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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지역 민주 열사들의 기록을 하나로 묶은 첫 번째 추모자료 책이 발간됐다.

책 제목은 <그대가 있기에 빛이 있었네> 이다. 추모자료 책 제호는 강희남 목사가 썼다.

이 책에는 6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노동 농민 학생 부문별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13분 열사들의 추모 자료가 담겨있다.

이번 전북지역 민주열사 추모자료Ⅰ발간은 전라북도의 지원으로 전북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맡았다.

이번 발간 작업은 전북지역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산화한 모든 분들의 기록들을 모아가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권미경 노동 열사부터 홍덕표 농민 열사까지 가나다순으로 13분의 추모자료가 구성돼 있다. 이 책 321페이지에는 각각 열사에 대한 추모시, 당시 사회상과 배경, 열사의 말과 동지들의 글모음, 성명서 등으로 엮어져 있다.

전북민가협 오경숙 회장은 발간사에서 “지면의 한정과 시간 관계 상 일부 열사에 국한되었다”고 밝히고 “앞으로 전북지역 민주화 운동의 세세한 역사와 민주화 운동과정을 담아내는 단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차 추모자료 발간에 세세히 기록되지 않은 열사들의 명단(노동 12분, 학생 10분, 재야인사 13분) 이 ‘그대 또한 민주화 재단에 온몸을 던진 아름다운 삶이어라’라고 담겨져 있다.

그대가 있기에 빛이 있었네

권미경(69년생, 전북 장수) 열사

90년 미싱노동자로 살았던 권미경(69년생, 전북 장수) 열사는 회사의 목표량 달성 요구 폭압 속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고 팔에 유서를 남기고 숨막히는 작업현장의 폭압을 고발했다. 당시 섬유 신발 공장들은 ’구사운동‘을 내세우며 여성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시자(61년생, 전북 김제) 열사

96년 분신 사망한 김시자(61년생, 전북 김제) 열사는 89년 전력노조 한일병원 지부위원장 선출, 93년 위원장 재선되는 등 민주노조 운동에 헌신했다. 김 열사가 분신으로 항거에 이르게 된데에는 당시 한전노조 위원장이 ‘자신의 정년 연장을 위해 회사쪽과 추악한 거래’를 했다고 문제 제기한 김 열사에 대해 어용노조의 집행부가 징계에 나섰기 때문이다. 김 열사의 산화는 당시 어용노조 트로이카의 본부였던 ‘한전노조’에 조합원이 주인되는 노조건설의 필요성을 강하게 심어줬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종수(66년생, 전북 장수) 열사

‘무노동 무임금 철폐’ ‘민주노조 사수’ ‘동지들을 탄압하지 말라’ 등을 외치며 89년 산화한 김종수(66년생, 전북 장수) 열사는 중3때 가정형편으로 중퇴하고 서울로 상경해 구로공장에서 일하며 정권과 자본의 폭압적 노조탄압에 맞서 분신으로 항거했다. 김 열사는 자주적 조합활동을 펼치며 87년 이후 노동자 대투쟁 속에서 노동자 의식으로 산화한 청년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주열(44년생, 전북 남원) 열사

60년 3.15 마산 항거 도중 마신 시청 앞에서 미제 최루탄을 맞고 산화한 김주열(44년생, 전북 남원) 열사는 3월 15일 밤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성 선거 규탄 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 27일만에 참혹한 시체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교복차림의 10대 소년의 눈에 포탄 같은 쇠붙이 최루탄이 박힌 채로 떠오른 것이였다. 김 열사의 주검은 ‘정권을 무너뜨리는 민중의 함성’인 제 2차 마산 봉기와 419를 일으킨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진수(49년생, 전북 임실) 열사

71년 김진수(49년생, 전북 임실) 노동 열사는 노동조합을 파괴하려는 구사대에 피습당해 산화했다. 70년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으로 노동자들의 누적된 고통과 분노는 변화를 맞아 민주노조 결성을 시도하게 된다. 이 와중에 김 열사는 민주노조 건설에 우호적이였다는 이유만으로 참혹한 죽음을 맞게 된다. 당시 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은 전태일, 김경숙 수많은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투쟁으로 노동현장을 지켜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경해(47년생, 전남 영암) 열사

2003년 9월 11일 제 5차 WTO 각료회의가 열린 멕시코 칸쿤에서 WTO를 반대하며 자결한 이경해(47년생, 전남 영암) 농민 열사. “WTO가 농민을 죽인다”며 2003년 9월 11일 제5차 WTO각료회의가 열린 멕시코 칸쿤에서 자결했다. 이경해 열사는 “나는 걱정 말라, 끝까지 투쟁하라”고 외쳤다. 이경해 열사 56년에 걸쳐 농사꾼으로 험난하고 고달팠던 삶을 살면서 농민세상을 열어 가는 농민단체들을 키워냈다. 이 열사는 1990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타결에 맞서 다국적 농업기업과 농산물수출국들의 전횡의 현장, 제네바 카드(GATT) 본부에서 할복을 기도하기도 했던 이경해 열사는 한평생 농민운동에 헌신해온 농민운동가 이경해로 기록하고 있다.

