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뉴스

문화 [영화]라스 폰 트리에 <도그빌>

편집팀( 1) 2003.08.05 16:41

라스 폰 트리에의 신작 <도그빌>, 즉 '개마을' 은 개들이 사는 방식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한 영화이다. 일찍이 근대 윤리학의 정초를 세웠던 토마스 홉스는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와 같은 존재" 라고 말한 바 있는데 홉스가 인간을 사나운 늑대에 비유한데 반해 라스 폰 트리에는 우리와 친숙한 개에 비유한다.

인간이 아닌 개들의 삶을 영상화한다면 기존의 영화와는 뭔가 달라야 할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궁리 끝에 연극 무대를 끌어들인다. 알다시피 개들의 행동 반경은 그리 넓지 않아서 한눈에 들어 올 정도의 한정된 공간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실험적인 연극 무대가 등장한다. 한 작품에서 내용과 형식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이듯, 개들의 삶(내용)을 묘사하려니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프로시니엄 아치(형식)가 뒤따른다.


자타가 인정하는 테크니션, 라스 폰 트리에 감독

비판적 메시지를 보다 강렬하게 전달하려는 것도 연극적 무대가 필요한 이유다. <도그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브레히트 식의 소격효과를 차용하는데 원래 소격효과는 관객들이 현실을 잊은 채 연극에 몰입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기법이다. 픽션이라는 허방에 빠지다 보면 자신이 처한 객관적 현실을 잊게 될 터. 더구나 영화는 현실을 망각케 하는 판타지적 속성을 지녔지 않은가.

라스 폰 트리에는 자타가 인정하는 테크니션이다. 그러나 '95 도그마 선언' 이후 그의 행보는 스타일리스트가 아닌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가령 <백치들> 만 하더라도 내용이 없는 빈 그릇(형식)이 아니다. 그는 <백치들>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통념, 기성 질서와 가치를 여지없이 매도한 바 있는데 <도그빌> 은 자본주의, 특히 미국 식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개한다. 비판이 그냥 비판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메시지 전달이 보다 강력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관객들의 안일한 태도, 다시 말해 판타지로 도피하려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연극적 무대 도입과 배경의 배제라는 과격한 실험을 감행한다.

일부의 초기 영화들은 영화 기술의 부족으로 마치 연극 무대를 기계적으로 찍어 대는 식이었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이라는 불리는 라스 폰 트리에가 - 비록 심화된 메시지 전달을 위한 것이겠지만 - 다시 옛 연극 형태로 돌아갔으니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기상천외하게도 배경이 없는 무대를 창조한 <도그빌>의 실험성이 전혀 문제가 없을 리 없다. 우선 배우들의 활동 영역과 장소, 배경의 변화가 제한적이다 보니 내러티브의 역동성을 상실한다. 초반부에서 다소 지루감을 초래한 것은 이처럼 변화가 제한적인 탓이다. 때문에 라스 폰 트리에는 클로즈업, 패닝, 버즈아이뷰 앵글 등 잦은 변화를 시도하고 여기에 과도한 내레이션으로 공백을 메운다. 다행인 것은 들고찍기의 역동성이 최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이른바 들고찍기는 '도그마95 선언'에서 밝힌 대로 "작가주의가 낳은 소통불능이나 할리우드의 상업주의적 테크놀러지를 배격하"기 위한 여러 방법 혹은 기법 가운데 하나다. 예컨대 선언 이후 첫 발표작인 <백치들>에서 들고찍기는 도그마 이념에 따라 단순히 투박함을 관철하기 위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도그빌>은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정적인 영상에 활기를 부여한다. 아마 들고찍기가 아니었다면 이 연극적 무대는 무던히 지루했을 것이다. 결국 투박함을 관철하기 위한 들고찍기가 투박함을 넘어 연극적 무대라는 스타일에 일조한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점이다. 물론 리얼리티는 사실적 배경만으로 확보되는 게 아니지만 배경의 부재는 앞에서 말한 대로 장면과 이동의 변화, 나아가 사건의 역동성을 제한한다. 그래서 끌어들인 것이 동화 형태의 내레이션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단지 시각적 영상만으로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대표적인 감독이다. 그런 점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타르코프스키의 정반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시각보다 두뇌의 이해력이 먼저 요구되는 내레이션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그빌>은 영화와 소설의 중간쯤에 위치한 것 같다. 마치 연극적 영화라고나 할까.

