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설산 최재은 선생이 지난 10월 20일 민주노총 전북본부의 역사기행에 동행한 후 적은 글입니다.
전라좌도(全羅左道)와 우도(右道)의 경계 비파재(瑟峙)를 넘으며
집결지는 전주 공설운동장 앞이었다. 오전 08시에 집결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공설운동장 앞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우리가 찾는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 여러 곳으로 전화를 걸어보고서야 우리는 오늘 역사기행에 동참할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역사기행에 참여한 식구는 처음 예상과는 달리 단출한 식구였다.
출발시간이 지연된 관계로 서둘러서 국도17호선을 타고 남원으로 향해 달려갔다.
죽림을 지나 완주군 상관면 북치를 지났다. 이곳은 예전 전북도당이 회문산으로 향하여 들어가던 중간 길목이다. 이곳의 몇몇 촌로들은 6,25동란때 양측의 충돌이 죽림온천지역의 앞에서 있었다고 증언한다.
지금은 군인들의 무기 폐기장으로 쓰이는 군사 시설로서 접근금지구역으로 되어 있는데 그 골짜기를 타고 넘으면 갈미봉, 경각산 그리고 회문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을 접하게 된다. 조금 지나면 슬치가 나타나는데 비파슬(瑟)자의 비파재이다. 이곳에는 유명한 옥녀탄금(玉女彈琴-옥녀가 비파를 연주하는)의 큰 명당이 존재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근동에는 가치(歌峙)가 있는데 순우리말로는 노래고개이다. 곧 옥녀창가(玉女唱歌-옥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명당이 자리잡고 있는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이러한 풍류 있고 운치 있는 지형이 지나는 곳이 호남정맥인데 이곳이 바로 전라좌도와 우도를 가르는 경계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 대부분의 지형이 군사시설 안에 들어가 있다. 관촌과 남관으로 불리는 슬치의 남과 북은 예전부터 전쟁터로서 유명한 지형이다. 현재는 전라북도의 제6탄약창이 이곳에 있다. 그리고 코메디 학과가 있어서 유명한 예원대학이 근래에 자리잡은 지역이기도 하다.
김개남 장군의 주둔지 남원산성을 가다.
발길을 서둘러서 차를 타고 국도 17호선을 한시간 남짓 지나자 남원에 도착하였다. 남원의 뒷길을 따라서 넘다보면 남원KBS방송국 앞 도로 건너편에는 이복남 장군을 위시한 오충신(五忠臣)을 모신 오충사(五忠祠)가 있다.
이복남 장군은 정유재란 때에 위태한 남원성을 보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가 바로 이때이므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모든 병사들은 칼을 들고 일어서라 모든 장수들은 적을 향하여 돌격하라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을 놀할손가"하고 가정(家丁) 두사람을 불러 공의 머리털과 항상 입고 있던 천익(天翼)을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남원성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하므로 부모님에게는 비록 불효가 막심하나 충과 효를 다 함께 할 수는 없는 고로 이것을 고향에 갔다 드리고 남원성이 함락되는 날을 나의 죽은 날로 기억하라"고 당부하고 남원성과 함께 산화하신 충신이다. 옆으로 커다란 만인의총을 지나서 남원산성으로 들어갔다.
남원은 북으로 평양과 더불어서 군사적 요충지로서 커다란 역할을 기여 하여왔다. 특히 남원산성은 사방이 평지인데 중앙에 우뚝 솟아서 밀덕봉(密德峰)과 복덕봉(福德峰) 사이의 골짜기와 능선의 자연조건을 그대로 살려서 쌓은 산성으로 해발518미터의 교룡산(蛟龍山)의 웅장한 자태를 한껏 더욱더 뽐내게 하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골짜기 사이로 있는 성문은 수 백년의 세월을 안은 채 의연히 쓰러지지 않고 있는 이곳이 바로 동학군의 지도자인 김개남 장군이 주둔하였던 전적지이기도 하다.
