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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새만금 지역 어민, 지금은 어떻게 사나?

김경완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문화팀 실행위원( 1) 2013.12.27 13:20

환경변화는 자아의 상실

 

새만금간척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약 20여 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가장 치열한 환경 보전과 개발담론에 관한 논란을 이끌어 왔다. 하지만 2006년 4월 21일 새만금 방조제 최종 물막이가 완료된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그 관심은 급격히 줄어들고, 누구도 새만금의 아픈 사연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이때부터 새만금 내부에 급격한 환경변화가 나타났고 지역주민들의 삶도 급격하게 변했음에도 말이다. 어촌사회에 기반을 둔 지역주민들은 갑작스럽게 바뀐 바다의 생태환경에 혼란스러워하며 자신들의 불확실한 생존에 대한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새만금은 이제 국민적인 관광지가 되어 방조제 위를 관광버스와 승용차로 달리는 것이 필수코스가 되었다. 비극이다. 수년간에 걸쳐 참여관찰을 수행해온 인류학자들은 ‘현지 주민들이 지역의 자원을 이용하고 변화시켜온 방법에 대하여 매우 상세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현지 주민들에게 있어 자연환경은 단순한 물리적인 객체가 아니며, 바위 하나, 웅덩이 하나, 나무 한 그루까지도 모두 과거의 기억이 담겨 있는 ‘특별한 장소’임을 지적한다.

 

▲새만금 해상 시위 2006년 3월 <참소리 자료 사진>

 

이들은 장시간에 걸쳐 현지 문화 속에서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을 거쳐 성장한 탓에 환경과 그에 대한 지식 및 이용 기술은 이미 자아(self)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환경의 변화는 곧 자아의 일부를 상실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새만금 사업, 어민들에게 급격한 변화를 요구

 

만경강과 동진강의 담수가 흘러들어 바다를 만날 때 엄청난 면적의 모래갯벌을 만나 뒤섞이기 시작한다. 이렇듯 강과 바다가 만나는 기수역인 해양환경에 적응해 생계를 유지해 온 새만금 지역주민들은 해수가 오염되고 급격히 담수화된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자 했지만 얼마가지 않아 적응은 커녕 모래밭에 올라 앉아 속살을 드러내고 죽어버린 조개들과 비슷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바다에 의존해 살아가는 지역주민들이 자본투자나 기술 전수 없이 바다가 없는 전혀 다른 터전에서 생소한 생계방식으로 전환해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래 표는 김제의 심포항 수협 위판장에서 한해 거래되는 어패류에 관한 자료이다. 위판고는 실제 위판거래금액의 5%만 수수료로 받은 금액이므로 실제 위판 된 양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새만금 간척 직전에 연간 500억(1990), 390억(1991)의 순수 어민수입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어민들의 실제 수입은 수협자료에 기록되지 않을 만큼 더 많았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1톤 미만의 작은 선외기를 가지고 계절별로 그물을 이용해 어류를 잡고, 어장이 어려울 때는 맨손어업으로 조개를 채취하던 한 어민의 기록을 보자.

 

 

김종수 씨는 2006년 9월 ‘이때처럼 많은 꽃게를 본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름에 산란한 꽃게들이 방조제에 막혀 나가지 못해 마치 양식장처럼 이 일대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렇듯 풍요로웠던 새만금의 한 지역이 2006년 물막이 이후 급격하게 변하게 되었다. 김안재 씨의 사례는 극단적으로 그 예를 보여준다.

 

 

새만금 사업은 재앙, 갯벌이 다시 돌아와야

 

새만금간척사업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래 없는 대규모 간척사업이다. 이로 인해 갯벌과 바다에 의지해 살아온 2만여 지역주민들의 삶은 송두리째 뽑히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젊은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섰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그 땅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갯벌만 건강하게 유지된다면 정년 걱정 없이 얼마든지 건강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새만금사업은 재앙이다.

 

만경강과 동진강, 그리고 드넓은 갯벌은 해양의 많은 생명체들이 깃들고 산란하며 서식하던 장소다. 갯벌과 연안은 어민들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이용하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에게 성스러운 장소이다. 모두가 갯벌로부터 생태적 서비스라는 편익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장소가 유지될 때만이 더 넓은 황해를 풍요롭게 지키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새만금 갯벌은 여전히 우리에게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다.

 

그곳을 메워 새로운 땅을 조성하고 그곳에 농경지나 첨단산업단지를 만드는 것이 새로운 부가가치라고 여기지만 바보 같은 짓이다.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10년의 조사가 마무리되었다. 10년 동안 군산, 김제, 부안지역에서 만난 현지주민들의 삶을 참여관찰하면서 새로운 미래, 지속가능한 사회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제 그 길을 위해 매진해야 한다. 그분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개선되길 바라면서, 그 길은 오로지 해수유통 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신한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문화 조사가 이뤄져야”

 

새만금사업이란 거대한 폭력 앞에 속절없이 내몰린 지역주민들을 만난 지 어언 10년. 어떤 이들에게는 짧은 시간일지 모르지만 내겐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날들이다. 제2차 조사때 태어난 딸 호영이가 벌써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씩 이야기한다.

 

“아빠, 또 새만금에 가?”

 

새만금 조사단에 와서 처음으로 ‘심포’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그곳이 만경강과 동진강이 만나는 지점이고, 땅 끝에 위치한 포구란 이야기를 듣고 꼭 가보고 싶었다. 그곳을 알고 지역주민들과 어울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결국 학위논문까지 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새만금 조사단과의 인연 때문이다. 새만금조사단의 가장 큰 수혜자는 어쩌면 나일지 모르겠다.

 

지난 10년간의 조사단 활동을 돌이켜보니 참으로 많은 분들과 인연을 맺었다. 문화팀이라고 했지만 전문성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쑥 찾아간 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은 흔쾌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주었다. 이미 새만금 내 군산, 김제, 부안지역의 갯벌 생산력이 증가하거나 더 이상 풍요로운 땅이 아닐 것이란 가정을 하고 있었지만 듣는 내용들은 그 걱정 정도를 벗어나 처참했다. 어민들의 삶은 그 자체가 드라마였다. 그것도 비극적인 드라마. 그들의 이야기가 알려진다면 과연 새만금이라는 대규모 생명파괴 프로젝트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기가 막히고 난감한 상황들이 현실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분들은 정신적인 상처(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침몰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자연을 빼앗고, 삶을 빼앗고, 결국은 목숨까지 빼앗는 것이 새만금 간척 사업이었다. 그분들을 만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함께 지치고 힘들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문화팀은 때때로 무기력했고, 우울했고, 힘들었다.

 

새만금지역의 드라마틱한 변화상만 보고 싶었던 우리는 참으로 우매했다. 모든 것이 다 비극적인 드라마인데, 무얼 더 찾아 새만금 사업의 야만성을 드러내고, 사업의 부도덕성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들이 10년을 되돌아볼 때 남는 것은 몇 개의 보고서와 인관관계 뿐이다. 겨우 ‘라뽀’라고 하는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을 뿐이다. 실은 이제 본격적인 문화조사가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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