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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완벽한 지옥, 장엄한 탈출

[서평] 완벽한 아이(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복복서가, 2020)

김경민( icomn@icomn.net) 2021.01.09 15:51

감옥, 수용소, 전쟁, 절대 빈곤 등과 같은 극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픽션이나 논픽션을 일부러 찾아서 읽을 때가 있다. 그러지 않아도 살기 팍팍하고 심란한데 이 무슨 이상한 심리인가 싶기도 하지만 말하자면 이건 싸구려 진통제 대신 근본적인 치료제를 원하는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죽음보다 못한 삶’이라는 말이 있다. (진짜로 그런 삶이 있는가에 대해선 내가 감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살다보면 참기 힘든 고통에 맞닥뜨릴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은 추위와 굶주림 같은 육체적 고통일 수도 있고, 모멸감과 배신감과 증오심과 상실감 같은 정신적 고통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공포일 수도 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왜 자살하지 않고 사는 쪽을 택하는가. 죽음에 대한 단순한 공포 말고도 그들로 하여금 자살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 삶의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반면에 끝까지 읽는 것이 너무 힘든 이야기가 있다. 아동 학대,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짤막한 신문 기사도 읽는 게 너무 괴롭다. 내 안에 겨우 남아 있는 인류애가 박살나는 기분이 들면서 읽거나 보고 나면 며칠 동안 꿈자리까지 사나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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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아이》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복복서가, 2020)를 한 줄로 정리하면 ‘괴이한 수용소에서 행해진 15년간의 아동 학대 실화’라고 할 수 있다. 고압선 철책이 둘러진 것은 일반 수용소와 비슷하지만 이 수용소가 괴이한 이유는 수용소의 소장이 포로들의 남편이자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수용소는 일종의 사이비 종교 집단 거처이기도 하다. 이 사교 집단의 구성원은 3인 가족(아버지, 어머니, 딸)이며, 교주는 아버지다.

 

이 글을 쓴 작가의 아버지는 스스로를 프리메이슨 교단의 높은 직급에 있는 선지자라고 주장하며, ‘인간은 더 없이 사악하고, 세상은 더 없이 위험하다’는 믿음 아래 프랑스 어느 시골 마을에 큰 저택을 짓고 아내와 당시 만 세 살이던 딸을 데리고 들어가 외부와 단절한 채 살아간다. 그가 아내를 만난 건 그의 나이 서른네 살, 아내는 겨우 여섯 살 때였다. 그는 다시는 원래 가족과 만날 수 없다는 조건을 걸고 가난한 광부의 막내딸이던 소녀를 데려와 대학까지 교육시키고, 스물여덟 살 아래의 그녀와 결혼한다. 그리고 딸을 낳는다. 그는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딸을 외부와 고립시킨 채 교육시키기 위해 자신이 만들어둔 수단, 바로 자신의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딸이 자신을 이어 이 혼탁한 세상을 구원할 초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초인에게 마땅한 ‘교육’이라는 것을 어린 딸에게 행한다.

 

그가 어린 딸에게 행하는 훈육, 교육이라는 것은 비상식적인 수준을 넘어 가학적이고 엽기적이며 역겨운 것들이다.

 

* 물이 꽝꽝 얼 정도로 추운데도 난방을 하지 않은 방에서 자게 한다. (초인은 인내심이 있어야 하므로.)

* 기상 시각은 새벽 6시, 취침 시각은 밤 11시 30분이고 스케줄은 분 단위로 짜여있다. (물 마시는 시간, 소변 누는 시간까지 초 단위로 정해서 어기면 안 된다.)

*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소변 시중’을 딸에게 들게 한다. (자신이 소변을 누는 동안 그 소변을 담는 투명한 유리병을 딸에게 들게 하고, 그 소변을 딸이 버리게 한다. 이건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믿음으로.)

* 쥐가 득시글거리고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지하실에 정기적으로 딸을 가두어 놓는다. (초인은 죽은 자와도 교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곳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교감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정원을 밤에 혼자 돌게 한다. (초인은 담력이 있어야 하므로.)

* 독주를 식사 때마다 식전주(Apéritifs)로 무조건 다 마시게 한다. (초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신이 흐트러지면 안 되므로.)

* 여러 종류의 육체적 고통을 가하고 이를 참아 내게 한다. (혹시나 나중에 어둠의 세력에게 납치되어 고문을 당하더라도 무너지면 안 되므로.)

* 공중 2회전 덤블링을 어떤 보호 장비도 없는 맨바닥에서 성공할 때까지 연습하게 한다. (혹시나 존재가 발각되어 어둠의 세력에게 쫒기면 가장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서커스단이라는 믿음으로.)

