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시는 중부지방의 농촌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중부지방의 풍경은 온통 푸른 초록 물결에 부드러운 구릉이 마을을 감싸고, 논둑 길을 따라 소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도랑에는 오리떼가 헤엄치고있는 평화로운 풍경이라면
호치민시는 최고급 상업문화권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대중문화권이 묘한 경계를 이루며 공존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대도시와 다르지 않다. 거리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행렬만 빼면 서울의 어디쯤이란 착각이 들 정도로....
호치민의 아침은 온갖 종류의 오토바이 소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서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어버린 오토바이행렬에서 나오는 온갖 소음과 매연은 상쾌한 아침은 기대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거리 곳곳의 좌판대에서 '포아'(쌀국수)와 '반미(쌀로만든빵)로 식사를 대신한다.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한 후 경쟁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모두 바빠졌다. 복권판매소도 유난히 눈에 많이 띤다. 바쁜 세상을 따라잡기가 너무 힘들어 주류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허망한 희망을 걸어보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인가보다
백밀러가 없는 오토바이 - "과거를 접고 미래로 나아가자"
그런데 특이 한 것은 베트남의 오토바이는 백밀러가 없다. 간혹 한국에서 수입한 중고 오토바이에 달려있기도 하지만 그것도 없앤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란다. 그냥 앞 만보고 제 갈 길을 가다보면 서로가 속도를 감안하여 피해 간단다. 오히려 주변을 살피고, 머뭇거리면 사고가 난다고 한다. '과거를 접고 미래로 나아가자' 는 당 정책이 이런 곳까지 나타나고 있다며 안내자가 묘한 웃음을 짖는다.
호치민시 전쟁박물관을 방문했다. 새롭게 단장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박물관장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전쟁은 이미 끝났지만 베트남은 그 후유증으로 대단히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평화의 전사로서 여러분이 베트남과 한국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며 방문기간동안 정부관료로부터 들었던 '베트남과 친구되기'를 강조한다. 베트남전쟁 이후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쟁의 참상 여실히 보여주는 전쟁박물관
박물관 건물 밖에는 각종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 불도저가 눈에 띤다. 미군들에 의한 베트콩 수색소탕작전은 일차적으로 융단폭격 등으로 작전지역을 공개하고, 지상군이 현장에 투입되어 마을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즉결처분한 뒤 집을 불사르고 불도저 등으로 마을 전체를 밀어버리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무기로서의 불도저는 전쟁이란 이름 아래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폭력의 상징이었다.
안에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기념하여 호치민이 직접 작성하여 1945년 9월 2일 바딘( Ba Dinh)광장 발표한 "베트남의 인민들은 자유와 독립 그리고 진실을 향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전체 베트남 인민은 자유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정신과 물질, 모든 힘을 바쳐 생명과 재산을 지킬 것이다"는 '베트남독립선언문'의 일부 내용이 새겨진 구절을 시작으로 전시물이 전시되어 있다.
베트남전쟁과 관련된 각종 자료들이 정리되어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종군기자들이 찍은 사진을 전시한 방이다. 외신에 의해 보도된 눈에 익은 사진들도 있으나 너무도 참혹하여 보도되지 않은 사진들이 더 많다. 그 어떤 것보다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다.
전시관의 마지막 코너에는 베트남전쟁을 직접 계획하고 집행했던 주역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당시 미국방장관)가 1996년 회고록에서 말한 "우리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고 미래세대에게 우리가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는지 설명할 빚을 지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 글 밑에 "바로 그 잘못 때문에 베트남 인민들과 조국은 너무도 많은 전쟁의 피해를 짊어져야 했다"는 베트남 사람 특유의 비꼬는 듯한 뉘앙스의 댓글을 달아 놓았다.
시간만 다른 같은 역사-고엽제 피해자와 장기수
관람을 끝내고 고엽제 피해자와 장기수할아버지를 만났다.
고엽제의 가장 큰 비극은 그 후유증이 2세에까지 대물림된다는 데 있다. "느린 탄환"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고엽제로 인해 베트남에서만 약 5만명 이상의 기형아가 탄생했다. 우리가 만난 소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몸이 서로 붙었다. 수술을 통해 둘 다 생명을 건졌으나 한쪽 다리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베트남전에서 미국은 삼림의 잎을 제거하여 북베트남군이나 해방군의 근거지를 노출시키고, 그들이 사용할 것이 분명한 곡물을 파괴할 목적으로 제초제로 쓰이는 화학물질인 고엽제를 무자비하게 살포하였다.
1962년부터 71년까지 약 1100만갤런(G/A)의 고엽제가 베트남 전역에 뿌려졌으며, 이로 인해 베트남 전 국토의 10%에 이르는 삼림과 농지가 초토화됐고, 약 200만명 가량의 베트남인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고, 참전군인들도 후유증으로 앓고 있다. 이처럼 전쟁은 당시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으로 그 후대들에게도 비극을 안겨주고 있다.
항불시대와 항미시대에 민족해방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19년 동안 꼰다우 섬 특별감옥에서 살았다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아내도 꼰다우 섬에 16년동안 수감됐었다. 딸이 하나있었지만 사이공에서 해방투쟁을 하다가 희생됐다고 한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한국의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생각났다. 한국과 베트남은 시간만 다를 뿐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한국군의 참전으로 인해 일어났던 잘못에 대해 우리들이 '미안하다'고 사죄를 하자 장기수할아버지는 "미안해 하지만 말고 평화를 위해 일하라"고 작은 소리로 말씀하신다. 온화하면서도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 그 한마디가 우리 모두의 가슴을 쳤다.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 서로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나 베트남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 중이지만 지금 이라크나 다른 나라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그 때문에 감옥에 가기도 하고 학살을 당하기도 한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는 고통받았던 사람들이 서로 연대할 때 진정한 힘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치민시는 최고급 상업문화권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대중문화권이 묘한 경계를 이루며 공존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대도시와 다르지 않다. 거리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행렬만 빼면 서울의 어디쯤이란 착각이 들 정도로....