이석규(66년생, 전북 남원) 열사

대우조선에 입사에 일해온 이석규(66년생, 전북 남원) 열사는 87년 8월 경찰의 직격 최루탄에 맞아 산화했다. 87년 6월 민중 항쟁을 거치면서 7월 말부터 전국적으로 번져간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은 대우조선을 예외로 남겨두지 않았다. 당시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어용노조를 끝장내고 민주노조를 구성해 본격적인 임금인상, 처우개선투쟁에 들어갔다. 회사측은 폐업이니 휴업이니 하면서 노동자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노동자의 분노는 가두진출로 이어졌고 경찰의 무차별 최루탄 난사로 부상자가 속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세종(59년생, 전북 김제) 열사

80년 5월 전북대학교 학생회관에서 농성 중 5.18 전국 최최로 계엄군에 의해 학살당한 이세종(59년생, 전북 김제) 열사. 80년 5월 17일 밤 12시를 기해 계엄군이 일제히 전북대에 진입했다. 순신각에 학생들은 연행됐고 옥상으로 피신한 이 열사는 계엄군에게 두들겨 맞고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간, 피투성이가 된 채 학생회관 옆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이세종 열사는 조용하고 성실하게 공부하던 평범한 학생으로 이름도 없이 민주주의 열망을 몸으로 실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균수(59년생, 전북 순창) 열사

80년 5월 광주 도청 앞에서 계엄군 총탄에 맞아 사망한 임균수(59년생, 전북 순창) 열사. 80년 민주화 열망은 임균수 열사에게도 전달되었다. 5월 17일 원광대에도 휴교령이 내려져 예정된 봉사활동을 취소하고 광주로 내려갔다. 21일 광주 임 열사는 금남로 시위대열에 함께 하고 되고 도청 앞에서 총성이 울렸다. 임 열사는 총탄에 맞아 22살 꽃다운 나이로 쓰러지게 된다. 80년 광주에서 흘려진 숭고한 피와 땀이 이 역사 속에서 다시 피어나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성만(64년생, 전북 김제) 열사

광주민중항쟁 8주기를 맞이하던 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구내 교육관 4층 옥상에서 할복,투신한 조성만(64년생, 전북 김제) 열사. 당시 가톨릭 민속연구회장이었던 조 열사는 ‘양심수 전원 석방 및 수배자 해제 촉구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던 때 옥상에 나타나 ‘조국통일 가록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분단 상황 고착화하는 미제 놈들 몰아내자’ ‘올림픽 공동개최하여 조국통일 앞당기자’ ‘광주학상 진상규명 노태우를 처단하자’ ‘양심수 전원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5장의 자필 유서를 남기고 할복 투신 했다. 이 열사의 주검은 이후에 일어난 통일운동을 대중적으로 전개하는 계기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최덕수(68년생, 전북 정읍) 열사

88년 5월 17일 교내 광주영령 추모식에서 광주항쟁성명서를 낭독한 최덕수(68년생, 전북 정읍) 열사는 18일 교내 시계탑 앞에서 ‘광주항쟁 진상규명’ ‘국정조사권 발동’을 외치며 온몸에 불을 붙였다. 분신 9일만에 끝내 산화했다. 광주민중항쟁을 겪은 지 8년여가 지난 현시점에서 아직도 진상은 규명되지 않은 채 허구적인 ‘말의 잔치’만이 넘쳐나는 현실이라며, 한반도에 존재하는 반동세력의 실체 대한 정확한 깨달음과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서는 반역사적인 집단과 가차없이 싸워서만이 이길 수 있다는 투쟁의 정신이 우리가 광주민중항쟁에서의 얻은 값진 교훈인 것이라고 당시 성명은 말하고 있다. 또한 최열사 가족의 글, 교지 등에 실린 동료들의 글들은 ‘이제 남은 일든 살아남은 우리가 하겠노라고 외치고 싶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상근(71년생, 전북 김제) 열사

97년 2월 10일 새벽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여 분신을 기도 13일 한상근(71년생, 전북 김제) 열사는 산화했다. 한 열사는 당시 사회모순과 노태우 군사 독재정권의 비민주성과 반통일적인 성격에 대해 각성하고 분노, 폭압에 맞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당시 거듭되는 공안사건 조작과 분신정국이 이어졌다. 한상근 열사는 죽는 순간까지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으 희생을 발판으로 투쟁하여 무법적이고 비민주적인 사회를 참다운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덕표(37년생, 전북 김제) 열사

전북 김제에서 소작농을 해온 홍덕표(37년생, 전북 김제) 농민 열사는 2005년 11월 15일 농민대회 참석 중 경찰폭력으로 중상입고 병원 치료를 받다가 12월 18일 운명했다. 당시 ‘쌀협상 국회비준 저지 전국농민대회’ 여의도 농민시위에서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농민 150여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으며, 전용철 농민과 홍덕표 농민이 사망했다. 농업의 근본적 회생과 고 전용철 홍덕표 농민 살해 규탄 범국민대책위는 노무현 대통령은 직접 국앞에 사과하라, 허준영 경찰청장 파면하라, 쌀비준안을 철회하고 농민의 생존권 문제와 허물어져가는 농업에 대한 대책을 수리하여 국민 앞에 제시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노동 열사에 강민호, 김희철, 박경숙, 박복실, 박용규, 박진석, 서용호, 이대용, 이옥순, 이재호, 조문익, 최순희 열사, 학생운동 열사에 박승희, 신장호, 이형관, 한해수, 권금옥, 박영근, 이식, 최상언, 한병욱, 황호경 님, 재야인사에 김인술, 박배엽, 박순덕, 송용근, 신연섭, 양민숙, 오건, 유종완, 은명기, 이광웅, 이정주, 조용술, 한상선 님 등 명단이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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