* 아이가 사랑하는 동물을 학대하는 거에 아이를 협박해 동참시킨다. (초인은 연민 같은 너절한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되므로.)

 

이 황당한 리스트는 어디까지나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곱 살 아이에게 행해졌고, 그 아이가 만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20세기 프랑스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작가는 1957년생이다) 이렇게만 들으면 도대체 이걸 사실로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책을 읽다보면 이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걸 도저히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버지라는 인간이 이러고 있을 때 어머니라는 사람은 뭐했나. 그녀는 흡사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동생에게 빼앗긴 큰딸’처럼 행동한다. (실제로 남편과 나이 차가 무려 28년이 난다.) 고통 받는 자신의 딸을 보호하기는커녕 방관하며 질투하며 함께 학대한다. 그러면서 남편에 대한 공포와 증오와 경외감과 의존감과 무시가 어지럽게 뒤섞인 감정을 갖고 있다. 그녀는 아동학대의 공동 가해자이자 남편의 망상 실현의 부역자이면서 동시에 ‘식인귀’(작가는 자신의 아버지를 이 단어로 표현한다.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폭군’보다는 이 단어가 훨씬 적절하게 들어맞는다.)의 첫 희생자다.

이런 부모와 살아야 하는 아이는 고통스럽다. 부모를, 특히 아버지를 극도로 무서워하며 증오한다. 그렇지만 (너무나 가슴 아프게도) 학대 받는 아이가 흔히 그렇듯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게 심한 죄책감을 느끼며, 아버지가 아주 가끔씩 보여주는 희미한 친절의 실마리를 붙잡고 어떻게든 희망을 품어보려는 노력도 한다.

 

읽는 내내 충격과 분노와 슬픔이 밀려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한 번 붙잡으면 끝까지 읽지 않을 도리가 없는 이야기다. 이는 어린 시절의 고통을 서술하는 작가의 태도 때문이다. 40년 전의 어린 아이가 겪어내야 했던 고통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생생하고 구체적인데도 서술의 톤은 놀라우리만치 담담하다. 독자는 그 묘사와 어조의 간극에서 생겨난 공간에 자신을 세울 수 있다. 그 공간에 서 있다 보면 놀랍게도 고통 말고도 다른 것이 보인다. 그것은 온힘을 다해 고통에 맞서는 놀라운 자유의지와 생명의지이다. 아이는 가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해를 하지만 ‘원할 때 스스로 멈출 수 있는’ 고통이기에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문학 작품의 주인공들에게 자신을 이입해 그들과 대화를 하며 공상의 나래를 펼치고, 부모 몰래 글을 쓰면서 자신만의 ‘비밀’과 부모를 속일 ‘거짓말’을 만들어 나간다. 키우는 동물들과 영혼으로 교감하며 그들에게 자신의 온 마음을 다 담은 사랑을 준다. 압도적인 고통 속에서도 아이는 이 자유의지와 생명의지와 사랑을 끝내 놓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어쩌면 아이는 정말 초인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감금된 지 15년 만에 마침내 그 집에서 탈출한다. 그녀는 이 탈출을 단 두 문장으로 표현한다. “나는 내 부모의 집을 나왔다. 정말로 나왔다.” 아무리 부모 자식 사이라 해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의도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계획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얼마나 끔찍한 망상인가. 이 망상은 사이비 종교에나 어울리는 것일 테지만 과연 사이비 종교 집단에만 있는 것인가. 따지고 보면 이 망상은 특이하고 극단적인 형태일 뿐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사실상 이 망상은 가부장제를 떠받치는 신념과 구조적 동일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에서 벌어졌던, 현재도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폭력들은 결국 이 망상이 만들어낸 참혹한 지옥이 아니던가. 그 지옥 속엔 식인귀와 부역자, 식인귀와 희생자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다.

더 나아가 신(神)을 가부장의 관념으로 설정해 놓고 수많은 사람들(특히 여성들)을 기만하고 지배하고 착취해온, 다분히 남성중심적인 기존의 종교는 어떤가. 사이비와 사이비 아닌 것은 언제나 그렇듯 생각보다 경계가 희미한 법이다. 비단 종교뿐만이 아니다. 이 자리에 학교, 국가, 이데올로기를 놓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기에 나는 이 담박한 두 문장이 그 어떤 탈출 모티브의 문학작품 결말보다 대단하게 느껴졌다. 완벽하게 길들여져 식인귀에 먹힐 수도 있었던 어린 소녀는 스스로를 신이자 선지자라고 착각했던 가부장의 절대적 권위와 압도적인 폭력에서 결국 벗어난다. 실로 장엄한 탈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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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대학원에서 국어교육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지금은 교사를 그만두고 두 아이를 키우며 꾸준히 읽고 쓰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를 비롯해 네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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