에 점철된 빈곤과 살인의 역사를 지난 세기 그들이 겪었던 지독한 내전과 따로 떼어 볼 수 없는 상황이라면, 과연 미국은 그들의 과거로부터, 그리고 작금의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대해 한 번 쯤 물음을 제기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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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수진(Lim, Su Jin),

멕시코 콜리마주립대학교 정치사회과학대학

(Facultad de Ciencias Políticas y Sociales, Universidad de Colima)

 

일곱 살 먹던 해 겨울, 할머니를 따라 서울에 갔습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서울역 광장에 단아하게 선,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서울역사 앞에서 짜릿한 흥분을 느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각인이었습니다. 이후 늘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였습니다. 결국, 이다음에 크면 반드시 관광버스 운전수가 되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진 못하였습니다. 대신, 지리학을 공부했습니다. 공부를 핑계 삼아 원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만 서른 살이 되던 2001년, 코스타리카로 갔습니다. 19세기 말 파나마 운하 건설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의 증손자 쯤으로 신분을 둘러대고 커피밭에 ‘위장취업’을 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커피를 따면서 3년을 보냈습니다. 하루 1달러도 벌지 못하는 저 ‘불량노동자’를 걱정하며 자신들이 딴 커피와 음식과 마음을 나눠준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대부분이 니카라과에서 건너온 불법 이주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들의 삶을 좇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2006년 이후 현재, 멕시코 콜리마주립대학교 정치사회과학대학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주’, ‘국제분쟁’, ‘지정학’ 등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2010년 이후 멕시코 연방정부 고등과학기술위원회 소속 국가연구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커피밭 사람들: 라틴아메리카 커피 노동자, 그들 삶의 기록>, <21세기 중앙아메리카의 단면들:내전과 독재의 상흔>, <세계의 분쟁(공저)>, <디코딩라틴아메리카: 20개의 코드(공저)>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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