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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필리핀 리포트] 마치며 (1)

편집팀( 1) 2003.01.07 13:47 추천:1

필리핀의 절대빈곤율은 정부발표로 40%, 민간연구소(이본(Ibon), 노동경제연구소) 발표로 88%다. 필리핀의 빈부격차는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빈부격차다. 1%의 부유층이 90%의 국가의 부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필리핀은 땅에서 나는 자연자원을 내다 팔고(원료수출) 완성품을 수입하는 전형적인 식민지 경제형태를 띠고 있다. 농업국가인 필리핀에서 1%의 부유층은 대부분 대지주들이다(전 대통령 코라손 아끼노 집안이 소유한 땅은 한 지방 전체를 차지한다). 이들이 경제도 장악하고 정치도 장악하고 있다. 그나마 돈벌이가 되는 굵직하다 싶은 기업들은 다 해외기업이다. 특히 미국과 일본 기업이 많다.

86년 코라손아끼노 대통령 시절 만든 법에 의해 1년 국가예산 중 40%는 IMF등 부채를 갚는데 자동이체된다. 남은 60% 중 17%가 국방비로 사용된다. 43%의 예산으로 교육 보건 농업 등에 나눠진다. 복지예산은 꿈도 꿀 수 없는 실정이다.

신자유주의 실체를 보여주는 필리핀

90년대 초반 라모스 대통령 시절 통과된 파견근로제에 의해 노동자들은 6개월 단위로 새직장을 찾아나선다. 6개월 이상 채용하려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 간단히 계약해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견근로제는 인력용역업체에서 노동자를 공급하고 수수료를 떼가는 우리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 은행 학교 병원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비스 업체와 제조업체가 다 이 파견근로제를 적용하고 있어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이 심각하다.

오래전부터 민영화가 실시되어 국가기간산업까지 소유주가 민간인이거나 외국인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전기 수도 가스 전화 요금 등 국민기초생활에 필수적인 요금들이 무척 비싸다. 일례로 전화요금이 턱없이 비싸 이곳에선 누구나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문자 메세지로 전화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 더이상 물러날 산(mountain)이 없다는 것이다. 정부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해외투자유치를 장려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라모스 대통령 시절 통과된 '광산개발법'에 의해 해외(혹은 국내) 투자가들은 처음에 착공비 얼마를 정부에 주면 그 땅을 향후 25년간 무료로 개발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라모스 정부는 단숨에 큰 돈을 한꺼번에 벌어들였지만 그 댓가로 산악지역에 살던 주민들은 조상대대로 살아온 땅을 잃고 난민이 되어 떠돌고 있다. 땅에서 나올 금이나 석탄이 필리핀 국민의 몫이 아닌 것은 차치하고.

최근엔 WTO 과 자유무역영향으로 경제의 80%를 차지하는 농업분야 마저 큰 타격을 받고 있어 경제상황이 더 악화되고 있다. 값싼 호주산 야채와 태국, 베트남 쌀이 들어와 농민들의 생산물 가격이 턱없이 내려가고 있다.

필리핀을 보고 있으면 온몸으로 '이것이 바로 세계화의 실체'라고 시위하고 있는 듯하다. 필리핀을 보기 전에 세계화는 내게 피상적인 구호였음을 알게 됐다. 때문에 김대중 정부가 현재 돌풍처럼 몰아붙이고 있는 온갖 종류의 경제 자유화 정책들이 바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젠 너무 선명해서 무서워진다. 그건 바로 필리핀 민중들을 빈곤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든 구조적인 늪이었다. 우리는 지금 필리핀 정부가 과거에 한 몹쓸 정책들을 열심히 따라하고 있다.

엔지오의 탈정치화

76년 마르코스의 마샬 로(Martial law, 우리의 유신헌법 같은 악법)가 한참 맹위를 떨치던 시절 설립돼 필리핀에서 가장 큰 규모와 긴 역사를 가진 인권단체 TFDP(Task Force Detainee of the Philipines)는 90년대 중반 130여명이던 활동가를 40여명으로 줄여야 했다. 해외 펀딩단체에서 이제 필리핀은 어느 정도 민주화가 됐고 더 심각한 아프리카나 코소보를 도와야 한다며 지원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84년 고문피해자를 돕는 단체로 문을 열었던 발라이(balay)는 90년대 초반 민다나오에서 쏟아져나온 국내 전쟁난민을 돕는 걸로 시의적절하게 이슈를 전환, 유네스코 등지에서 많은 펀드를 확보해 현재 확장추세에 있다.

필리핀 엔지오가 해외펀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국민경제가 힘들기 때문에 일반시민들의 후원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반노동자 월급평균이 5000-8000페소 인데 비해 엔지오 활동가 월급이 8000-15000인걸 보면 뭔가 고개가 갸우뚱 해진다.

생활을 확실히 보장하며 회의참석차 해외로 자유로 다닐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직장'인 엔지오가 얼마나 치열하게 정치적으로 싸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해외펀드에 의해서건, 정부지원에 의해서건 돈은 우리를 체제에 길들여지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운동이 '체제에 길들여지는' 순간 우리는 우리를 지탱하던 힘을 잃는다.

- 김영옥 (전북평화와인권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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