문제는 이런 형식의 실험성이 시각에 바탕을 둔 영상미학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과도한 내레이션은 앞에서 말한 대로 시각 보다 머리에 의존한 산문적, 연극적 미학으로 귀결되었다. 다행히 구성의 치밀함과 예기치 않은 반전 장면에 의해 지루함을 벗어나긴 했지만 결국 과격한 실험에 따른 부실함을 완전히 떨쳐내진 못했다.


<도그빌>에서 드러나는 미국의 '두개의 얼굴'

라스 폰 트리에를 따르면 미국은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고, 서로 다른 얼굴은 역시 두 가지의 캐릭터로 제시된다. 그 중 하나는 그레이스의 아버지로 표상 되는 절대권력이다. 절대권력에 의한 일방적 폭력은 9.11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최근의 이라크 전쟁으로 드러난 바 있다. 또 하나는 그레이스라는 캐릭터가 표상 하는 우아함과 관용으로서의 미국 이미지다.

지구상 유일한 강자인 미국은 민주주의가 만개하고 자유가 보장되며, 체제가 무너질 정도의 과도한 비판조차 무제한 적으로 허용하지만 결국 자신을 향한 비판조차 사정없이 먹어 치우는 블랙홀 같은 나라다. 그들은 이 순간도 전 세계의 양심을 대변하며, 빈곤국을 원조하고 평화를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켠에선 패권국이라는 오만과 방자함으로 제3세계의 온갖 폭력을 사주하는 국제조폭으로 군림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 관용과 폭력을 교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일견 그레이스라는 캐릭터는 톰과 같은 우유부단한 지식인들로 만연한 미국에서 긍정적인 인물일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이 주어졌을 때 그녀의 아버지를 따라 돌연 폭력자로 바뀐다. 즉 겉으로는 관용의 얼굴을 짓고 있지만 결국 어느 순간 폭력으로 해결하는 절대권력자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지닌 두 개의 얼굴이고 캐릭터 역시 이런 미국을 표상하고 있다.

영화는 상영이 종료되는 그 시점까지 완벽하게 관객들의 시선을 집중시켜야 한다. 그래서 예비한 것이 마지막 반전 장면이다. 이 장면은 마치 놀이하듯 사람을 죽이는 미국식 할리우드 문법을 충실히 따름으로써 할리우드에 대한 야유 - '도그마 95' 를 연상해 보라 - 와 영화적 흥미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동시에 메시지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와도 맞물려 있다. 다소 엉뚱하고 작위적으로도 보이는 이 반전은 9장의 제목대로 지금까지 관객들이 목격한 사실들은 단지 영화에 불과했음을 주지시키는 한편 심각한 주제를 일거에 영화라는 허구적 판타지로 격하시킨다. 브레히트 소격효과에 대한 마지막 방점인 셈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결국 개와 개끼리 서로 으르렁대는 마을이 바로 미국이고 이런 미국을 희망이 없는 사회로 묘사한다. 굳이 희망의 흔적이 있다면 인간이 사라진 자리에 그나마 한 마리 개라도 남아 있지 않느냐 라는 것일 텐데, 기껏 동물적 본성을 지닌 개가 과연 신화시대의 모세처럼 엑서더스를 감행할 수 있을까? 게다가 도그빌의 주민들은 모두 죽었지 않은가. 이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로서의 미국을 보는 라스 폰 트리에의 시각은 야멸차고 냉소적이라 할 수 있는데, 결국 <도그빌>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우화이고 미국의 사망선고에 다름 아니다.



- 조율연 / http://member.kll.co.kr/sunsuk-q
(현) 군산대학교 실습선 해림호 선장, 문학, 음악, 영화 애호가
- 기사출처 : 군산타임즈 http://www.gstimes.com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