호치민의 아침은 온갖 종류의 오토바이 소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서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어버린 오토바이행렬에서 나오는 온갖 소음과 매연은 상쾌한 아침은 기대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거리 곳곳의 좌판대에서 '포아'(쌀국수)와 '반미(쌀로만든빵)로 식사를 대신한다.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한 후 경쟁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모두 바빠졌다. 복권판매소도 유난히 눈에 많이 띤다. 바쁜 세상을 따라잡기가 너무 힘들어 주류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허망한 희망을 걸어보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인가보다
백밀러가 없는 오토바이 - "과거를 접고 미래로 나아가자"
그런데 특이 한 것은 베트남의 오토바이는 백밀러가 없다. 간혹 한국에서 수입한 중고 오토바이에 달려있기도 하지만 그것도 없앤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란다. 그냥 앞 만보고 제 갈 길을 가다보면 서로가 속도를 감안하여 피해 간단다. 오히려 주변을 살피고, 머뭇거리면 사고가 난다고 한다. '과거를 접고 미래로 나아가자' 는 당 정책이 이런 곳까지 나타나고 있다며 안내자가 묘한 웃음을 짖는다.
호치민시 전쟁박물관을 방문했다. 새롭게 단장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박물관장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전쟁은 이미 끝났지만 베트남은 그 후유증으로 대단히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평화의 전사로서 여러분이 베트남과 한국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며 방문기간동안 정부관료로부터 들었던 '베트남과 친구되기'를 강조한다. 베트남전쟁 이후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쟁의 참상 여실히 보여주는 전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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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불도저와 전쟁당시 불도저가 집을 부수고 있는 장면 |
안에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기념하여 호치민이 직접 작성하여 1945년 9월 2일 바딘( Ba Dinh)광장 발표한 "베트남의 인민들은 자유와 독립 그리고 진실을 향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전체 베트남 인민은 자유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정신과 물질, 모든 힘을 바쳐 생명과 재산을 지킬 것이다"는 '베트남독립선언문'의 일부 내용이 새겨진 구절을 시작으로 전시물이 전시되어 있다.
베트남전쟁과 관련된 각종 자료들이 정리되어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종군기자들이 찍은 사진을 전시한 방이다. 외신에 의해 보도된 눈에 익은 사진들도 있으나 너무도 참혹하여 보도되지 않은 사진들이 더 많다. 그 어떤 것보다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다.
전시관의 마지막 코너에는 베트남전쟁을 직접 계획하고 집행했던 주역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당시 미국방장관)가 1996년 회고록에서 말한 "우리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고 미래세대에게 우리가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는지 설명할 빚을 지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 글 밑에 "바로 그 잘못 때문에 베트남 인민들과 조국은 너무도 많은 전쟁의 피해를 짊어져야 했다"는 베트남 사람 특유의 비꼬는 듯한 뉘앙스의 댓글을 달아 놓았다.
시간만 다른 같은 역사-고엽제 피해자와 장기수
관람을 끝내고 고엽제 피해자와 장기수할아버지를 만났다.
고엽제의 가장 큰 비극은 그 후유증이 2세에까지 대물림된다는 데 있다. "느린 탄환"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고엽제로 인해 베트남에서만 약 5만명 이상의 기형아가 탄생했다. 우리가 만난 소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몸이 서로 붙었다. 수술을 통해 둘 다 생명을 건졌으나 한쪽 다리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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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엽제피해자와 장기수할아버지 |
베트남전에서 미국은 삼림의 잎을 제거하여 북베트남군이나 해방군의 근거지를 노출시키고, 그들이 사용할 것이 분명한 곡물을 파괴할 목적으로 제초제로 쓰이는 화학물질인 고엽제를 무자비하게 살포하였다.
1962년부터 71년까지 약 1100만갤런(G/A)의 고엽제가 베트남 전역에 뿌려졌으며, 이로 인해 베트남 전 국토의 10%에 이르는 삼림과 농지가 초토화됐고, 약 200만명 가량의 베트남인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고, 참전군인들도 후유증으로 앓고 있다. 이처럼 전쟁은 당시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으로 그 후대들에게도 비극을 안겨주고 있다.
항불시대와 항미시대에 민족해방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19년 동안 꼰다우 섬 특별감옥에서 살았다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아내도 꼰다우 섬에 16년동안 수감됐었다. 딸이 하나있었지만 사이공에서 해방투쟁을 하다가 희생됐다고 한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한국의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생각났다. 한국과 베트남은 시간만 다를 뿐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한국군의 참전으로 인해 일어났던 잘못에 대해 우리들이 '미안하다'고 사죄를 하자 장기수할아버지는 "미안해 하지만 말고 평화를 위해 일하라"고 작은 소리로 말씀하신다. 온화하면서도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 그 한마디가 우리 모두의 가슴을 쳤다.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 서로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나 베트남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 중이지만 지금 이라크나 다른 나라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그 때문에 감옥에 가기도 하고 학살을 당하기도 한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는 고통받았던 사람들이 서로 연대할 때 진정한 힘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