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씁쓸함을 뒤로한 채 다시금 국도17호선을 따라서 달려가니 4,19의 도화선이 되었던 고 김주열 열사의 무덤 앞에 다다랐다.
다시금 남쪽을 향해 달려가면 섬진강 물길이 모이는 압록에 다다랐다. 멀리 장수 진안에서 발원하여 임실 순창 남원을 거쳐서 곡성에 다다르는 섬진강 주줄기와 멀리 보성에서 발원하여 주암을 거쳐서 압록에 다다르는 큰 강줄기가 맞닿는 이곳은 수구(水口-물나가는 곳)로서 전라좌도의 중심에 위치하여 있다.
수룡(水龍)도 모이고 산룡(山龍)도 모이고 -곡성의 압록
모든 물이 만나는 이곳은 또한 모든 산이 만난다. 백두대간인 지리산에서 흘러 내려온 산이 남원의 장산과 견두산 그리고 곡성의 천마산 깃대봉 그리고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와서 멈추었고 나아가 호남정맥을 타고 진안 완주 임실 정읍 순창 옥과를 거쳐 광주의 무등산으로 흘러가던 산맥이 휘돌아서 곡성의 통명산과 동락산을 만들었다. 무등산을 거쳐서 흐르던 호남정맥이 장흥 사자산과 제암산을 거쳐서 승주 조계산을 넘어서 휘돌아 올라온 봉두산이 맞닿으니 삼산이 모였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옛부터 이곳에 명당명지가 많다고 하여 내노라 하는 풍수가들이 드나들었다. 그 중 곡성의 통명산의 장군대좌는 100대장상지지로 널리 알려진 호남의 팔대명당 중의 하나로 아려진 곳이다. 이곳도 역시 역사에서 전쟁터로 널리 쓰이던 곳이다. 근자에 6,25전쟁 때에 경찰유격대가 인민군 1개 연대를 몰살시킨 곳으로도 유명하다.
솔재(松峙)의 위와 아래에 있는 괴목과 학구
국도17호선은 전남여수에서 순천 그리고 곡성과 남원 전주를 거쳐서 서울과 신의주까지 이어진 큰길이다.
이 길을 따라서 역사는 숨쉬고 특히 전라좌도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 길을 따라서 지금은 전라선 철도까지 동일선상에 놓여있다. 문화와 전통 그리고 생활은 이 길을 따라서 형성되었다. 좌도와 우도의 갈림길은 우리가 먹는 밥상에서도 나타난다. 태백산맥에 등장한 벌교 꼬막은 전라좌도의 명물이다.
좌도에는 반드시 제사상에 꼬막이 올라간다. 그러나 우도는 절대 제사상에 꼬막이 올라가지 않는다. 그리고 좌도는 꼬막에 한쪽 껍질을 벗기고 양념장을 한다. 그러나 우도는 절대 양념장을 하지 않는다. 나아가 전라우도에는 고막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고흥 벌교의 꼬막이 아니다.
이와 같은 것은 조기(굴비)에도 똑같이 나타난다. 굴비는 우도의 명물이다. 우도는 절대 굴비에 양념을 하여 굽지 않는다. 하지만 좌도는 조기(굴비)를 구울 때에 한쪽 면에 양념장을 바른다. 이렇게 문화차이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산길과 물길의 영향이다. 그러므로 전라도는 좌도와 우도 즉 동도와 서도가 있을 뿐이지 북도와 남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곧 일본인들은 우리의 동서개념을 남북으로 바꾸어 놓는 것으로서 말뚝박기를 시작한 것이다.
전라좌도를 하나로 묶는 길이 바로 국도17호선이다. 국도17호선에서는 현대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여순 사건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여수에서 14연대의 반란으로 시작된 여순 사건은 순식간에 순천 광양 보성으로 번져갔다. 그리고 구례와 곡성으로 향하던 봉기의 불길은 솔재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
솔재는 남으로는 학구가 있고 북으로는 괴목이 있는 학구와 괴목의 중앙에 있는 큰고개로 예로부터 남쪽사람들이 한양으로 올라가는데는 필수적으로 넘어야 하는 지점이었다. 곧 이 지점을 누가 장악하느냐가 전투의 승패의 관건이 된다. 만약 봉기군이 괴목을 장악하면 구례 및 압록 이남은 봉기군이 장악하게 된다. 반대로 진압군이 학구를 장악하면 이제 봉기의 불길은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한다. 곧 학구를 진압군이 장악한 것이다. 더더구나 학구는 승주를 거쳐 주암 화순으로 그리고 광주까지로 이어지는 큰 길목이기도 한 것이다.
