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이다. 그동안의 사건들이 머리안에 스쳐지나간다. 태창 메리야스, 프레어페숀, 쌍방울, 세풍합판, 썬전자, 성일통상, 오리온 등등…. 이철순 마리아, 박순희 아녜스, 오두희 안나, 박복실 요안나, 양희숙 요안나의 얼굴도 떠오른다.
험난한 역사의 노동자의 집이다. 이렇게 해서 오늘은 임성희, 유기만, 송정미, 황희숙, 여은정으로 내려왔다. 이들 모두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 전주교구노동사목 <노동자의 집의 20주년>을 깊은 애정으로 축하한다.
천주교 전주교구 노동사목
'노동자의 집' 20주년 기념 한마당
2003년 3월 10일 오후 7시 30분
전주 중앙성당
전주 노사목 "노동자의 집" 20주년 기념 미사
천주교 전주교구 교구장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 주례
2003년 3월 10일 오후 7시 30분
전주 중앙 성당
노동자의 집 설립은 교회가 노동자에게 접근하는 획기적 사업이었다. 그러나 순탄하지는 않았다. 교회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노동활동가가 숙소도 없이 전전긍긍하던 것부터 시작한다.
노동사목은 익산 창인동 성당입구에 집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공간에서 적극적으로 시작된다. 당시 정치 상황은 노동자의 ‘노’자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엄격한 시기에 노동자들이 만날 수 있는 장소는 그 곳 뿐이었다. 김덕순 같은 처절한 사건들이 머리에 떠 오른다.
노동자들은 마치 간첩들이 접선하듯 은밀하게 만나야 했다. 살벌한 만남이었다. 노동자의 집은 이들에게 열려 있던 곳이었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해고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Black list’가 작성되어 이들은 전국 어디서나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노동부, 경찰, 회사가 ‘Black list’를 가지고 있기에 위장취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올데 갈데 없는 도동자들의 아지트가 바로 노동자의 집이었다. 노동자의 집 활동가들은 당연히 ‘빨갱이’ ‘선동가’로 매도되었다. 이들은 잘 나가는 노동자들이 아니라 올데 갈 데 없는 노동자들만 상대하였다. 서로 믿는 가운데 활동가들은 노동자들의 아버지요, 어머니였다.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고 부모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교회안에서 입지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본당신부는 때가 되면 이동하여 바뀐다. 본당신부마다 활동가에 대한 이해도가 다르다. 이해하지 못하는 신부 앞에서는 숨죽이며 살 수 밖에 없었다.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고 세월아, 가거라 하고 빌 뿐이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냉대와 몰이해에서 오는 어려움을 말하자면 만리장성이다. 솔직하게 따져보자 현장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가? 노동자들의 처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노동사목 활동가들이다. 교회가 노동자를 위한 관심이 있다면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노동자가 때되어 오면 밥도 먹여야 한다. 불시에 오니 급하게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넉넉한 살림이 아니기에 있는대로 내 놓을 수 밖에 없다. 부실하게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때로는 술판도 벌여야 한다. 힘들어도 노동자에 대한 애착으로 견디어 낸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면 한 가족이 된다. 그런 생활이 한 두해가 아니고 10년을 넘기다 보니 병이 나는 것은 정한 이치다.
활동가들은 한동안 정체성의 위기도 겪었다. 노동자의 집의 위상과 활동은 무엇이야 하는가 불분명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 지금은 불철주야 비정규직에 힘을 쏟고 있다. 같은 노동자인 정규직 노동자도 무관심하거나 냉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각각 다른 일을 한다. 다른 장소에서 일을 한다. 다른 시간에 일을 한다. 이런 노동자를 만난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사업장, 저 사업장으로 쫒기듯 활동할 수 밖에 없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노동환경과 다를 바 없는 처지의 노동자들이다. 전노협 시절을 사는 것만 같다. 이들은 노동자에게 마추어 살아야만 하니 본인들도 얼마나 힘든 일일까?
외국인 노동자는 성서에 직적 언급되는 사람들이다. 이억만리 고향을 떠나 외롭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다. 복음 성서를 읽으며 사는 사람이라면 바로 이들을 이해해야 할 것이 아닌가! . 나누고 섬기는 삶, 복음 말씀을 사는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다. 3D업종 기피 현상으로 심각한 인력난을 겪으면서 외국인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우리를 위하여 온 사람들인데 당연히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먹고 살기위하여 온 사람들이라고 몰아세우듯 대해서는 안되다. 이 일도 노동자의 몫이 되었다. 일 자체가 정착되면서 다른 곳에서는 새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과연 밑바닥 사람들과 함께하는 노동사목이다. 투신과 연대라는 말을 이들의 활동을 들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먼 훗날 이들도 병들까 걱정된다. 우리 안에는 병고에 시달리는 활동가들 지금도 투병을 하고 있는 터이다.
