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시절부터 군사독재시절, 그리고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까지. 섬뜩하고 엄혹했던 사회를 거쳐 경쟁과 파괴의 시대로 오는 동안 많은 사람이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싸웠으며, 또란 파괴를 막기 위해 싸웠다. 그 시간동안 어떤 이는 포기하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변질하기도 했다. 그만큼 ‘지킨다는 것’이란 싸움을 하는 것 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문정현 신부의 ‘헌정공연’은 그리 의아한 일이 아니었다. 인권재단 사람이 ‘가을의 신부, 길위의 신부’라는 타이틀로 문정현 신부 헌정공연을 한다고 나섰을 때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할 때가 됐다’라는 인식이 더 컸을 테다. 70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길 위에서 살아온 문정현 신부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다.
헌정공연에 대해 취재하기 위해 명동성당으로 문정현 신부를 취재하러 가기까지는 많은 각오가 필요했다. 이미 수습시절, 4대강 단식을 진행하던 문 신부의 인터뷰를 시도했다가 ‘무서운 신부님’이라고 느껴버렸기 때문이다. 역시나 이번 인터뷰 역시 구구절절한 긴 말은 듣지 못했다.
“나는 잘 몰라. 그리고 말 그대로 헌정공연인데, 내가 어떻게 내입으로 사람들한테 와서 구경하라 그래?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해줄 말이 없네”
손에서 현판 작업을 놓지 않은 채 문 신부가 멋쩍게 웃었다. 인터뷰 내내 조각칼을 손에서 놓지 않는 신부님은 목판에 성경 글씨를 새겨 넣고 있었다. 어떤 작업이냐 물으니 ‘기도’라고 답했다.
“내가 명동성당에 8월 10일에 들어왔어. 들어올 때 정말 절망적인 심정으로 들어왔지. 4대강? 저들은 절대 멈추지 않아. 앞으로도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멈추지 않을 거야. 아무리 싸워도 저들은 사업을 밀어붙이잖아.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니까 이제 자기 기도로 들어가게 되더라고. 그래서 명동성당에 자리 잡고 앉아서 매일 기도를 드리는거야.”
문 신부는 용산 철거민들과의 철거 투쟁이 끝난 직후, 4대강 저지 투쟁에 뛰어들었다. 지난 5월 17일부터 명동성당에서 ‘4개강사업 중단 촉구 전국사제단식기도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천주교를 비롯한 기독교, 불교 등 종교 단체들의 단식과 기도회가 이어지고 범국민 집회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정부는 4대강 사업을 강행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서울대교구 교구청과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주교단의 4대강 사업 반대 결정을 외면하고 있다. 문 신부가 “지금의 명동성당은 세상과 벽을 쌓고 있다”면서 “서울대교구 교구청, 그리고 명동성당의 이기적이고 편협한 행태는 바로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의 영향이라고 믿는다”는 비판을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심지어 사제단의 전종훈 신부는 서울대교구의 ‘징계성 인사’로 사제인사발령에서 제외돼, 3년째 안식년 상태에 있다. 때문에 문 신부는 결국 가장 간절한 ‘기도’를 택했다.
햇빛이 내리쬐는 명동성당에서, 문 신부는 현판 조각을 멈추지 않았다. 명동성당의 방문객들이 문 신부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도 했다. 기도를 해도 햇빛이 내리쬐는 곳을 골라 앉아 기도를 드리는 문 신부를 보면서 ‘길 위의 신부’라는 별명이 떠올랐다. 이번 공연 역시 ‘가을의 신부, 길 위의 신부’라는 타이틀이었다.
“별명? 좋지. 다르게 불리고 싶은 별명도 없고. 근데 이번 공연에서 나한테 토크쇼를 하라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말야. 준비 해 놓은 것도 없고. 참 걱정이네.”
총 3일에 걸쳐 진행되는 이번 공연에서 첫 번째 마당은 ‘토크쇼’로 이뤄져 있다. 이야기 손님으로 공선옥, 노순택 작가가 출연해 문 신부와 함께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형식이다. 문 신부는 준비한 이야기가 없다지만, 문 신부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도 꼬박 일주일이 모자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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