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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산티아고순례길 20편_중국 리장을 닮은 레디고스

우리는 매일 기적을 경험한다

윤창영( ycy6529@hanmail.net) 2024.01.28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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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를 떠나며 보는 아침 노을 가득한 하늘. 매일 아침 이런 모습을 보며 걷는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식사 준비를 했다.

식당에 들어가니 이탈리아 순례자 프레도가 아침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조용히 그의 옆으로 다가가 기도문을 살펴보니, 묵주의 9일 기도와 비슷하다.

프레도는 30여분을 기도한 후 자신이 준비한 아침을 꺼내 먹었다.

나는 프레도의 앞자리에 앉아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

나의 메뉴는 샐러드였고, 프레도는 하몽을 바게트에 넣어 먹는 샌드위치였다.

프레도는 인사이더(인싸)다. 사람들과 빨리 친해지고, 함께 이야기도 잘하는 사람이다.

 

아침식사 도중 어젯밤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낸다.

어젯밤 우리 숙소에서 밤새도록 오케스트라가 울렸다고 한다.

그 주인공들은 스페인 순례자 4인방과 나였다.

이들 4인방은 숙소 문이 닫힐 시간까지 근처 바에서 코가 비들어지도록 마신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이 방이 들썩이도록 코를 골았다는 내용이었다.

코 고는 소리가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들렸다는 것이다.

한 명은 드르렁 드르렁, 그 옆의 잠을 자는 순례자는 끄륵 끄륵.

또 다른 사람은 아주 길게 코를 골았단다.

나는 숨 넘어가는 사람처럼 코를 곤다고.

“미안해요. 프레도!”

“아니야. 알베르게에서는 익숙한 일이야. 어젯밤 너무 웃겼어.”

프레도는 자신의 카미노 스토리가 또 하나 늘어났다며 즐거운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프레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런 이야기을 들을 때마다 솔찍히 미안하다.

 

내가 코를 심하게 곤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알베르게에서는 일찍 잠에 드는 것이 유리하다.

알베르게에서는 늦게 자면 다른 사람의 코골이로 잠을 제대로 못 잔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날 때 항상 챙기는 물건이 있다.

그것은 헤드셋이다.

스마트폰에 ‘백색소음(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빗소리를 좋아함.)’을 담아 놓고, 잠을 잘 때는 백색소음을 들으며 잔다.

이렇게 헤드셋을 켜고 누워도 주변에서 들리는 코 고는 소리가 헤드셋을 뚫고 들어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내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내 헤드셋은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다. 이런 날에는 노이즈 캔슬링이 위력을 발휘한다.

백색소음을 틀어 놓고 잠을 청하면, 어느새 잠이 들어 눈을 뜨면 다음날이 된다.

순례길을 가는 분들이 있다면 헤드셋을 챙겨가면 많은 도움을 받을 것이다. 물론 배낭은 무거워지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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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세타 고원에 길게 뻗은 길. 앞에 마을이 가까이 보인다. 하지만 결코 가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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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회장님이 찍어주신 사진. 아웃포커스다. 장 회장님이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아무튼 맘에 드는 사진이다.>

 

메세타 고원(평원)의 찬바람은 손을 얼얼하게 할 정도로 차다.

해가 중천에 뜨기 전까지는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겨내며 걸어야 한다.

손을 얼리는 찬바람 때문에 장갑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을 무척 후회했다.

지금은 아침마다 손이 시려워 미칠 지경이다.

 

길을 걷는 도중 프레도와 또 만났다.

프레도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지금 순례길을 걷고 있다.

그는 메주고리예 성모 신심이 가진 사람으로, 그의 순례길은 곧 메주고리예 신앙고백이었다.

메주고리예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당시 유고슬라비아)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40년전인 1981년 6월 24일, 메주고리예라는 작은 마을에 성모님이 나타났다.

메주고리예의 한 언덕에 다섯 명의 아이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다.

다음날인 25일도 나타나셨는데 당시 목격 증인은 여섯명의 아이들(미리야나, 비츠카, 이반카, 마리야, 이반, 야곱)이었다. 성모 마리아는 아이들에게 자신을 ‘평화의 모후’라고 소개하고, 병들고 죄악 만연한 세상에서 회개하고 하느님과 새롭게 화해하라는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메시지는 다섯가지였다.

첫째는 기도다.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라.

둘째는 의심하지 말고 하느님을 굳게 믿으라는 신앙촉구다.

셋째는 예수님을 삶의 첫 자리로 모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해야 할 회개다. 끊임없이 회개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넷째는 단식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에서 해방되고 전적으로 하느님을 의지하라는 뜻.

다섯째는 평화다. 참된 평화는 오직 하느님께서만 온다.

첫째부터 넷째까지 모두 참된 평화의 길로 가기 위한 조건이다.

결국 요약하면,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의 길을 향해 가라는 메시지다.

지금은 메주고리예 성모를 ‘평화의 모후’라고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이 표현한다.

