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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비와 나의 공간

김정환( icomn@icomn.net) 2020.09.01 01:42

1. 참소리에 내 작은 생각들을 쓰기로 하고 몇 편의 글을 썼었다. 소송에 대한 글도 있었고 여행에 대한 글도 영화에 대한 글도 있었다. 어떤 내용을 써도 괜찮다는 것은 매력적이었다. 내 정치색과 지식을 애써 포장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가장 최근에는 수어(手語)에 대한 글을 쓰고는 그 후속편까지 약속을 했더랬다. 그런데 그 뒤로 몇 달간 나는 글을 쓰지 못했다. 매일 글을 쓰는 것이 일이고 생활인 내게 (변호사는 말하는 직업이 아니라 글 쓰는 직업이다) ‘완결된 하나의 자유주제’인 글이 오히려 너무 어려웠다. 약속한 수어에 대한 글을 마무리 하지도 못했다. 오늘 수어에 대한 글을 몇 달만에 이어 쓰기 위해 내가 쓴 수어에 대한 소논문과 자료를 찾아 읽고 있었다. 사무실 밖에 갑작스런 폭우가 내린다. 한참 비를 구경했다. 그 소리가 요란하다. 2020년은 코로나의 공포가 지배하더니 그칠 줄 모르는 비가 또 사람을 괴롭힌다. “2020년 가을에는 외계인이 침공했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아. 무슨 일이 또 일어날지 알 수가 없네.” 이런 재미없는 농담을 던지며 살고 있다. 무기력, 우울, 어쩔 수 없음과 같은 느낌이 지배하는 2020년.

 

2. 엄청난 폭우다. 우울이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별장면에선 항상 비가 오지 열대우림기우 속에 살고 있나” 오래 전 이런 노래 가사를 따라 불렀었는데 이정도 비면 정말 우리나라가 열대우림기우인 듯하다. 이번 여름은 뭔 비가 이렇게 요란스럽게 많이 오는지 혼자 투덜거리다가 문득 비에 대해 내가 잊고 있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비를 ‘좋아하기로’결심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상당기간의 우울감 속에 나는 그걸 잊고 있었다. 2020년 8월 30일 서울 서초동에 갑자기 내린 엄청난 폭우를 바라보며 나는 오랜만에 다시 쓰는 이번 칼럼에 비에 대한 내 생각을 간단히 적기로 마음 먹었다. 수어나 소송에 대한 이야기는 또 나중으로.

 

3. 대학생 시절 어느 비오는 날, 나는 갑자기 비오는 날을 좋아해 보기로 했다. 좋아서 좋아하는게 아니라 그냥 좋아해 보기로 했다. 날씨는 좋은 날씨거나 비오는 날씨인데 비오는 날씨를 좋아하면 모든 날씨는 좋은 날씨 아닌가 그런 싱거운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는 진지했다. 그 다음부터 의식적으로 비오는 날의 여러 가지 좋은 점을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나는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일부러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신기하게 비오는 날이 좋아졌다. 모든 날씨는 좋은 날씨였다. “오늘도 좋은 날씨” 매일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것이 좋았다.

 

4. 신림동에서 고시공부 하던 시절 옥탑방에 살았던 적이 있다. 옥탑방은 비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조금만 비가 와도 바로 비가 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빗소리를 들으며 ‘내가 있는 이 곳은 옥탑방이구나.’그런 생각을 했다. 옥탑방에서 여기가 옥탑방이구나 다시 생각 하게 되는 계기는 의외로 다른 것이 아니라 ‘비’였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원래 내리는 비는 소리가 없다. 물이 떨어지는데 무슨 소리를 가지겠는가. 물은 내 주변의 그 무엇에 부딪혀 소리를 낸다. 비오는 날 빗소리를 들으면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비(물)는 우리에게 너는 지금 어디니?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대화를 걸어준다고 여겼다.

 

5. 한참 후에 김수열 시인의 "비는 소리가 없다"는 시도 알게되었다. 뭔가 내 생각이 들어있는 시인 것 같아 좋으면서도 질투도 났었다.

 

"비는 소리가 없다."

김수열

정작 비는 소리가 없다는 걸

이때도록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늘 어드메쯤에서 길 떠나

지상 어딘가에 닿을 때까지

비는 아무 텅 빈 후에야 알았습니다

비에도 길이 있어 그 길 따라

바다가 닿으면 파도 소리가 되고

키 큰 나무에 내리면

푸른 나뭇잎소리가 되고

더는 낮아질 수 없는 개울에 닿으면

맑은 물소리가 된다는 것

그와 헤어져 인사도 없이 돌아선 날

내 가슴으로 내리는 빗줄기에는

아무 소리도 없다는 것 알았습니다

 

6. 2020년의 잇단 빗소리는 유난히 더 우울했다. 빗소리에 슬픈 사연도 많이 담기게 되었다. 그리고 슬픈 사연이 있는 사람들은 빗소리를 더 슬프게 듣게 되었겠지. 나는 비가 내릴 때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여기 이렇게 살고 있구나.’ 시간이 한참 흐른 후의 그 언젠가의 빗소리에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그 때는 그랬지’라고 지금을 단지 아련하게 떠올리면 좋겠다. 또렷하게 2020년이 슬픈 기억으로 남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련해야 한다. 2020년 지금 빗소리는 우울하지만 그 언젠가가 될 미래의 그 공간에서의 빗소리는 좀 더 유쾌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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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법학박사, 법무법인 도담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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