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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내가 쏜 화살

“활시위를 당겨 내가 쏜 화살이고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잘못 쏜 거다.”

김영문( icomn@icomn.net) 2021.08.19 16:28

  2020 제32회 도쿄올림픽이 얼마 전에 막을 내렸다. ‘코로나19’ 사태로 1년이 연기된 상황에서, 올림픽 개최 이래 처음으로 무관중 경기로 진행되었다. 우리나라는 금메달 6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0개를 획득하여 세계 16위의 성적을 거뒀다. 이전 올림픽에 비해서는 조금 모자란 결과이지만, 메달 획득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한 선수들의 모습과 의식은 오히려 이전 여러 대회에 비해 훨씬 성숙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만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딴 6개의 금메달 중에서 4개를 차지한 양궁 선수들의 경기력은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강이었다. 우리나라 양궁이 세계 최강의 실력을 발휘하자 일부 호사가들은 우리 선조들 중에 본래 명궁이 많아서 후손들이 그 유전자를 이어받았으며, 이는 다른 나라가 넘볼 수 없는 민족적 특성이라고 자화자찬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들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 안시성주 양만춘, 고려 건국공신 신숭겸, 조선 태조 이성계 등 우리 역사에 기록된 명궁들을 거론하면서, 이처럼 신의 경지에 이른 명궁의 후예인 우리 양궁 선수를 세계 어느 나라 선수들이 뛰어넘을 수 있겠느냐고 강조하곤 했다.

  하지만 각국의 역사나 전설을 살펴보면 명궁에 관한 이야기가 굳이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사례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토리만 거론해보더라도 스위스에는 빌헬름 텔이 있고, 영국에는 로빈 후드가 있다. 빌헬름 텔이 악독한 총독 게슬러에게 저항하면서, 자신의 아들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화살로 명중시킨 장면이나 영국 셔우드 숲을 배경으로 활동한 의적 로빈 후드의 백발백중 활솜씨는 세계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다.

  중국에도 태양을 쏘아서 떨어뜨린 신궁(神弓) 예(羿)에 관한 신화가 있으며, 춘추시대 초나라 명궁 양유기(養由基)에 관한 전설도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양유기는 백보(百步) 밖에 떨어진 작은 버들잎에 번호를 매기고 자신의 화살에도 번호를 매긴 뒤 차례대로 버들잎을 명중시켜 ‘백보천양(百步穿楊)’이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이 되었다. 주(周)나라 도량형으로 1척(尺)은 약 20cm이고, 8척이 1보(步)이므로 1보는 약 160cm가 된다. 따라서 ‘백보천양’은 약 160m 밖에서 활을 쏘아 대략 폭 1cm, 길이 5cm 정도의 버들잎을 명중시킨 것이다.

