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오피니언

시리아·미얀마와 한국인·세계시민

이창수( icomn@icomn.net) 2021.04.06 20:03

2011년 3월 18일 시리아 다라에서는 “알아사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평화시위가 시작되었다. 민주봉기는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시리아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아사드 정권에 의해 유혈 진압되고, 종국에는 내전으로 치달았다. 정부군, 반군, 이슬람국가(IS), 러시아 등이 이 지역에서 전쟁을 이어갔다. 시리아인들은 이웃과 유럽의 나라들로 유동하였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난민이 발생했다. 벌써 10년의 시간이 지났다. 해결된 것은 없다. 국제사회와 유엔, 민주와 정의, 그리고 평화와 행복이라는 말들은 그냥 삶의 환타지를 장식하는 단어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런(?) 문제없이 살고 있다. 시리아의 정치 상황이나 시리아인들의 삶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되어 버렸다.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다는 이유가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한국인’이라는 외피를 쓰고 ‘시리아인’과는 다른 처지에 있다는 변명을 하지 않았던가.

KakaoTalk_20210401_141132625_02.jpg

(사진: 전북도청 앞에서 지난 1일 미얀마 군부 규탄 기자회견에 앞서 헌화하는 모습)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에 저항하는 미얀마 시민들의 민주 투쟁을 쿠데타세력들은 유혈 진압하고 있다. 수 백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학살당했다. 이런 미얀마 상황도 나는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관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절한 개입을 하지 않고도 살아가는데 크게 불편함이 없다.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학살 상황을 마주하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런 ‘한국인’, ‘시리아인’, ‘미얀마인’이라는 국가 단위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류 또는 세계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무는 삶의 표시가 되지 못한다. 한마디로 국가의 구성원이면 족한 상태의 삶이다. 더 나아가 이런 국가 중심의 삶을 기획하는 자들에 맞춰 적극적으로 ‘국익’을 타산함으로써 ‘애국주의’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일 수 있다. 국가와 국민으로 경계를 이루는 삶의 방식에서는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인 윤리와 책임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덕성보다는 국민의 윤리에 충실한 나는 거기에 걸게 행동한다. 거리낌이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경계는 차이를 창조하기 위해 그려진다. ... 서로 다른 행동 유형을 채택해야 할 필요가 있는 차이들을 창조하기 때문에 개연성 있는 일들도 조작된다. ... 어떤 형태도 없었던 덩어리가 ‘구조화’되면서, 어떤 구조가 주어진다. ... 결국 경계들은 확신을 제공한다. 그러한 경계들은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고 어디로 언제 움직여야 하는지를 알게 하고, 우리 스스로가 자기-확신을 지닌 채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셈”(조은평 강지은 옮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고독을 읽어버린 시간: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동녘, 2012, pp. 252-253(참조))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기-확신을 가진 한국인인 나는 국익을 위해서 행동해야 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행동해야 하는 구조에 살고 있으며 이것은 시리아나 미얀마 사람들의 행동 유형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린 모두 경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서 설정한 ‘나’는 국익에 충실한 신민으로서의 나이다. 인간종으로서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경계 밖의 국민인 시리아인이나 미얀마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에 살아가고 있으며 고통을 받고 있는 시리이와 그 주변 지역과 미얀마에 살고 있는 ‘사람’에 불과하다. 경계를 지움으로써 생기는 차이보다는 시간적인 동질성을 확인하면서, 시대 정신과 통일시키는 노력이 셰계시민의 책무 즉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평화를 위해 연대할 책무와 권리를 인식하게 된다.

이제 시리아와 미얀마 사람들의 민주와 인권 그리고 평화의 문제는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경계를 허문 나는 ‘한국인’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 관심이다. 때에 따라 가능한 ‘시리아’와 ‘미얀마’의 상황에 관심을 가져야 겠다. 둘째 친구가 되기다. 최근 시리아 출신인 와합을 친구로 둔 김혜진 선생님은 ‘와합과 친구가 되니 무슬림이나 외국이라서 겪는 많은 편견과 차별”(김혜진 지음, “내 친구 압둘와합을 소개합니다”, 원더박스, 2021, p. 301)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셋째 연대하기이다. 연대를 하기는 다양하다. 편지를 써도, 성명을 내도, 캠페인 활동을 해도, 글을 써도, 정부나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모임이나 글쓰기를 해도, 심지어는 시리아와 미얀마의 평화와 민주를 기원하는 꿈만 꿔도 연대하기가 된다.

한국인으로 경계를 짓고 정체성을 갖는 일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 한국인 또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구성원은 보편적인 민주와 평화 그리고 인권으로 나아가는 선상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또한 세계시민으로 민주와 평화 그리고 인권으로 나아가려는 모든 시민들과 연대하며 살아간다. 그게 경계에 살면서 경계를 뛰어 넘는 삶의 태도이자 실천이 아닐까.

한국 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 알려고도, 알지도,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는 ’한국인‘들은 한국인 안에서도 경계를 짓고 망각이거나 가해자의 정의를 확신으로 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를 극복하는 방식이 시리아와 미얀마의 민주와 평화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인권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한국의 과거청산 문제는 오늘의 문제이고, 시리아와 미얀마의 민주와 평화, 인권의 문제이다.

-----------------------------------

이창수(법인권사회연구소 대표)

bLE_o9el_400x400.jpg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