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오피니언

계속하여 17호선을 따라서 내려가다가 순천에서 국도2호선으로 바꿔 타고서 삼십여분 달려가면 옛날부터 힘센 장사가 많이 난다는 벌교읍에 다다른다.

보성에는 삼제산(三帝山)이 있다. 제석산 존제산 제암산 이렇듯 제왕제(帝)자가 들어있는 산들이 셋씩이나 있어서 옛날부터 보성에는 힘센 장사가 많이 난다고 한다. 특히 벌교를 중심으로 두 개의 제자가 들어있는 산이 있으므로 벌교는 힘센 장사가 많다고 한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벌교의 꼬막이 유명하다. 아니 꼬막은 광양만과 가막만 그리고 순천만에 이어지는 넓은 지형에서 나는 특산물이다. 또한 벌교에는 홍교(虹橋)라고 불리는 무지개 다리가 있다. 현재는 보수한답시고 현대식 하얀 돌이 원래의 고풍스러운 홍교와 어울리지 않는 자태를 보이는 점이 흠이지만 그래도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홍교 중의 하나로 불리는 곳이다.

시간이 멈춰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낙안읍성

이곳에서 내륙 분지로 난 길을 따라서 십 여분 달리면 낙안읍성이 나온다. 이곳이 또한 바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잘 보전된 읍성으로 그리고 아직까지도 성내에 사람들이 주거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마땅히 우리가 보전해야할 문화 유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곳이 또한 조선삼대명장중의 한사람이신 백마산성의 임경업 장군의 부임지였던 곳이기도 하다. 임경업 장군에게는 추련(秋蓮)이라는 명검이 있는데 추련검(秋蓮劍)에 얽힌 임 장군의 충절시 하나가 전한다.

時呼時來不再來 一生一死都在筵
平生丈夫報國心 三尺秋蓮磨十年
세월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으니
한번 나서 한번 죽는 것이 여기 대자리에 있도다..
장부 한평생 나라에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
석자 추련검을 십년동안 갈았도다.


낙안읍성에 도착하니 남도 음식물 축제 기간이었다. 여수에서 오신 염선생이 나와 있었다. 같이 성내에 들어가서 굴과 장어로 동동주 한 잔씩 하고 굴죽으로 식사를 하고서 성안을 둘러보았다.

객사와 관청건물을 위시하여 박물관이 있었으나 한가지 아쉬운 점은 전통지역에 콘크리트 건물의 박물관은 어쩐지 좀 어색하였다. 그리고 전통가옥을 둘러보고 나서 짚 공예를 하시는 분의 체험학습장을 들러서 성벽을 돌아서 동문을 나섰다. 오늘의 여정이 바빠서 서둘러서 낙안읍성을 벗어났다.

꽃과 차로 유명한 조계산 선암사.

발길을 돌려서 북으로 달려오다 보면 커다란 호수가 나타난다. 이곳이 순천의 젖줄인 상사호이다. 상사호를 따라서 얼마쯤 오르다 보면 선암사로 가는 길 안내판이 나오고 그 길을 따라서 십여분 남짓 가면 선암사가 있다. 이곳의 경치는 봄이 제일 좋다. 남쪽지방에 있는 사찰이고 보니 봄이면 온갖 화사한 꽃들로 뒤덮이는 경치가 별미이다.

이곳이 또한 유명한 것은 다름 아닌 남부군 빨치산들의 주요 은신처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장군대좌 또는 장군출진의 대명당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였는지 예로부터 선방으로 유명한 곳이다. 또한 장흥의 사자산에서 보성의 제암산을 거쳐서 순천의 조계산을 잇고 있는 산줄기이다.

나아가 광양의 백운산으로 이어져서 호남정맥을 이루는 큰 산줄기이다. 그래서 산악활동을 하는 빨치산들의 주요 길목에 존재함으로서 남부군의 주요한 활동무대로 쓰였던 것이다. 백운산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다시금 지척이고 보니 이어진 산길일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촉박하고 돌아갈 길이 멀어서 사찰 문 앞에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바다의 해신으로 숭배되는 민중의 지도자 김총 장군.