  세계 여러 곳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인 뗀화살촉이 발견되는 것을 감안해보면 인류는 이미 1만 년 전부터 활쏘기를 해왔음에 틀림없다. 칼과 창이 사냥이나 전쟁의 기본 무기이던 시대에 아주 멀리까지 화살을 날려보내 사냥감과 적을 살상할 수 있는 궁시(弓矢)는 현대의 미사일에 버금가는 신무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에 정확한 활솜씨를 연마하는 것은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과 부족을 지키는 데 필요불가결한 호신술로 인정받았다. 또 활쏘기는 기예의 특성상 자신의 심신을 철저하게 닦는 일에서 시작해야 하므로, 예로부터 활쏘기에 관한 이론과 철학은 호신술의 수준을 뛰어넘는 도(道)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공자는 『논어』「팔일(八佾)」 편에서 “군자는 경쟁할 것이 없지만 꼭 경쟁할 것을 찾아야 한다면 활쏘기로 경쟁을 한다. 서로 읍하고 양보하면서 사대(射臺)로 올라가고, 내려와서는 예의에 맞게 술을 마시니 이런 경쟁은 군자답다고 할 만하다.”라고 했다. 맹자는 『맹자』「공손추」 상편에서 “인(仁)이란 활쏘기와 같다. 활쏘기는 자신을 바르게 한 후에 발사하고, 발사한 후 맞추지 못하면 자신을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돌이켜 자신에게서 맞추지 못한 원인을 찾을 뿐이다.”라고 했다.”라고 했다. 심지어 사서오경(四書五經)의 하나인 『예기』에서는 이와 같은 활쏘기 이론과 예절을 집대성하여 「사의(射義)」 편에 모두 수록했다. 위의 공자와 맹자의 어록도 『예기』「사의」 편에 다시 수록되어 수신(修身)을 강조하는 유가 사상을 뒷받침하고 있다. “돌이켜 자신에게서 원인을 구한다.(反求諸己)” 또는 “자신에게서 올바름을 구한다.(求正諸己)” 라는 고사성어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활쏘기는 자신의 심신 수양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 한 번 쏘면 되돌릴 수 없으며, 살상력 또한 매우 강하므로, 이에 관한 고대인들의 인식이 심화하면서 활쏘기 철학도 고도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흥미롭게도 조선 후기의 중흥 군주 정조(正祖)도 명궁의 경지에 이른 활쏘기 매니아였다. 『정조실록』이나 『홍재전서(弘齋全書)』 등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정조11년(1787년)에서 정조22년(1798년)까지 모두 262회 활쏘기를 했다. 특히 정조16년(1792년)에는 1회에 50발을 쏘아 49발을 과녁에 적중시키는 몰기(沒技)를 14회나 기록했다. 정조는 자신이 활쏘기를 하여 과녁에 적중시키면 수행한 신하들에게 하사품을 내리고, 활쏘기를 한 날짜, 장소, 화살 종류, 적중 숫자 등을 자세히 기록한 「고풍(古風)」 문서를 남겨 지금도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또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 175권 「일득록(日得錄) 15」 편에는 다음 기록이 있다.

  “‘활쏘기는 본래 군자의 경쟁이다. 군자는 남보다 더 많이 맞추려 하지 않고, 사물을 모두 얻는 것도 반드시 추구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마침내 마지막 화살을 발사하면서 화살이 정곡에서 조금 벗어나게 하셨다. 다음날에도 10순(巡)의 화살을 쏘고 49발을 맞췄는데, 50번째 화살에 이르러서는 또 이전처럼 빗나가게 하셨다.”

  당시에 정조는 120보 밖에 과녁을 설치하고 1회 쏠 때마다 1순에 5발씩 10순의 화살을 쏘았으며, 앞의 화살이 모두 적중하면 50번째 화살은 빗나가게 쏘아 마음의 자만을 경계했다고 한다.

  도쿄올림픽 양궁에서 유일하게 금메달 획득에 실패한 남자 개인전 김우진 선수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당시에 기자가 “충격적인 결과다.”라고 언급을 하자 김우진은 “충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준비해온 것들을 전부 펼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기분은 좋다.”라고 대답했다. 또 “마지막 세트 8점은 어떻게 된 건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내가 쏜 거다. 8점을 누군가가 쏜 게 아니다. 활시위를 당겨 내가 쏜 화살이고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잘못 쏜 거다.”라고 담담하게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김우진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그가 공자, 맹자, 정조 등 옛 선현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정립한 활쏘기 철학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들의 글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읽지 않았더라도 부단한 연습과 실전을 통해 “돌이켜 자신에게서 원인을 구한다.(反求諸己)”는 그 핵심에 도달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이른바 “내로남불” 또는 “아시타비(我是他非)”를 밥 먹듯 반복하는 자들이 만연한 세상에서 올림픽 양궁 경기와 김우진의 인터뷰는 내게 오래된 고전을 읽는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제 올림픽은 끝났지만 그의 담담한 목소리는 여전히 내 귓전을 맴돌고 있다.

  “활시위를 당겨 내가 쏜 화살이고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잘못 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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