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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삼전도의 교훈

한성주( icomn@icomn.net) 2020.09.01 01:45

우리 민족의 역사 중에 가장 굴욕적인 장면 중 하나는 바로 병자호란의 끝에 있었던 삼전도의 굴욕입니다. 인조 15년이던 1637년, 청나라의 장수에게 조선의 임금이 직접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던 그 날이지요. 청나라는 이전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오랑캐에 불과했으나 어느 날 세력을 키워 명나라를 위협하기 위해 조선을 쳐들어왔고, 이를 막아낼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조선의 임금은 남한산성에서 끌려나와 결국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림)’ 의 예법으로 청나라를 황제로 모시겠다는 예를 행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던 순간입니다.

남한산성.jpg

(사진: 영화 남한산성 중에서)

 

여기서 우리의 이목을 끄는 조정 대신 두 사람이 있으니 바로 척화파의 김상헌과 주화파의 최명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 놈들에게 우리 임금이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당할 수 없으니 차라리 죽을 때까지 싸우자는 김상헌이 척화파요, 우선 군사적으로 불리하니 명분을 위해 백성을 희생시키지 말고 잠깐의 굴욕을 참고 화의를 함으로써 조선의 안위를 지켜내자는 최명길이 주화파였던 것입니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고 오랑캐에 대한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김상헌이 보기에 최명길은 대의명분 없이 그저 목숨만을 구걸하는 비루한 배신자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명길의 의견은, 오늘 임금이 치욕을 무릅쓰고서라도 백성들의 안위를 지켜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그린 영화 ‘남한산성’에서 최명길은 “치욕은 참을 수 있사오나 죽음은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라며 일단 목숨을 부지하자고 간청하지요. 둘 다 맞는 말입니다. 명분을 강조하던 김상헌이 걱정했듯이 비록 오늘 목숨을 부지한다 해도 백성들 앞에서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임금의 모습을 보인 후에는 이미 임금이 임금으로서의 통치력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나라의 국격이 사라진다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던 김상헌은 청에게 가져다 주려던 최명길의 화의문서를 찢어버렸고, 최명길은 이 찢어진 화의문서를 다시 주웠는데, 이 장면을 두고 숙종 때 문신 남구만은 “찢는 자도 없어선 안 되고, 다시 줍는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 (裂之者 不可無 拾之者 不可無)” 는 평을 남겼습니다. 나라의 슬픈 역사 앞에 울부짖으며 굴욕적인 화의문서를 찢는 사람 정도는 조정에 있어야 옳고, 다른 한 편으로는 대의 명분만으로 백성들을 모두 전쟁 속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으니 이를 다시 주워 화의를 통해 전쟁을 멈추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뜻이었을 겁니다.

 

서로 정반대의 의견이지만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이 논리는 현대민주사회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론통합’ 이란 이름으로 이견이나 잡음 없이 정책이 진행되는 건 오히려 파시즘이나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나 가능할 뿐 민주주의는 본래 시끄러운 것이고, 각자가 내세우는 명분과 실리의 균형을 통해 더 나은 길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본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물론 최소한 솔직한 토론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겠지요.

 

세상의 일들은 생각보다 선과 악으로 쉽게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경제 정책에 있어 성장이냐 분배냐의 문제도 누군가는 성장을 위한 정책을 내어야 하고, 누군가는 빈부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냄으로써 정반합의 논쟁을 통해 변증법적인 사회 제도의 개선이 지속되어야 하지요.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면서도 기업의 이윤 추구는 존중하여 지속가능한 성장을 꾀해야 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최근 들어 일어난 의사들의 파업 역시 더 많은 국민에게 의료서비스가 닿아야 하지만 그것이 의료인의 희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료인에게도 충분한 보상이 돌아감으로써 의료의 질을 같이 향상시키겠다는 포인트를 생각하면 모두 비슷합니다.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는 서로간의 이견을 선과 악으로 잘못 가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일부 개인을 제외한다면 어느 한 쪽도 절대 악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입장 차이를 확인하고 설득을 한 다음 어쩔 수 없이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를 인정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어느 한 쪽의 가치도 무시되거나 잊혀서는 안 됩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나란히 심양의 감옥에 갇힌 김상헌과 최명길은 다행히 감옥에서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화해를 했다고 합니다. 김상헌이 압송된 이유는 청이 명을 공격할 때 조선에서 원군을 보내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고, 최명길은 조선의 원군이 적극적으로 명을 공격하지 않도록 하는 밀사를 보냈다가 적발되었기 때문이었는데, 감옥 안에서 서로의 진심을 알아보고 결국 서로 공경하고 존중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생각이 다를 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았다는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이겠지요.

 

우리 사회도 보수와 진보의 대립, 지역 간의 대립, 세대 간의 대립, 그리고 이제는 직역 간의 대립도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지만 언젠가는 김상헌과 최명길처럼 서로의 우국지정과 진정성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날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누가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대에서 반드시 포기하지 않고 소통의 노력을 지속해야만 가능한 일이기에, 오늘도 우리는 고민하고 소통하기를 멈추지 않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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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주 : 한의사 ,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IBM Korea 에 잠시 근무를 했다가 세명대학교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한성주한의원(경기도 성남시 판교지역) 원장으로 진료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센인들을 위한 회보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한 적이 있고, CBS 팟캐스트 '스타까토' 에서 정치시사관련 인터넷방송을 한 적이 있으며 국방FM '너를 사랑하기에 전유나입니다' 에서 수요일 고정 코너로 '한성주의 세상풍경' 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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