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가치 11장. 기억의 자리 '쉼표 하나'
더니든과 오타고반도, 라나크성… ‘보는 법’을 바꾸게 한 시간들
<더니든으로 가는 길. 남섬 1번 고속도로는 남태평양을 보며 가는 길이다.>
오늘의 가치조각
1. 낮설음은 불편함을 동반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곳에서 성장한다.
2. '본다'의 참 의미는 '어디' 가 아닌 '어떻게' 에 달려있다.
<더니든 오타고반도에서 본 풍경>
오마라마 지역 던스탄다운스의 들판을 출발해 동부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
나는 뉴질랜드의 또 다른 얼굴과 마주했다.
높은 산맥과 빙하호수를 따라 움직였던 지난 여정과 달리, 오늘의 풍경은 낮고 평평했다.
갑자기 변해버린 경치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끝 없이 펼쳐진 초지와 그 위를 유유히 걷는 가축들.
고요한 땅은 사람보다는 소와 양들에게 더 어울리는 장소인 것만 같다.
<라나크성 정원>
더니든으로 향하는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다가올 장면들을 향한 예고편 같았다.
고속도로를 따라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고, 남태평양의 수평선을 스쳐보며 가는 길은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다.
모든 차들이 100km라는 속도에 맞춰 질서정연하게 이동하는 모습은 아름다운 경치 속에 더 어울리는 평화로움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도착한 더니든은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당초 오타고반도의 터널비치를 찾아왔지만, 공사 중이라는 안내판 앞에서 실망하고 말았다.
대신 향한 세인트클레어 비치는 그런 아쉬움을 모두 잊게 해줬다.
세인트클레어는 단순한 해변이 아니었다.
바다와 하늘, 그리고 사람 사이에 완벽한 조화가 흐르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마음을 씻어내듯 스쳐갔고, 우렁찬 파도 소리는 내가 특별한 해변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세인트클레어 비치에 머물면서 '더니든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찾은 오타고반도는 그 감동의 절정을 만들어냈다.
반도는 육지와 바다가 맞닿은 공간.
육지의 끝, 바다의 시작, 그 사이에 선 기분이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절벽과 동산은 시간이 만든 조각품 같았다.
나는 말없이 그 경계에 서서, 자연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맘껏 누리고 있는 것 같다.
오타고반도는 현지인은 물론 관광객 모두에게 사랑받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뉴질랜드 남섬에서 가장 독특한 지형 중 하나일뿐 아니라 이곳은 희귀종 황안 펭귄과 물범들이 서식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타고반도의 다른 이름은 생태계의 보물창고인 것이다.
오타고반도에 온 이유는 두개의 무엇에 끌려서였다
첫째는 라나크성, 그리고 둘째는 펭귄.
먼저 라나크성에 들어섰을때는 차원이 다른 정원의 아름다움에 놀랐다.
비싼 입장료탓에 가장 저렴한 외부정원만 보는 옵션을 선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원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다.
라나크성 정원에 들어섰을 때 또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이국적인 식물들과 손질이 잘 된 꽃길, 그리고 정원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고성.
라나크성이 뉴질랜드 국가 보물 정원으로 등록된 5대 정원이라는 위상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이 곳에서는 정원사들의 바쁜 손놀림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다.
자연을 돌보는 그들의 노력은 자연을 더욱 아름답게 보듬은 손길이었다.
'자연과 사람이 이렇게 어울릴 수 있구나!'
관리된 질서와 자연의 자유가 이곳에선 함께 숨 쉬고 있었다.
'파라다이스'라고 하는 것은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과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자연의 중재자로서 균형을 맞춰줘야 하는 사명을 가진 것은 아닐지 생각해봤다.
라나크성을 떠나 다음 장소인 펭귄 플레이스로 향했다.
펭귄 플레이스는 1인 입장료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너무 비쌌다.
'펭귄은 크라이스트처치(이하 치치)에 가서 볼꺼야. 여기서 조급해 할 필요 없어.'
이런 생각과 함께 과감히 발길을 돌렸다.
<더니든 오타곤>
이른 저녁을 먹고 바로 더니든 옥타곤으로 향했다.
내일 아침 바로 치치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일정은 바쁘게 소화해야 만 했다.
숙소에서 옥타곤 광장까지 1시간여 걸었다.
더니든은 스코틀랜드인이 이주해 만든 도시라고 한다.
옥타곤까지 오는 동안 스코틀랜드풍 건물을 관찰하며 걸었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본 유럽식 건물과는 뭔가 달랐다.
아름답거나 고풍스럽다는 느낌이 아닌 왠지 단순하고 소박한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차올랐다.
줄지어 늘어선 건물들이 비슷비슷해 거부감도 들기도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전주에서 똑같은 모습의 건물이 줄지어 늘어선 빌라촌이 자꾸 연상돼 마음속에 거북함이 차올랐다.
더니든 도심 옥타곤 광장에 서서 세인트폴 교회를 올려다봤다.
역시 이 장소는 또 다른 느낌이다.
교회를 중심으로 옆에 늘어선 시청사와 미술관은 이국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나는 낯선 모습의 도시에서 익숙한 평화를 느끼는 사람이 아닐까?'
옥타곤 한 가운데에는 로버트 번 동상과 함께 바닥에 여러사람의 이름이 동판에 쓰여 있다.
나는 로버트 번이라고 쓰여진 동상 앞에 서서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
갑자기 외국인 노부부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로버트 번이 누군지도 모르고, 왜 그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는 더욱 몰랐다.
그럼에도 나에게 호의를 가져준 노부부의 뜻을 거절할 수 없어 고맙게 받아들였다.
이후 로버트 번에 대해 알아보니 스코틀랜드 시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버트 번은 뉴질랜드에 온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내용을 알게 된 순간 스코틀랜드인들의 자부심은 지역이 아닌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됐다.
어쩌면 더니든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해 물리적인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더 중요시하는 것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니든의 집들은 산비탈에 촘촘히 세워져 있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하루를 정리했다.
깊은 산맥을 떠나 드넓은 초원을 시작해, 웅장한 해안과 정원, 그리고 자부심이 넘치는 도심까지.
하루의 여정이 마치 인생의 축소판 같다.
여행은 멀리 가는 일이 아니라, 깊이 보는 일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더니든이라는 도시에서,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수많은 풍경을 깊이 바라봤다.
어느 하나 버릴 수 없는 장면들이었다.
자연은 위대한 배경이고, 사람은 그 안에 선 하나의 쉼표다.
그리고 나는 오늘, 그 쉼표 하나를 제대로 찍은 것 같았다.
<스코틀랜드풍 건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