이 산성에는 크고 작은 우물이 99개나 있었다고 전할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 나아가 남원을 위시하여 구례 곡성 옥과 순창 운봉 장수 임실등의 지역의 세곡(稅穀)을 한양으로 운반하지 않고 이곳으로 운반하여 식량을 비축하였다. 이성은 전쟁에서 함락된 적이 거의 없는 산성이다. 정유재란 때에도 조선 장수들은 남원산성에 주둔하기를 요청하였고 원나라 장수들은 남원읍성에서 항전하기를 고수하였다. 총지휘관 명나라 양원 장군의 전략은 실패하여 남원의 군관민등 만여명은 남원성과 함께 산화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유적은 만인의총으로 남았다.
역사란 아쉬운 것이다. 그때 전투를 남원산성과 같이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말이다.
성문을 뿌리로 싸안고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에 올라 성터를 지긋이 밟아보고서 위쪽으로 난 돌계단의 비탈길을 올랐다. 천년호국사찰 선국사가 자리잡고 있다. 그 앞의 누각에 올라보니 펼쳐진 백두대간의 끝자락 백두산이 마지막 멈춘 두륜산이라고 불리는 지리산의 웅장한 자태가 아주 평안하게 다가왔다. 이 자리에서 또 하나의 역사가 만들어졌으니 다름 아닌 근세의 민족종교의 지도자이자. 근세의 민족 사상가이신 수운 최제우 선생이 이곳에서 칼 노래를 부르셨던 것이다.
후천 오만년을 열어 젖힐 칼노래인 검결을 이 남원산성(은적암)에서 불렀던 것이다. 이 칼노래를 따라서 남원을 접수하러 온 김개남 장군은 남원읍성을 접수하기 이전에 남원 산성부터 접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김개남 장군은 눈앞 동톀에 펼쳐진 여원치를 넘지를 못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개남(開南)은 남쪽을 열었는데 개동(開東-동쪽을 열다)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수운선생의 긴 여정이 경주에서 남원에까지 이어졌고 그 발길을 따라서 동쪽으로 가려던 김개남은 숱한 동요와 전설만 남긴 채 동쪽으로의 진군을 멈추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누가 있어서 사개(四開-사방을 열어 제칠)할 것인가?
- 雪山 최재은
전라좌도(全羅左道)와 우도(右道)의 경계 비파재(瑟峙)를 넘으며
집결지는 전주 공설운동장 앞이었다. 오전 08시에 집결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공설운동장 앞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우리가 찾는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 여러 곳으로 전화를 걸어보고서야 우리는 오늘 역사기행에 동참할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역사기행에 참여한 식구는 처음 예상과는 달리 단출한 식구였다.
출발시간이 지연된 관계로 서둘러서 국도17호선을 타고 남원으로 향해 달려갔다.
죽림을 지나 완주군 상관면 북치를 지났다. 이곳은 예전 전북도당이 회문산으로 향하여 들어가던 중간 길목이다. 이곳의 몇몇 촌로들은 6,25동란때 양측의 충돌이 죽림온천지역의 앞에서 있었다고 증언한다.
지금은 군인들의 무기 폐기장으로 쓰이는 군사 시설로서 접근금지구역으로 되어 있는데 그 골짜기를 타고 넘으면 갈미봉, 경각산 그리고 회문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을 접하게 된다. 조금 지나면 슬치가 나타나는데 비파슬(瑟)자의 비파재이다. 이곳에는 유명한 옥녀탄금(玉女彈琴-옥녀가 비파를 연주하는)의 큰 명당이 존재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근동에는 가치(歌峙)가 있는데 순우리말로는 노래고개이다. 곧 옥녀창가(玉女唱歌-옥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명당이 자리잡고 있는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이러한 풍류 있고 운치 있는 지형이 지나는 곳이 호남정맥인데 이곳이 바로 전라좌도와 우도를 가르는 경계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 대부분의 지형이 군사시설 안에 들어가 있다. 관촌과 남관으로 불리는 슬치의 남과 북은 예전부터 전쟁터로서 유명한 지형이다. 현재는 전라북도의 제6탄약창이 이곳에 있다. 그리고 코메디 학과가 있어서 유명한 예원대학이 근래에 자리잡은 지역이기도 하다.
김개남 장군의 주둔지 남원산성을 가다.
