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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여행의가치 06.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길위에서

밀포드사운드트랙 데이워크…생명을 지키는 길

윤창영( ycy6529@hanmail.net) 2025.05.15 00:02

20250305_072547.jpg<테아나우 호수. 여기에서 배를 타고 밀포드트랙 그레이트워크를 출발한다.>

오늘의 가치 조각

살아간다는 것은 되어간다는 것.(제2차바티칸공의회)

자연에는 위대함이 깃들어 있다. 항상 겸손해라.

길은 인간다움을 배우고 키워나가는 광야와 같다.

우리가 정복하는 것은 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It is not the mountain we conquer, but ourselves." — Edmund Hill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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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포드트랙 데이워크 출발장소>

 

오늘은 밀포드사운드 트랙을 걷는 날이다. 

어제 크루즈를 타고 밀포드사운드 경관을 보았다면, 오늘은 그 속으로 들어가는 날이라 하겠다. 

오전 10시, 트랙 입구로 향하는 수상택시를 예약했기에 6시부터 일어나 아침을 먹고 7시가 되자마자 서둘러 출발했다.

사실 밀포드사운드 트랙을 완전히 걷기 위해서는 2박 3일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을 '밀포드트랙 그레이트워크'라 부른다. 

그러나 그레이트워크에 합류하기에는 '하늘의 별따기'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의 인기로 예약하기가 쉽지 않다.

이곳에 오기 전 6개월전부터 그레이트워크를 신청(6개월전에 열림, 시작하자마자 마감됨)하려 했지만 이미 포화상태다.

특별한 사정으로 예약을 취소하는 결원이 생겨났을때만 기다려야 한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세계 10대 트래킹이라고 불리는 '밀포드트랙'에 발을 들여놓는 것으로 만족하자는 맘으로, 언제나 신청가능한 데이워크(하루만 이용할 수 있는)를 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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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워크. 자이언트폭포 앞 현수교>

그렇게 하고 싶었던 그레이트워크.

그레이트워크의 출발장소는 테아나우 호수. 

이곳에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넘어 걷다보면, 루트번 트랙과 만나는 지점을 통과하고, 둘째날 밀포드사운드 피오르드산에 올라 능선을 타게 되며, 마지막 날엔 오늘 우리가 걷는 밀포드사운드 길로 나오게 된다.

아쉬움 때문인지 테아나우 호수에서 차를 세우고 한동안 호수를 바라봤다.

호수 주변을 둘러보다 이 지역의 자연보전과 관련된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안내판의 내용은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토종 흰족제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원인은 인간의 무분별한 사냥 때문이란다.

멸종 동물 흰족제비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 역시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됐다.

그때서야 공생해야 할 동물 보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고 한다.

너무 늦게 깨달은 참담한 상황이다.

비로소 이 곳 주민들은 동식물 보호에 대한 필요성을 알리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 글을 보면서 늦었지만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톨릭교회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주제는 '살아간다는 것은 되어간다는 것'이다.

이 말은 궁극적으로 성서의 복음의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이에 대해 내 스스로에게 이렇게 적용시키고 있다. 

나의 삶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실수와 잘못이 항상 존재한다고. 

내가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가족, 친구, 이웃 그리고 주변 모든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한다.

내가 되어간다는 것은 그들을 용서하고, 상처를 싸메주며, 받아줘야 한다는 것으로.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또 그렇게 하기 위해 나 자신의 성찰을 통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분별의 힘이 점점 성장하도록. 

 

비록 늦었지만 이 곳 주민들은 1891년, 뉴질랜드 최초의 보호구역(남북섬 여러구역이 최초로 함께 보호구역으로 지정됨) 지정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내용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멸종된 줄 알았던 타키헤라는 새가 테아나우 호수 건너편에서 다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타키헤라의 생존을 위한 서식환경을 만들어가는데 주력하고 있는 모습이 안내판에 담겨있다.

단 한 생명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존경스러웠다.

지금은 밀포드트랙 그레이트워크를 중심으로 타키헤라의 서식지가 확장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역사를 알고 나서 걷게 된 밀포드트랙은 단순한 트래킹길이 아닌 보호와 존중의 공간이었다.

생명을 지키는 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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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포드트랙의 모습>

밀포드트랙 입구에 도착했다. 

어제 우리 자동차의 배터리 문제를 해결해 줬던 분을 다시 만났다. 