다시 한 번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험난한 역사의 노동자의 집이다. 이렇게 해서 오늘은 임성희, 유기만, 송정미, 황희숙, 여은정으로 내려왔다. 이들 모두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 전주교구노동사목 <노동자의 집의 20주년>을 깊은 애정으로 축하한다.

'노동자의 집' 20주년 기념 한마당
2003년 3월 10일 오후 7시 30분
전주 중앙성당

천주교 전주교구 교구장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 주례
2003년 3월 10일 오후 7시 30분
전주 중앙 성당
노동자의 집 설립은 교회가 노동자에게 접근하는 획기적 사업이었다. 그러나 순탄하지는 않았다. 교회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노동활동가가 숙소도 없이 전전긍긍하던 것부터 시작한다.
노동사목은 익산 창인동 성당입구에 집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공간에서 적극적으로 시작된다. 당시 정치 상황은 노동자의 ‘노’자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엄격한 시기에 노동자들이 만날 수 있는 장소는 그 곳 뿐이었다. 김덕순 같은 처절한 사건들이 머리에 떠 오른다.
노동자들은 마치 간첩들이 접선하듯 은밀하게 만나야 했다. 살벌한 만남이었다. 노동자의 집은 이들에게 열려 있던 곳이었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해고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Black list’가 작성되어 이들은 전국 어디서나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노동부, 경찰, 회사가 ‘Black list’를 가지고 있기에 위장취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올데 갈데 없는 도동자들의 아지트가 바로 노동자의 집이었다. 노동자의 집 활동가들은 당연히 ‘빨갱이’ ‘선동가’로 매도되었다. 이들은 잘 나가는 노동자들이 아니라 올데 갈 데 없는 노동자들만 상대하였다. 서로 믿는 가운데 활동가들은 노동자들의 아버지요, 어머니였다.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고 부모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교회안에서 입지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본당신부는 때가 되면 이동하여 바뀐다. 본당신부마다 활동가에 대한 이해도가 다르다. 이해하지 못하는 신부 앞에서는 숨죽이며 살 수 밖에 없었다.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고 세월아, 가거라 하고 빌 뿐이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냉대와 몰이해에서 오는 어려움을 말하자면 만리장성이다. 솔직하게 따져보자 현장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가? 노동자들의 처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노동사목 활동가들이다. 교회가 노동자를 위한 관심이 있다면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노동자가 때되어 오면 밥도 먹여야 한다. 불시에 오니 급하게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넉넉한 살림이 아니기에 있는대로 내 놓을 수 밖에 없다. 부실하게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때로는 술판도 벌여야 한다. 힘들어도 노동자에 대한 애착으로 견디어 낸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면 한 가족이 된다. 그런 생활이 한 두해가 아니고 10년을 넘기다 보니 병이 나는 것은 정한 이치다.
활동가들은 한동안 정체성의 위기도 겪었다. 노동자의 집의 위상과 활동은 무엇이야 하는가 불분명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 지금은 불철주야 비정규직에 힘을 쏟고 있다. 같은 노동자인 정규직 노동자도 무관심하거나 냉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각각 다른 일을 한다. 다른 장소에서 일을 한다. 다른 시간에 일을 한다. 이런 노동자를 만난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사업장, 저 사업장으로 쫒기듯 활동할 수 밖에 없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노동환경과 다를 바 없는 처지의 노동자들이다. 전노협 시절을 사는 것만 같다. 이들은 노동자에게 마추어 살아야만 하니 본인들도 얼마나 힘든 일일까?
외국인 노동자는 성서에 직적 언급되는 사람들이다. 이억만리 고향을 떠나 외롭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다. 복음 성서를 읽으며 사는 사람이라면 바로 이들을 이해해야 할 것이 아닌가! . 나누고 섬기는 삶, 복음 말씀을 사는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다. 3D업종 기피 현상으로 심각한 인력난을 겪으면서 외국인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우리를 위하여 온 사람들인데 당연히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먹고 살기위하여 온 사람들이라고 몰아세우듯 대해서는 안되다. 이 일도 노동자의 몫이 되었다. 일 자체가 정착되면서 다른 곳에서는 새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과연 밑바닥 사람들과 함께하는 노동사목이다. 투신과 연대라는 말을 이들의 활동을 들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먼 훗날 이들도 병들까 걱정된다. 우리 안에는 병고에 시달리는 활동가들 지금도 투병을 하고 있는 터이다.
다시 한 번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