발길을 서둘러서 차를 타고 국도 17호선을 한시간 남짓 지나자 남원에 도착하였다. 남원의 뒷길을 따라서 넘다보면 남원KBS방송국 앞 도로 건너편에는 이복남 장군을 위시한 오충신(五忠臣)을 모신 오충사(五忠祠)가 있다.
이복남 장군은 정유재란 때에 위태한 남원성을 보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가 바로 이때이므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모든 병사들은 칼을 들고 일어서라 모든 장수들은 적을 향하여 돌격하라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을 놀할손가"하고 가정(家丁) 두사람을 불러 공의 머리털과 항상 입고 있던 천익(天翼)을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남원성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하므로 부모님에게는 비록 불효가 막심하나 충과 효를 다 함께 할 수는 없는 고로 이것을 고향에 갔다 드리고 남원성이 함락되는 날을 나의 죽은 날로 기억하라"고 당부하고 남원성과 함께 산화하신 충신이다. 옆으로 커다란 만인의총을 지나서 남원산성으로 들어갔다.
남원은 북으로 평양과 더불어서 군사적 요충지로서 커다란 역할을 기여 하여왔다. 특히 남원산성은 사방이 평지인데 중앙에 우뚝 솟아서 밀덕봉(密德峰)과 복덕봉(福德峰) 사이의 골짜기와 능선의 자연조건을 그대로 살려서 쌓은 산성으로 해발518미터의 교룡산(蛟龍山)의 웅장한 자태를 한껏 더욱더 뽐내게 하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골짜기 사이로 있는 성문은 수 백년의 세월을 안은 채 의연히 쓰러지지 않고 있는 이곳이 바로 동학군의 지도자인 김개남 장군이 주둔하였던 전적지이기도 하다.
이 산성에는 크고 작은 우물이 99개나 있었다고 전할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 나아가 남원을 위시하여 구례 곡성 옥과 순창 운봉 장수 임실등의 지역의 세곡(稅穀)을 한양으로 운반하지 않고 이곳으로 운반하여 식량을 비축하였다. 이성은 전쟁에서 함락된 적이 거의 없는 산성이다. 정유재란 때에도 조선 장수들은 남원산성에 주둔하기를 요청하였고 원나라 장수들은 남원읍성에서 항전하기를 고수하였다. 총지휘관 명나라 양원 장군의 전략은 실패하여 남원의 군관민등 만여명은 남원성과 함께 산화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유적은 만인의총으로 남았다.
역사란 아쉬운 것이다. 그때 전투를 남원산성과 같이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말이다.
성문을 뿌리로 싸안고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에 올라 성터를 지긋이 밟아보고서 위쪽으로 난 돌계단의 비탈길을 올랐다. 천년호국사찰 선국사가 자리잡고 있다. 그 앞의 누각에 올라보니 펼쳐진 백두대간의 끝자락 백두산이 마지막 멈춘 두륜산이라고 불리는 지리산의 웅장한 자태가 아주 평안하게 다가왔다. 이 자리에서 또 하나의 역사가 만들어졌으니 다름 아닌 근세의 민족종교의 지도자이자. 근세의 민족 사상가이신 수운 최제우 선생이 이곳에서 칼 노래를 부르셨던 것이다.
시호시호 이 내 시호 부재래지 시호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 입고 이 칼 저 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비껴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용천검의 빛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 있네 만고명장 어데 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 내 신명 좋을시고 |
후천 오만년을 열어 젖힐 칼노래인 검결을 이 남원산성(은적암)에서 불렀던 것이다. 이 칼노래를 따라서 남원을 접수하러 온 김개남 장군은 남원읍성을 접수하기 이전에 남원 산성부터 접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김개남 장군은 눈앞 동톀에 펼쳐진 여원치를 넘지를 못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개남(開南)은 남쪽을 열었는데 개동(開東-동쪽을 열다)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수운선생의 긴 여정이 경주에서 남원에까지 이어졌고 그 발길을 따라서 동쪽으로 가려던 김개남은 숱한 동요와 전설만 남긴 채 동쪽으로의 진군을 멈추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누가 있어서 사개(四開-사방을 열어 제칠)할 것인가?
- 雪山 최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