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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공장 울타리 넘어, 아름다운 연대로

강문식( 1) 2010.10.16 13:27 추천:1

8월 29일 노동조합 대의원을 맥주병으로 폭행한 사건이 일어나, 회사 측의 폭력적인 현장통제 논란이 많았다. 이 사건과 맞물려 불법파견 철폐를 요구하는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피해 당사자인 현대자동차 전주 비정규직지회 류영하 조합원을 만나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인터뷰 장소로 들어서는 류영하 조합원은 자고 일어나니 유명인사가 됐다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이런 일로 유명 인사가 돼야 하는 것이 씁쓸하지만, 한편 류영하 조합원은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과 가족의 지지까지 얻게 되어, 현대자동차가 비정규직의 투쟁에 일조한 꼴이 됐다.

류영하 조합원은 현대자동차에 비정규직지회가 만들어진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3사 공동투쟁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당사자 뿐만 아니라 투쟁을 지켜보는 사회의 관심도 뜨겁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참소리 : 비정규직지회의 싸움이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요, 올해 대법원 판결 이전에는 어떤 투쟁이 있었나요?

류영하 : 2005년도에 처음으로 불법파견 관련 진정소송을 하게 됐고, 진정하는 과정에서 맨 처음 아산부터 시작했죠. 아산, 울산, 전주. 전주가 제일 늦게 시작했어요. 노동부로부터 전주 13개 업체가 불법파견 판정받았었어요.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자본은 그때도 그렇고 지금처럼 똑같이 탄압을 했고, 징계. 해고 부분에서 엄청나게 탄압이 진행돼왔죠.

지금도 연장선상에 불법파견 관련해서 11일에 전주 지방법원에서 당시 지회장 김형우(현 금속노조 부위원장)씨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판결한 상황이에요. 2005년 투쟁 갖고 무분별하게 남발하고 있죠. 계속 미뤄오다가 대법원 확정 판결 이후에 불씨가 되니까 또 탄압을 일삼고 있습니다.


노동부 판결 이후에 초창기에 조합원이 350명이 됐는데, 당시 버스부 주야맞교대 문제로 시끄러웠잖아요. 비조합원들을 이용해서 조합을 흔들기 시작했어요. 비조합원 위주로 정규직 전환을 시켰어요. 현장에서 주야맞교대를 그렇게 반대하고 3차례 투표에서 모두 부결 시켰거든요. 그런데 전주공장위원회 의장이 직권조인 하는 바람에 주야맞교대가 성사가 됐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비정규직 지회 조합원 및 지회 간부들이에요. 노동조합 만들었다는 이유로. 지회 조직력도 그때 상당히 와해됐고. 4년 전 이야기입니다.

참소리 : 이번 불법파견 판결 이후의 활동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류영하 : 7월 22일 판결 받고 나서 바로 현장에 13개 업체(조합원이 있는 업체가)에서 조직화 사업 일환으로 점심시간, 쉬는시간에 설명회를 진행했어요. 조합원 및 비조합원 모두를 대상으로 대법원 판례가 이런 것이다라구요. 그 때 조합원이 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8개 업체 까지 진행하는 과정에서 업체가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았는데. 9번째 대명기업에서 관리자들이 간담회를 막고 원천봉쇄했어요. 그래서 지회 확대간부들이 뚫고 진행했습니다.

참소리 : 불법파견 판결 이후 현장에서 분위기는 어떤가요?

류영하 : 엄청 좋아졌어요. 현재도 비조합원들이 관심이나 호응이 상당하고.
지역이 좁다 보니까 학연지연혈연관계가 있어서 이게 힘들어요.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이어서, 사장이 나가면 가입하겠다는 사람이 상당이 많아요. 그래서 현장은 상당히 고무돼있어요.

참소리 : 현장 분위기가 올라가면서 즐거웠겠어요.

류영하 : 제일 즐거운 것은 조합원 수가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거에요. 안 먹어도 배부르다고 하잖아요. 지회장 비롯해서 이런 말 많이 해요. 이럴 것 같으면 다 될 수 있겠다며 많이 흥분해 있는 상태에요. 울산, 아산 공장도 다 배 이상 늘어났어요.
10월 30일에 특근거부하고 양재동 본사에 집결하는 것으로 3지회가 결의했어요. 쉽지 않은 결정인건데 현재 분위기로는 조합원 380명이 다 올라갈 것 같습니다.

10월 30일은 3지회가 최대 인원을 동원해서 조직력이 어느 정도나 되나 점검하는 거에요. 이후 싸움을 준비하기 위한 일환이죠. 늘어난 조합원 수를 얼마나 투쟁동력으로 끌어내느냐가 관건이에요. 어떤 싸움이 됐든 전주에서는 가능하리라 봐요. 라인점거든, 생산에 타격을 줄 수도 있구요. 아침 출투할 때 150명은 항상 와요. 중식집회를 하면 300명 정도가 오고. 이 정도면 어떻게든 싸움이 돼요.