발길을 되돌려서 승주 창촌으로 달려왔다. 이 길이 국도 27호선이다. 이전의 국도 17호선을 보좌하는 전라좌도의 두 번째 길로서 전주에서 순창 옥과 주암 창촌 그리고 벌교와 고흥 도양(녹동)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창촌을 왜 이야기 하느냐하면 창촌에는 두 개의 큰 묘소가 있다. 그중 하나가 순천김씨의 시조로 알려진 김총 장군의 묘이다.

김총은 견훤의 후백제에 투신하였던 장군이다 그리고 끝까지 왕건을 반대하여 저항하였던 장군이다. 이때 당시의 순천여수지역의 최대호족은 박영규(순천박씨의 시조)와 김총 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길은 달랐다.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였지만 나아가 고려에 투항하여 왕건의 아들과 박영규의 딸이 결혼하였던 후백제 견훤의 사위이자 고려의 왕건의 사돈이었다. 하지만 김총은 왕건의 반대 세력이었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여수를 중심으로 하는 해안의 해신(海神-바다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분이 바로 김총 장군이라는 사실이다.

그 김총 장군의 무덤이 바로 승주 창촌에 있다. 그리고 그 골짜기 옆으로는 옥천조씨의 선대묘가 있다. 이 묘지로 인하여 순천의 최대집안이 되었다는 옥천조씨는 사실 고려충신으로 알려진 오은(五隱)중의 한 분인 농은(農隱) 조원길 선생의 후예이다. 창촌에 존재하는 묘는 바로 조원길 선생의 두 번째 아드님의 조유(趙瑜) 선생의 묘이다.

이렇듯 지조와 절개의 두 집안이 한 마을에 같이 선산이 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이 길을 따르다 보면 용마산(龍馬山)을 옆으로 지나게 되는데 용마산은 고려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태생지이다.

조금 더 달려가다 보면 국도변으로 태조 이방원과 같이 제2차왕자의 난을 평정시킨 마천목 장군의 신도비가 보인다. 곧 남해고속도로 너머에 있는 산자락 밑에 마천목 장군의 묘소가 있다. 마장군의 묘 뒷산이 바로 통명산(通明山)이다.

통명산에는 마장군이 무예를 닦았다는 마장군 굴이 있고 또한 아침나절에 지나왔던 섬진강 압록 강변에는 마장군의 효성에 감동 받은 도깨비들이 쌓아주었다는 독살이 있다.

이렇듯 승주 창암과 곡성의 석곡과 죽곡의 골짜기에는 장군들이 많이 난 지역으로 유명하다. 이렇듯 인물이 많은 것은 물이 모이고 산이 모이는 산룡(山龍)과 수룡(水龍)이 회집(會集)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리라.

산자락을 하나 넘으면 설산(雪山)이 있는 옥과에 당도한다. 옥과를 조금 지나면 무창(武倉)이 나오는데 예로부터 전라좌도의 무기를 생산하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무기 생산의 필요성이 없어지자 지형적으로 쇳소리가 나야 마을이 흥한다하여 징과 깽과리를 만들던 곳이다.

조금 넘으면 백물이 모인다는 백강을 지나면 이제는 전라북도 순창군이다. 순창에는 아미산이 있다. 이곳이 바로 이성계가 나옹 화상을 만나러 왔던 산이라 한다. 나옹은 무학의 스승이다. 나옹이 이 근동에서 활동한 흔적이 몇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순창에 은둔한 농은 조원길 선생의 묘소를 잡아준 것과 장수황씨의 시조로 알려진 황희 정승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 자리를 잡아준 것이다.

순창군 유등면에 있는 조원길의 묘는 기러기가 갈대를 물고 날아드는 형국의 명당을 일커는 노동함로혈(鷺動含蘆穴)로 알려져 있고 남원시 대강면에 있는 황희 정승의 할아버지 묘는 붉은 기러기가 단풍 숲에 들어간다는 홍곡단풍혈(鴻鵠丹楓穴)로 알려져 있으며 순창군 동계면에 있는 황희 정승의 할머니 묘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다는 복호혈(伏虎穴) 또는 사나운 호랑이가 숲을 나선다는 맹호출림혈(猛虎出林穴)로 알려져 있다.

- 雪山 최재은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