당시 교황청 신앙교리성성 장관이었던 라징거 추기경(이후 베네딕도 교황. 스스로 물러나심)은 메주고리예 성모 발현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발현을 교회가 인정하기는 시기상조를 입장을 내놨다.

다만, 평화의 성모가 전한 메시지는 교회가 지키고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이기에, 깊은 신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장소로 받아들여 메주고리예로의 순례는 허용했다.

 

어쩌면 지금 내가 걷는 것도 참된 평화를 찾기 위한 길이 아닐까?

처음에는 단단해지자는 마음으로 걸었다.

지금은 기도하고(제1메시지), 하느님께 의지하고(제2메시지), 내가 지은 죄를 묵상하고(제3메시지), 살기 위해 먹으며(제4메시지) 걷고 있다.

왜인지 몰라도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메시지와 내가 행하고 있는 행동들이 닮아 있다는 느낌이다.

순례길에서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 나에게 벌어지고 있다. 

지금 이 순례길을 나 혼자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지금 이냐시오 영신수련법으로 하느님께 다가가고 있다.

그 첫발로 지금까지 지은 죄를 묵상중이다. 죄의 근원을 찾고 있다.

지금은 명호가 트인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때까지의 죄 묵상이 끝났다.

영적인 이끌림 없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을 다시 느낀다.

'어린 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어!'

지난 행위를 돌아보면, 하느님이 슬퍼했을만한, 성모님이 슬퍼했을만한, 부모님이 슬퍼했을만한 일들이 참 많았던 것이 보인다.

'주님! 저는 나는 죄많은 인간이에요! 죄송합니다.'

프레도는 지금 메주고리예 성모 신심으로 ‘세상의 평화를 위해’ 걷고 있다.

나 역시 이냐시오 영신수련 방법을 통한 '내적 평화'를 위해 걷고 있다.

그의 걸음은 세상의 평화를 위한 한걸음 이라며,나의 발걸음도 나의 평화를 위한 한걸음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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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옆에 쓰인 사랑해, 힘내. 이 글자를 보며 미소가 절로 나온다. 그리고 정말 힘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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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어였던 것 같은데. 지금 다시 보니 뭐라고 쓴 건지 모르겠다.>

 

레디고스를 향해 걷는 도중, 순례자들이 돌맹이로 글자를 만들어 놓은 것을 발견했다.

우리나라 글씨도 보인다.

‘사랑해’, ‘힘내’

글씨는 보니 정말 힘이 난다.

순례길에 써 있는 돌맹이 글씨에 누가 마법을 부려 놓았나 보다.

 

어느덧 목적지 레디고스에 도착했다.

레디고스의 알베르게는 카페와 함께 운영되는 곳이다.

다인실에 들어가니 너무 어둡고 칙칙했다. 건물도 오래됐다.

‘이 곳엔 베드버그가 있을 것 같아.’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걱정이 심해져 회장님께 2인실로 가자고 청했다.

2인실은 그나마 햇빛이 잘 들어와 밝은 방이었다.

이날은 방에 들어가자 마자 침대 이 곳 저곳에 계피나무로 도배했다.

순례길 숙소 가운데 가장 베드버그를 걱정한 날이다.

 

오늘부터는 장 회장님과 비용을 각자 계산한다.

장 회장님은 방에서 바게트 빵으로 저녁을 해결한다고 하신다.

나는 저녁(세나) 순례자메뉴를 예약하고, 저녁 7시까지 시간이 있어 레디고스 마을을 둘러봤다.

레디고스는 진흙집이 대부분이다.

김동률의 ‘출발’이라는 뮤직비디오에 나온 리장과 마을과 비슷한 느낌이다.

마을 성당은 언덕 위에 있다.

마을을 둘러보다 갓 시멘트로 발라 놓은 길을 무심코 지나가 버렸다.

발목까지 쑥 들어가 내 발자국이 시멘트 위에 도장처럼 찍혀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 도망쳐 숙소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그거 제가 한 일이에요. 다른 사람 욕하지 마세요.’

저녁 순례자메뉴는 프레도가 추천한 음식을 먹었다.

소갈비찜 같은데 내 입맛에 맞지는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니 프레도가 스페인 전통술을 마셔보라며 한 잔을 사줬다.

무척 쓰다. 맛도 없다.

프레도는 내 일그러지는 표정이 재밌나보다.

한 잔 더 하라고 한다.

‘됐네! 이 사람아!’ 욕 나올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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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고스 마을의 모습. 바람이 심해서 그런지 1층집이 대부분이다. 마을 성당으로 올라가는 도중 계단에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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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고스의 숙소. 여기는 정원이다.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면 카페, 왼쪽문으로 들어가면 숙소다.>

 

레디고스는 바람이 엄청 강하게 불었다.

밤새도록 바람이 휘파람을 분다.

오늘도 백색소음을 들으며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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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순례자메뉴. 프레도가 추천해 준 소고기찜. 식감도 그렇고 내 입맛엔 영 아니었다. 프레도 앞에서는 '원더풀' 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줬다. 나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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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심하게 부는 레디고쓰에 벚꽃이 피었다. 이 벚꽃은 쌍벚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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