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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왕안석의 개혁 정신

개혁의 대상인 기득권이 오히려 개혁 주체에게 모든 죄를 전가하는 현상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셈이다

김영문( icomn@icomn.net) 2021.01.06 12:13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특권과 편법이 만연된 사회를 개혁하는 일은 지난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기득권에 기대 이익을 향유해온 파당이 모든 힘을 동원하여 개혁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개혁가 왕안석(王安石)이 추진한 신법(新法)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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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송(北宋)의 개혁가 왕안석은 22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며 직접 민생 현장을 경험하고 각종 절실한 대책을 강구하여 뛰어난 치적을 보였다. 왕안석의 치적이 중앙 조정으로 알려지면서 당시 북송 인종(仁宗)은 그를 탁지판관(度支判官)으로 발탁했다. 1058년 처음 조정 내직으로 진출하면서 왕안석은 인종에게 현실 사회의 절실한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국사에 대해 인종 황제에게 올리는 글(上仁宗皇帝言事書)」을 진상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이후 인종을 이은 영종(英宗)이 일찍 죽고 그의 맏아들 신종(神宗)이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즉위하여 새로운 정치를 꿈꾼다. 신종이 즉위한 무렵 북송 조정은 안으로 인종의 성세가 끝난 후 호족의 토지 겸병이 늘어나고 대상인의 독점적 이익이 확대되면서 자영농과 소상인이 몰락하고 있었다. 또 밖으로는 거란족 요(遼)나라와 서역 이민족 서하(西夏)의 침략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1068년 신종은 지방행정관으로 명성을 날린 왕안석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발탁하여 신법(新法)의 전권을 맡긴다. 왕안석은 기득권 세력의 완강하고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신법을 시행한다. 그중 유명한 것이 청묘법(靑苗法), 균수법(均輸法), 창법(倉法),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 등이다.

‘청묘법’은 대지주가 춘궁기에 아사에 직면한 농민에게 높은 이자로 식량과 종자를 빌려주고 가을에 가혹하게 돌려받는 악폐를 시정하기 위해 국가에서 낮은 이자로 식량과 자금을 빌려주는 개혁 법안이다.

‘균수법’은 조운을 통해 공물을 운송할 때 중간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는 유통구조를 개혁하여 발운사(發運使)라는 관청에서 모든 공물을 일괄 통제하도록 한 개혁 법안이다.

‘창법’은 정식 녹봉이 없어서 백성을 수탈해서 먹고 살던 서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하고 정식 관리로 승진할 기회를 제공하여 부정부패의 중요한 고리를 끊어내려는 개혁 법안이다.

‘방전균세법’은 막대한 토지를 겸병한 대지주들에게 토지 소유 면적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는 개혁 법안이다.

하지만 왕안석의 개혁 정책은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구법당의 벌떼 같은 반대와 공격에 직면했다. 당시 왕안석 주변의 많은 사람이 왕안석에게 기득권과 타협할 것을 권했으나 왕안석은 분명한 논리와 강경한 자세로 신법을 추진한다. 그런 왕안석을 당시 사람들은 요상공(拗相公)이라 불렀다. 고집불통의 집요한 재상이라는 의미다.

안타깝게도 개혁의 결과물은 짧은 시간에 쉽게 나오지 않았다. 또한 왕안석의 비타협적인 개혁 정책에 피로감을 느낀 신종이 왕안석을 멀리하기 시작하고, 기회를 얻은 구법당들이 신법은 불길하고 국가에 변란을 초래한다는 도참설까지 동원하여 왕안석에게 공격을 퍼붓는다.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려는 수구파들의 전방위적인 공격에 개혁의 길은 점점 막히게 되고 결국 신종 사후에 태황태후 고씨(高氏)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구태의연한 옛 제도로 복귀하고 말았다.

이후 철종(哲宗)이 재위 15년 만에 죽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에 이르면 송나라는 여진족 금나라에 황제가 잡혀가고 일부 왕족만 장강 남쪽으로 도망가서 겨우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개혁을 외면하고 기득권에 집착한 대가는 이처럼 막대하다.

비애로운 일은 남송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朱熹)가 북송 망국의 원인을 오히려 왕안석의 신법에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석이 법가에 가까운 신법을 시행함으로써 공맹의 원리를 부정하고 성리학의 대의명분을 내버렸다는 것이다. 개혁의 대상인 기득권이 오히려 개혁 주체에게 모든 죄를 전가하는 현상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셈이다.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시대에도 주희의 영향으로 거의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왕안석을 소인배로 취급하며 그의 신법을 성현의 법에서 벗어난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난동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정조(正祖)는 왕안석의 신법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시행할 만한 좋은 제도까지 모두 폐지해서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야 왕안석이 좀더 융통성 있고 타협적으로 신법을 시행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당시 조정 안팎의 강고한 기득권에 둘러싸인 왕안석의 입장에서는 한발짝도 물러설 수 없는 백척간두에 서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은 융통성과 타협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의 신법이 누더기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왕안석이 1021년생이므로 올해 2021년은 그의 탄생 1000주기에 해당하는 해다. 지금 우리 사회도 각 분야에서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는 중이고, 이 과정에서 철옹성 같은 기득권 세력의 강력하고 집요한 방해에 직면해있다. 물론 1000년 전 왕안석 시대와 1000년 후 우리 시대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다. 1천 년의 역사 동안 우리는 수많은 경험과 지혜를 축적해왔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왕안석의 개혁 정신이다. 1000년 전 왕안석의 흔들림 없는 개혁 정신을 가져와 그동안 축적해온 우리의 경험과 지혜를 버무려 넣는다면 보다 민주적이고, 인간답고, 평등하고, 특권 없는 개혁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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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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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학자. 번역가.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문학박사.

중국 베이징대학 방문학자(한국연구재단 Post-Doc.)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역임.

경북대, 서울대, 한국교통대 등 대학에서 다년간 강의.

저서: 『노신의 문학과 사상』(공저), 『근현대 대구경북 중국어문학수용사』(공저) 등,

역서: 『동주열국지』(전6권), 『원본 초한지』(전3권), 『삼국지평화』, 『정관정요』, 『자치통감을 읽다』, 『문선역주』(전10권 공역), 『루쉰전집』(전20권 공역) 등 3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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