참소리 : 그러다 테러를 당하셨는데요, 이 테러가 우발적인 게 아니라는 의혹이 많아요.

류영하 : 간담회를 가로막았던 업체가 있었잖아요. 이것을 항의하기 위해서 업체 사무실 앞에서 2일 동안 집회를 했어요. 그 때 제가 대표발언을 2번했죠.
이 업체는 원래 조합원이 한 명도 없던 업체였어요. 그 전부터 그 업체가 노동탄압이 심했어요. 월차, 조퇴, 이런 것 조차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그런 업체였죠. 그런데 4년 전 주야맞교대 투쟁하면서 해고자가 4명 발생했는데, 해고자 전환배치로 취업을 시켰고. 그 때 조합원 한 명이 이 업체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설명회 끝나고 조합원 수가 1명에서 10명으로 늘어난 거죠.

그 업체 부장하고 제가 속해있는 업체 소장하고 절친한 친구사이에요 저희 업체 소장으로 온 사람은 소장 자격으로 들어온 지 3개월 밖에 안됐는데. 대명기업 조합원이 저한테 우리업체 소장으로 온 사람이 쉬는 시간만 되면 찾아왔다고 말해 주더라구요. 자기는 협력지원팀의 새로운 사람인줄 알고 어디서 온지 몰랐다가 이 사건 이후에 제 업체 소장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요.

380명으로 조합원 수가 늘어나니까. 본사의 한 전무가 전주공장에 방문해서 예전 조합원 수 180명으로 돌려놓으라고 했대요. 수단 방법 가리지 말구요. 업체 관리자들이 관리를 못해서 늘어난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 자리에 왜 갔는지 후회도...함께 해주는 동지있어 좋다

참소리 : 테러 이후 상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류영하 :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명절 전, 20일에 일정정도 합의한 안으로 합의문이 나왔는데 내용이 업체관리자 부장 해고, 병원비 지원, 업체장 공개 사과문이었어요. 명절 끝나고 첫 출근 날 다시 연락이 왔어요. 도저히 합의를 못 보겠다구요. 문서상으로 내용 정리된 것이 하나도 없고, 공개 사과문 요구했는데 공개 사과문도 자기네 업체에다 A4로 조그맣게 붙여놨어요. 트럭부 식당에 크게 대자보로 붙이라고 요구했는데요. 이렇게는 받을 수 없다고 해서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에요.

내가 그 자리를 왜 갔을까 후회를 많이 했어요. 다른 자리도 아니고 술자리였잖아요. 거기를 안가려고 안가려고 했는데... 제가 혼자는 못가겠다 해서 우리 조합원 한 명이 그 자리에 같이 가게 됐는데, 그 조합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본의 아니게 함께 가서 지금도 고통 받고 있습니다. 심리적인 고통도 있고, 맞고소가 돼있는 상황이어서, 경찰조사도 받아야 하고 그래요. 죄송스러워요.

참소리 : 테러 이후에 위축될 법도 했을텐데, 그렇지는 않으셨나요?

류영하 : 위축 된다기 보다, 오기가 더 생기더라구요. 처음에는 가해자와 체격이 비슷한 사람을 보면 약간 섬찟 섬찟했는데, 지금은 옆에 동지들도 많이 있고 하니까, 나 혼자는 아니다 싶어서 편안해요.

참소리 : 혼자는 아니라고 하셨는데, 주위에서 많이 도와줬나봐요?

류영하 : 네. 엄청 많이 했죠. 저희 지회만 해도 제가 속한 업체를 비롯해서 13개 업체가 아침 출근 투쟁, 중식 집회며 정문 앞 피켓팅 까지 같이 하고 있어요. 새벽밥 먹으면서 아침 일찍 나와서 한 달 넘도록 출근 투쟁 진행하기란 힘든 거에요. 하루도 안 빠지고요. 옆에 있는 동지들이 같이 해준 부분에 대해서 너무너무 고맙게 느끼고 있어요.


비정규 3지회, 정규직화 투쟁 함께 간다

참소리 : 아름다운 연대. 현장에서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나요?

류영하 : 여타 울산 아산 보다 전주 공장이 진짜 아름다운 연대고. 그 투쟁의 기풍을 실천해 나가려고 다들 노력합니다. 현장에서도 정규직 비정규직이 나눠져있었는데, 지금은 이런 부분에서 크게 차이를 안 두는 것 같아요. 스스로가들.

