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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베트남보고서] 잊혀진 전쟁을 마주하며

오두희( 1) 2003.03.16 17:55 추천:6

시작하기 앞서...

미국은 또 다시 패권과 석유를 위한 추악한 전쟁을 이라크에서 벌이려고 한다. 한국정부는 한미동맹의 일환으로 이라크 전쟁에 파병을 자청하고 나섰다. 한국군 이라크 파병 발언은 반세기도 채 지나지 않은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을 망각한 행위이다.

지난 반세기의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전쟁의 피해자이자, 전쟁의 가해자였다. 이 둘은 상호 모순된 위치에서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같다. 전쟁은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테러이다. 국가안보와 평화유지라는 명목으로 전쟁은 항상 시작됐지만, 전쟁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유린하고 생명을 짓밟으며, 무고한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끔찍한 두려움과 공포감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 어떠한 전쟁도 완전히 정당화 될 수 없다.

지난 2003년 1월 19일부터 24일까지 각계각층 20여명이 한-베 평화공원 준공과 평화역사관 건립추진을 위해 베트남을 다녀왔다.

"과거를 접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베트남정부의 방침처럼 베트남은 도시를 중심으로 경제부흥을 위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전쟁의 상처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도 곳곳에는 '학살피해자의 원혼을 위로하는' 위령비와 팔, 다리가 잘려나간 베트남 사람들의 육체와 증언을 통해 그 아픈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베트남은 한국사람들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는 생각이 베트남 방문기간 내내 떠나질 않았다.

이라크에 대한 전운이 감돌고 있는 이때, 미루고 미루던 베트남 방문기를 연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년전에 치러졌던 미국의 더러운 전쟁이 지금 이라크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친 전쟁광 부시와 군사적 폭력으로 패권을 누리고자 하는 미제국주의를 어쩌지 못하는 개인의 초라한 현실에 속에서 '절망하지 말고 불복종하라'는 양심의 소리를 주문처럼 외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잊혀진 전쟁, 그 아픔역사를 마주하며

얼마 전 미대사관 옆에서 있을 '반미연대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문정현신부와 함께 익산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렸다. 서울역을 나서는데 중년이 넘은 한 남자가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예!, 그런데 누구시더라..." "익산에 살고 있는데 텔레비에서 신부님을 많이 봤지요. 고엽제 피해.... 모임이 있어 서울에 왔지요" 고생 많이 한다며 연신 고개를 숙여 신부님께 인사를 한다.

그리고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장단지를 내놓고 "아무런 감각이 없어요. 이렇게 꼬집어도 아프지도 않아요" 하며 힐긋힐긋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총도 아롱곳없이 자신의 살을 내놓고 심하게 꼬집고 비튼다.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게 분명하다.

"나만 이러는게 아녜요. 모두들 고생이지요. 미국놈들이 나쁜놈들이지요.....신부님 건강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미국놈들하고 싸우지요." 라며 전라도 특유의 큰 목소리로 장황하게 말하더니만 갑자기 "돈없고 빽없는 놈들만 갔지요. 그런데 우리보고 학살자래요..." 하며 힘없이 되내이고는 고개를 떨구고 황급히 가버렸다.

한달 전에 베트남을 방문하여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가슴 저미게 듣고 왔던 나로서는 그 아저씨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돌아서서 가는 그 아저씨의 뒷모습이 너무나 작고 초라해 보여 달려가 부등켜안아 주고싶었다.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은 1964년부터 73년까지 8년여에 걸쳐 약 32만명이 파병되었다. 그 중 전사자 5천여명, 6만명이 넘는 고엽제 피해자들과 1만여명 이상의 부상자를 낳아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인명피해를 가져 왔다. 그리고 그 기간 한국군에 의해 베트남의 민간인 다수가 학살되었다는 의혹이 최근에 강력히 제기되었다.

