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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베트남보고서] 잊혀진 전쟁을 마주하며

오두희( 1) 2003.03.29 14:03 추천:10

기어코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간의 부시정권 행보를 보고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전쟁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듯이 보편주의적인 비전과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한다. 즉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침략을 해방으로 공포를 자유로 전쟁을 평화로 탈바꿈시켜 허가 낸 파괴와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본질은 시장경제를 지배하기 위한 제국주의적 야욕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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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인주에서 있었던 반전 집회에서 연설한, 커닝햄 중학교에 다니는 13세의 소녀 샬롯 앨더브런(Charlotte Aldebron)의 말이다.


사람들은 이라크에 폭탄을 떨어뜨린다고 하면, 군복을 입은 사담 후세인의 얼굴이나, 총을 들고 있는 검은 콧수염을 기른 군인들이나, 알라시드 호텔 바닥에 '범죄자'라는 글씨와 함께 새겨진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걸 아세요? 이라크에 살고 있는 2천400만 명 중에서 절반 이상이 15세 미만의 어린이들이라는 걸........바로 저와 같은 아이들이요. 저는 열 세살이니까, 어떤 아이들은 저보다 나이가 좀 많을 수도 있고, 저보다 훨씬 어릴 수도 있고, .....하지만 그 아이들은 바로 저와 너무와 비슷한 모습의 아이들입니다.

저를 한번 보세요. 찬찬히 오랫동안. 여러분이 이라크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걸 생각했을 때, 여러분 머리 속에는 바로 제 모습이 떠올라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죽이려는 바로 그 아이입니다.



베트남전쟁도 그랬다. 전쟁을 통해 사상자 300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런 전쟁에 노무현정부는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파병을 결정하고 국회동의 절차를 기다리고 있다. 30년 전의 그 아픔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데.. 또 다시 미군의 용병이 되어 전쟁범죄를 저지르려고 한다. 베트남 학살의 구체적 역사 속에서 배워야 할 때이다.


베트남 양민 학살 현장을 찾아


방문단은 의례적인 행사를 마치고 맹호부대가 주둔한 베트남 중부지역의 빈딘성 따이빈사로 향했다.

'사’는 우리나라의 읍·면 단위에 해당하는 곳이다. 넓고 푸른 논, 초가집같이 나무와 풀잎을 엮어 만든 작은 집들, 한가로이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떼, 전통의상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을 빼면 우리의 비포장 시골길 초여름 풍경이다. 너무 정겹고 친근하다.

그곳의 공산당 서기장이 우리를 맞이했다. 웃음 지으며 악수를 하고 있지만 실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단순히 무표정 한 것만이 아니라 이미 세상을 다 살아버린,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살아온 사람같았다.

살아있지만 허깨비만 움직이는 듯한 그런 사람을 난 한국에서도 본적이 있다. 부모와 누나, 온 가족이 학살당한 노근리 미군양민 학살사건 대책위원장의 얼굴이 이런 표정이었다. 그런데 안내자가 그 분도 민간인 학살 과정에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잃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눈물이 되어 나온다. 사람들은 말한다. 세월이 흐르면 잊혀질 거라고, 그러나 그것은 가해자의 변명일 뿐이다. 이처럼 긴 세월이 흘렀어도 아픔이 내면화되어 존재의 의미마저도 상실한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


380명이 학살당한 고자이 언덕의 위령비


▲고자이 위령비 앞에서 참배하고 있는 한국 참가단



고자이 마을의 위령비에 갔다. 제단앞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미 침략 원흉들에 대한 분노를 깊이 새긴다. 1966년 2월26일 미국의 지휘 아래 남조선 꼭두각시 군대들이 380명의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명단이 제단에 빼곡이 새겨져 있었다. 여섯살, 일곱살된 어린이에서 칠십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여자였다.

방문단 모두는 걷잡을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마음속으로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만을 되 뇌이며 우리 모두는 눈물로서 분향하였다.

고자이 위령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서기장의 집으로 갔다. 좁은 방안을 가득 메운 우리에게 잔잔한 어조로 그때 그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자기 나이 열다섯살 때. 그 운명의 날 새벽.
한국군은 마을로 들어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오랜시간 엎드리게 하였다. 사람들을 잡아왔고 뭔가를 설치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너무 무서워서 고개를 들 고 볼 수 없었다. 이후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는데 보니 힐긋보니 사람들의 창자가 튀어나오고 처참하게 죽어있었다. 발 밑에 수류탄같은 것이 떨어졌는데 앞으로 피했다. 그 후 뭔가 수없이 날아와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방안에 자기와 어머니, 누이동생이 누워 있었다. 누이동생과 어머니는 모두 두 다리가 잘려나갔다. 먼저 누이동생이 숨을 거두었고, 동네사람들이 돗자리에 동생을 말아서 데리고 나갔다. 어머니는 옆에서 신음소리를 내다가 소리가 약해지더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머니도 동네사람들이 여동생처럼 말아서 데리고 나갔다. 아주 심하게 통곡하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고 부상을 심하게 당한 상황에서도 아팠던 느낌이 없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죽은 후 어린 나이에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해진다고 말한다. 아버지와 형은 이미 해방전쟁에 참가해서 전사한 뒤었고 자신은 온몸에 파편이 박힌 그는 천애의 고아가 된 것이다. 몸이 회복되고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산으로 들어가 총을 잡았다고 한다.



옆방에는 곱게 단장한 할머니 네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들이었다. 마음의 상처를 안고 미친 세월을 살아내야 했던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들은 다 내가 그때 죽어야 했다고 말한다.

한 할머니의 머리에 큼지막하게 남아 있는 총알자국. 왼쪽 관자놀이에 엄지손가락 한 마디가 들어갈 정도로 구멍이 푹 패어 있었다. 후유증으로 하루도 편한 잠을 잔적이 없다는 그 분.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총탄의 흔적


▲생존자들을 부여안고 울먹이는 한국 참가단


어떤 말로 이들을 위로 할 수 있겠는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기억의 상처를 건드리면서 우리는 왜 고통의 기원을 찾아 나 선 것일까? 우리 모두 직접 가해자는 아니지만 한 맺힌 사람들이 눈을 감지 못하고 살아 있는 한 우리 역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까?

모두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당혹스러운 현실을 마주하며 자책감으로 괴로워하지만, 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헤아릴수 있단 말인가. 죽임을 당한 사람들, 또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생존자들의 아픔은 이렇게 30년이 지났지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따이한들이 건너왔다는 작은 다리를 옆으로 끼고, 우리는 마을을 빠져나왔다. 측백나무 비슷한 나무가 양쪽으로 키보다 높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건너편엔 울창한 나무숲이 있다.

37년 전 새벽 총을 들고 이 길을 걸어갔을 따이한 병사를 생각해 보았다. 서로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혼란과 야만과 광기의 현장에서 자신이 치르고 있는 전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명령속에서 스무살 남짓한 어린 병사들이 얼마나 공포에 질렸을까. 그러한 두려움이 끔찍한 일을 벌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연민이 느껴졌다.

한국군에 의해 약 80여건의 학살 사례가 발굴되었고, 9천 여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이는 한국군 개개인이 특별히 잔인해서 그러한 학살이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클라우제비치가 말했듯이 "전쟁은 단순히 정치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수단이고, 정치적 의도를 따르는 것"으로 조직된 사회집단이 정책의 한 수단으로 행사하는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폭력으로서 전쟁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에 대해 야수가 되고, 인간은 동물로 취급되어 사냥감이 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 오두희 님은 인권운동 및 평화운동가로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소파개정국민행동 등의 평화, 인권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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