지난번에 버스부 18명이 정리해고 됐을 때, 아름다운 연대를 보여줬잖아요. 그 이후부터 정서가 정규직들이 우리 문제로 해서 이렇게 투쟁한다, 여기서부터 서서히 바뀌어간 것 같아요. 지금도 불법파견 관련해서 적극적으로 지원 해주고 있구요. 전주는 정말 노동조합 활동 할 만하죠.

아름다운 연대 전에는 정규직 조합과 비정규직 조합 사이에 보이지 않은 벽이 있었어요. 또 어느 집행부냐에 따라서 높낮이가 달랐구요. 그리고 비정규직 지회가 있음에도 저희가 자주적으로 하지 못했어요. 많은 게 정규직 지회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지금도 그런 게 있습니다.

참소리 : 그런 부분이 어떤 이유 때문이었나요?

류영하 : 아직도 3지회에 힘이 많이 뭉치지 않았다는 거죠. 아산 지회가 제일 먼저 만들어진 지회고, 울산, 다음에 전주 지회가 만들어졌어요. 여기도 아직 서로 간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 다행이죠. 이번 투쟁은 모든 부분을 공동결정해서 같이 하는 걸로 했어요. 이번 투쟁이 처음으로 똑같이 한 목소리를 내는 거에요. 2005년부터 지금까지 중에서 이번이 처음이에요.

참소리 : 금속노조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을텐데요.

류영하 : 금속노조 간부중에 김형우 부위원장이 전주공장 출신이에요. 최병승 동지도 미비국장이구요. 그 동지 또한 울산에서 해고된 상태죠. 그런 동지들이 있는 데도 결정할 수 있는 한계가 있나 봐요. 누구보다 아픔을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이렇게밖에 못하는 게 안타깝다고 그럴까.. 금속노조가 권위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구요.


아내도 이젠 나의 길 이해해주는 든든한 동지

참소리 : 탄압을 받으면서도 노동조합 활동을 계속 하는 건 무엇 때문인가요?

류영하 : 제가 44살인데 2005년 노동조합이 처음 생겼을 때, 전 노동조합의 노자도 몰랐어요. 정규직 노동조합만 알았지, 문외한이었어요. 전주공장 비정규직들이 다 그랬어요. 노동조합을 알기 이전까지 살았던 삶 자체가 돌아보면, 왜 이런 삶을 살았나 싶어요.

먹고 자기 바빠. 별보고 나가서 별보고 돌아올만큼 힘들었죠.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도 시키며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바보같이. 근무시간이 몇 시부터 몇 시까지인지, 하루 몇 시간 근무하는지도 몰랐구요. 다들 그렇게 문외한이었어요. 노조를 알기 전에는 죽은 삶이었어요. 그 정도로 가슴에 와 닿았구요. 세상에 눈뜨게 해준 것도 노동조합이었어요.

처음 시작할 때 비정규직의 비는 내 대에서 끊고 싶었어요. 그런 마음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고. 대법원 판례가 아니더라도, 제 자신보다 우리 아들 딸한테 만큼은 떳떳하고 내 자식한테만큼은 ‘비’자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 활동 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 활동 때문에 부인과 갈등이 상당히 심했어요. 집에도 늦게 들어가고, 안 들어가는 날도 많고 이러다보니까. 가화만사성이라고 진짜 이해를 못해주면 활동하는 것 자체가 힘이 들고 제가 버텨나가는 게 힘들더라고요. 엊그제까지만 해도 와이프가 이해를 못했어요. 설득하고 해도 안 됐는데. 테러 이후에 저를 이해하더라고요.

제가 병원에 있기 때문에 왔다갔다 하면서 여러 사람이 다녀가는 것도 보구. 와이프한테 출투 한번 가봐라 했는데, 가보고는 놀랬어요. 자기 업체에서 몇 명 같이 하는 줄 알았는데 엄청나게 많이 나와서 하고 있으니까요. 울타리 안에서 하는 줄 알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하니까 놀랬어요. 술먹고 입버릇처럼 나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다 아들 딸 위해서 하는 거라고 했었는데. 이제 이해를 해주네요. 든든한 동지가 생긴 거죠.

참소리 : 마지막으로 결의 한 말씀 해주세요.

류영하 : 아직도 얼떨떨해요. 병원에 한 달 넘게 있다가 공장에 가니까, 낯설기라도 해야 하는데 오히려 가슴에 막 와닿는 게, 내가 갈 길이 이런가 보다 라고 느꼈어요. 옆에 있는 동지들 괜찮냐고 물어왔을 때 생전 모르던 동지들도 고생했다고 반겨줬을 떄 너무너무 고마웠구요.

앞으로 불법파견 관련해서든, 혹 제가 정규직이 되더라도. 제 스스로 안주하지 않고 울타리를 넘어 밖에 있는 억압받고 핍박받는 동지들 위해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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