그분은 우리를 데이트랙 입구로 데려다줄 수상택시를 운전하는 분이셨다.

다시 만나니 너무도 반갑고 고마워서 연신 감사인사를 전했다.

아침부터 이 분을 다시 만나니 너무 기분이 좋다. 

수상택시를 타고 10여분을 가니 밀포드트랙 입구에 도착했다. 

세계 10대 트레킹 코스로 알려진 곳.

에베레스트를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이곳에서 훈련했다는 사실은 이 길의 깊이를 말해준다. 

그렇기에 밀포드트랙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다. 

현장에서의 느낌은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말이다. 

트랙의 초입은 마치 밀림 같았다. 

하늘을 가릴 만큼 치솟은 나무들, 그 아래 나무처럼 자란 고사리와 고비들. 

주변 경관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이 빽빽했다. 

걷는 내내 숲은 그늘로 드리웠고, 습하고 조용했다. 

이 고요함 속에서 자연은 거창한 감동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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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 그레이트(자이언트) 폭포>

목적지인 그레이트폭포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으며 문득 이런 의문이 생겼다. 

'정말 이곳이 세계 10대 트래킹 코스로 자리할만 한 곳인가?'

멀리 보이는 주변 바위산과 에메랄드빛 계곡물은 아름답지만, 감동은 기대보다 적었다.

그러나 곧 스스로를 다잡았다. 

자연은 늘 감탄을 요구하지 않는다. 조용한 날숨처럼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반응하지 않아도, 항상 거기에 있다.

봄이면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신록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형형색색 물들이며, 겨울엔 헐벗은 장소.

우리는 자연을 보며 숨이 멎을 듯한 풍경, 에메랄드빛 보석 계곡, 압도적 위용의 바위산, 그림속 같은 전경 등의 온갖 감탄의 수식어를 붙이지만 자연의 입장은 어떨지 궁금했다. 

계절에 적응해야 하는 치열한 삶, 생존을 위한 변화.

자연의 입장에서는 뭔가 다를 것만 같았다. 

어쩌면 진정한 위대함은 감탄보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아닐까?

엉뚱한 상상속에 한동한 머물렀다. 

 

여기서 돌아서기엔 아쉬웠다.

첫째 날 잠자게 되는 헛(롯지,오두막, 숙소)까지 가보고 싶었다.

지나치는 트래커들에게 물으니 그곳까지는 3시간이 족히 걸린다고 했다. 

결국 수상택시 시간때문에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찮게 한국인 4명을 만났다. 

그들은 그레이트워크 마지막 날을 진행하고 있었다.

현지 여행사를 통해 2박 3일간 트레킹을 예약했다고 한다. 

비용에 대해 살짝 물어보니 일인당 250만원 정도 지불했다고. 

그들과 함께 휴식하면서 오늘 데이워크를 걸으며 느꼈던 소회를 나눴다.

그들 말에 따르면 첫째 날과 셋째 날은 숲길을 걷고, 둘째 날만 능선 위를 걷게 된다고 한다.

둘째 날의 풍경이 압권이라고.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트랙의 명성이 일부분 과장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더 깊이 자리했다.

그러나 곧 그런 생각은 접었다.

이 길은 경관보다도, 그 안에 담긴 시간과 노력, 자연과 함께 걷는 감정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초 계획보다 한 시간 먼저 데이워크 출발지점에 돌아왔다.

수상택시도 이미 대기 중이었다.

출발지점 헛(오두막) 앞에 앉아 쉬고 있으니, 그레이트워크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팀이 되어 움직인 것 같다.

도착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모두 뿌듯한 표정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그들을 바라보며 '산은 누가 더 멀리 갔는지를 평가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각자 자신의 길을 걸었고, 자기만의 감동을 품었다는 것'이라며 나를 위안했다. 

삶도 그렇다. 

우리의 삶은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방향이라는 것을. 

얼마나 멀리 갔는지가 아니라,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놓치지 않았는지가 인간다움을 결정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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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포드트랙은 모래톱이 살아있는 생명의 보고>

오늘 밀포드트랙은 나에게 말했다.

겸손하라. 자연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서두르지 말라. 의미 있는 길은 천천히 걸을 때 더 많이 보인다. 

그리고 기억하라. 작고 평범한 속에 위대함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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