- 雪山 최재은
다시금 남쪽을 향해 달려가면 섬진강 물길이 모이는 압록에 다다랐다. 멀리 장수 진안에서 발원하여 임실 순창 남원을 거쳐서 곡성에 다다르는 섬진강 주줄기와 멀리 보성에서 발원하여 주암을 거쳐서 압록에 다다르는 큰 강줄기가 맞닿는 이곳은 수구(水口-물나가는 곳)로서 전라좌도의 중심에 위치하여 있다.
수룡(水龍)도 모이고 산룡(山龍)도 모이고 -곡성의 압록
모든 물이 만나는 이곳은 또한 모든 산이 만난다. 백두대간인 지리산에서 흘러 내려온 산이 남원의 장산과 견두산 그리고 곡성의 천마산 깃대봉 그리고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와서 멈추었고 나아가 호남정맥을 타고 진안 완주 임실 정읍 순창 옥과를 거쳐 광주의 무등산으로 흘러가던 산맥이 휘돌아서 곡성의 통명산과 동락산을 만들었다. 무등산을 거쳐서 흐르던 호남정맥이 장흥 사자산과 제암산을 거쳐서 승주 조계산을 넘어서 휘돌아 올라온 봉두산이 맞닿으니 삼산이 모였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옛부터 이곳에 명당명지가 많다고 하여 내노라 하는 풍수가들이 드나들었다. 그 중 곡성의 통명산의 장군대좌는 100대장상지지로 널리 알려진 호남의 팔대명당 중의 하나로 아려진 곳이다. 이곳도 역시 역사에서 전쟁터로 널리 쓰이던 곳이다. 근자에 6,25전쟁 때에 경찰유격대가 인민군 1개 연대를 몰살시킨 곳으로도 유명하다.
솔재(松峙)의 위와 아래에 있는 괴목과 학구

이 길을 따라서 역사는 숨쉬고 특히 전라좌도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 길을 따라서 지금은 전라선 철도까지 동일선상에 놓여있다. 문화와 전통 그리고 생활은 이 길을 따라서 형성되었다. 좌도와 우도의 갈림길은 우리가 먹는 밥상에서도 나타난다. 태백산맥에 등장한 벌교 꼬막은 전라좌도의 명물이다.
좌도에는 반드시 제사상에 꼬막이 올라간다. 그러나 우도는 절대 제사상에 꼬막이 올라가지 않는다. 그리고 좌도는 꼬막에 한쪽 껍질을 벗기고 양념장을 한다. 그러나 우도는 절대 양념장을 하지 않는다. 나아가 전라우도에는 고막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고흥 벌교의 꼬막이 아니다.
이와 같은 것은 조기(굴비)에도 똑같이 나타난다. 굴비는 우도의 명물이다. 우도는 절대 굴비에 양념을 하여 굽지 않는다. 하지만 좌도는 조기(굴비)를 구울 때에 한쪽 면에 양념장을 바른다. 이렇게 문화차이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산길과 물길의 영향이다. 그러므로 전라도는 좌도와 우도 즉 동도와 서도가 있을 뿐이지 북도와 남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곧 일본인들은 우리의 동서개념을 남북으로 바꾸어 놓는 것으로서 말뚝박기를 시작한 것이다.
전라좌도를 하나로 묶는 길이 바로 국도17호선이다. 국도17호선에서는 현대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여순 사건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여수에서 14연대의 반란으로 시작된 여순 사건은 순식간에 순천 광양 보성으로 번져갔다. 그리고 구례와 곡성으로 향하던 봉기의 불길은 솔재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
솔재는 남으로는 학구가 있고 북으로는 괴목이 있는 학구와 괴목의 중앙에 있는 큰고개로 예로부터 남쪽사람들이 한양으로 올라가는데는 필수적으로 넘어야 하는 지점이었다. 곧 이 지점을 누가 장악하느냐가 전투의 승패의 관건이 된다. 만약 봉기군이 괴목을 장악하면 구례 및 압록 이남은 봉기군이 장악하게 된다. 반대로 진압군이 학구를 장악하면 이제 봉기의 불길은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한다. 곧 학구를 진압군이 장악한 것이다. 더더구나 학구는 승주를 거쳐 주암 화순으로 그리고 광주까지로 이어지는 큰 길목이기도 한 것이다.
- 雪山 최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