한국정부는 베트남 파병으로 얻은 경제적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할 뿐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온전히 참전군인들만의 몫이었다. 고엽제 피해자들은 '미국과 결탁한 박정희 군사정권이 국가경제성장을 꾀한다는 이유로 우리 젊은이들을 파병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하였다. 그러나 국내 법원은 고엽제에 포함된 다이옥신과 원고들이 앓고 있는 질병간의 상관관계를 입증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했다.

이처럼 한국국의 베트남 파병이 갖는 의미가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정확한 평가를 받지도 못하고 잊혀진 전쟁이 되어 피해자만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서 살아가고 있다.

※ 오두희 님은 인권운동 및 평화운동가로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소파개정국민행동 등의 평화, 인권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역사

베트남은 19세기 서구 제국주의가 아시아를 유린할 때 프랑스식민지배 치하에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6년 말부터 프랑스와 민족해방 투쟁을 벌려 8년 전쟁을 치른 1954년 독립하였다. 그러나 제네바협정으로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북베트남은 호치민을 중심으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유지되어 경제, 문화 발전의 꽃을 피웠으나, 남베트남은 '베트남의 이승만'이라 칭할 수 있는 친미정권이 수립되어 독재, 폭정, 부패정치를 일삼게 된다. 이에 1960년 남베트남 민중들은 예속정권을 반대하고 통일을 요구하는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였다. 그러자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의 행정 및 군사권을 직접 장악해 남베트남 정부를 제치고 민족해방전선의 탄압에 앞장섰다. 이로써 미국은 친미반공예속 정권 대 남베트남 민중들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간의 내전에 간접적인 개입자 수준이 아니라 직접적인 주도자로서 참여하면서 침략자로서의 위상을 굳혔다.

이에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이를 빌미로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감행하고 대대적인 지상군을 파견하여 침략전쟁을 시작하였다. 결국에는 1968년에 무려 53만에 이르는 지상군을 파견하여 완벽한 전쟁의 주체가 되었다. 전쟁은 베트남의 국경을 넘어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되었으며, 한국,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에서도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베트남에 병력을 파견하기에 이른다. 각종 독가스 화학무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됨으로, 인도차이나전은 처음으로 대량파괴의 문제를 인류에게 제기하였고 그 방법의 잔인성으로 말미암아 '더러운 전쟁'으로 규정되었다. 사상자 300만의 희생을 가져온 베트남 전쟁은 1975년 미국의 패배로 물러나기까지 약 10년간에 걸쳐서 일어났다.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 배경

5.16군사 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의 절대절명의 과제는 미국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1961년 10월 박정희는 케네디와의 '정상회담'을 하게 되었는데, 박정희는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견하겠다는 제안을 먼저하여 미국의 환심을 샀다. 그때에는 아직 미국이 베트남전을 완전히 떠맡기 전이었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을 때, 미국은 '좀 더 많은 깃발'이라는 정책을 내걸었다. 한국전쟁 때처럼 유엔을 동원한 개입이 불가능하자 미국은 그 대신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동맹국들을 가능한 많이 끌여들여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는 전쟁이라는 명분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동참을 요청한 동맹국 25개국 중, 이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나라는 한국과 대만밖에는 없었다. 이렇게 되자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역할은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기위한 '이데올로기 전쟁'이라는 허상을 만들고자 했던 미국에 베트남 민족과 같은 아시아 인종인 한국군의 참전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는 불행했던 우리의 근현대사의 상처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베트남에 파병된 장병들은 중대장급이 1935년을 전후한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고, 일반 병사들은 대개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출생했다. 그들은 아주 어린 나이에 한국전쟁의 살육을 겪었고, 그들이 겪은 모든 불행은 빨갱이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교육받았다. 빨갱이는 인간도 아니고, 동족도 아니고 빨갱이는 죽여도 좋은 아니, 죽여야만 하는 존재였다. 이들 병사들은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한 학살의 피해자였다가, 냉전체제의 확립과정과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좌우익 상호간의 동족 내부의 학살에서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급속히 변모한 불운한 민족의 가난한 아들들이었다.(베트남전진실위원회 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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