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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음은 한 여름의 소나기처럼 지나갔다 오늘도 습관처럼 나는 한 장의 흑백사진 속에서 아득한 언덕을 헤맨다 그 소년과 그녀는 어디서 무엇을 할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나는 아직 첫사랑의 그 추억으로 살아간다 여전히 그 때 그 소년으로 머물러 있다

갑자기 쏟아지다가 창 밖을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쳐있다. 내 젊음은 그렇게 소나기처럼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넘쳐나는 열정을 달리 잡아두지 못해 미친 듯이 방황하다가 어느 날 나 자신을 돌아보니 나는 벌써 20대를 떠나 저 멀리 와있었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며 소나기가 마을을 훑고 지나갔다. 처마 밑이나 건물입구로 비를 피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거리로 나왔다. 방금 수영을 끝낸 그녀처럼, 참빗으로 빗어 넘긴 그녀의 머리결처럼 단정해진 도시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빛나는 순수의 언덕을 넘고있다. 나도 한때는 젊었었다. 그곳에는 그해 여름의 만남과 기다림, 그리고 마지막 이별이 서랍 속의 흑백사진처럼 숨쉬고있다.


소나기 같은 영화 <클래식>

잠시나마 나를 그 시절로 돌아가게 했던 <클래식>은 <비오는 날의 수채화>와 <엽기적인 그녀>의 곽재용 감독이 만들었다. 삭막한 디지털 세상에서는 오히려 아날로그 보다 더 옛날 것이 가슴을 저리게 하는 감동을 주기도 한다. <클래식>이 바로 그런 영화다. “태양이 바다의 미광을 비추이면/ 나는 너를 생각하지// 희미한 달빛이 우물에 떠 있으면/ 나는 너를 생각하지”로 시작하는 괴테의 「연인 곁에서」란 시의 분위기처럼, 1960년대의 ‘촌스러운’ 사랑을 30년이 지난 1990년대에 들어와 그들의 자식들이 여전히 촌스러운 방식으로 완성해간다는 내용이다.

지혜(손예진)는 다락을 정리하다 우연히 준하(조승우)의 편지와 일기장을 발견한다. “엄마가 꺼내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던” 그 일기장에서 준하의 흑백사진을 꺼내드는 순간 지혜는 엄마 주희(손예진)의 여고시절로 돌아간다. 준하와 주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그러나 어릴 적에 부모의 강요로 주희와 정혼했던 친구 태수가 개입하면서 그들의 사랑은 어긋나기 시작하고, 태수가 자살을 시도하면서 극복하기 힘든 시련 속으로 빠져든다. 결국 그들은 이별한다. 영화는 운명처럼 만난 지혜와 상민(조인성)을 통해 그들 부모의 안타까운 사랑을 계속 이어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아무래도 감독의 역량으로 돌려야겠다. 사랑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이런 영화가 가능했겠는가. 인물들의 감정변화를 따라가는 음악도, 손예진과 조승우의 투명한 연기도, 첫사랑에 어울리는 영상과 대사도, 지루하지 않는 속도감 있는 전개도 다 칭찬 받을만하다.

특히 음악은 <클래식>을 추억이 풍성한 영화로 만들었다. 베토벤의 <비창>, 비발디의 <첼로 협주곡 6단조>, 파벨의 <캐논 D장조>, 사이먼 앤 가펑클의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등은 그때 그때마다 사랑의 환희와 슬픔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고있다.

그러나 신파조의 장면들은 눈에 거슬린다. 준하가 베트남 전투에서 목걸이로 인해 실명한다는 후반부는 너무 오버해서 값싼 감정으로 비친다. 순전히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한 속보이는 무리수가 아닌가 싶다.

<클래식>은 황순원의『소나기』와 같은 영화다. 두 세대에 걸친 사랑을 체로 걸러 이물질을 골라냈다. 유신독재나 베트남 파병 같은 시대의 어둠은 단지 그들의 사랑을 쥐어짜는데 필요한 배경으로만 작용한다. 이와이 순지의 <4월 이야기>나 장이모의 <집으로 가는 길>이 겹쳐 떠오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자전거 탄 풍경의 노래에 맞추어 지혜와 성민이 빗속을 뛰어가는 장면은 한편의 뮤직비디오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성민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지혜가 도서관까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며 아쉬워했다. 주희와 준하에게 젊음은 그 정도의 거리였을 것이다. 젊음은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들이 걸었던 그 강 풍경은 30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오늘은 하얀 칼라의 교복을 입은 갈래머리 주희가 강 언덕에서 준하를 기다릴 것만 같다. 혹시 그녀를 기대하고 그 강을 찾았다면, 그래서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면, 당신은 지금도 첫사랑의 아픔을 앓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클래식>은 괜찮은 영화다.


섹스보다 더 좋은 것은

▲영화 [베터 댄 섹스]

<클래식>의 ‘촌스러운’ 분위기를 사정없이 깨버린 영화가 있다. 제목부터가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그래서 뭔가 포르노적인 것을 기대하고 영화관을 찾았다면 크게 후회할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젊은이들이라면 사랑과 결혼을 분리해서 그 정도는 보통으로 즐기기 때문이다. 프레데릭 폰테인 감독의 <포르노그래픽 어페어>의 속편이라고 해두자. 조너선 테플리츠키 감독의 <베터 댄 섹스>가 바로 그 영화다.

3일 후에 당신은 이 도시를 떠나야한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하고싶은 게 무엇인가? 솔직한 대답은 질퍽한 섹스가 아닐까? 젊은 남녀가 시드니의 한 파티장에서 서로 관심을 보인다. 3일 후면 영국으로 돌아가는 사진기자 조쉬(데이비드 웬햄)는 그녀와 섹스가 하고싶다. 그녀도 마찬가지다. 이 보다 더 좋은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부담 없는 파트너를 원한다면 무조건 이 남자를 잡아야한다. 그래서 씬(수지 포터)은 기꺼이 그를 자기 집으로 대려 간다. 침대에서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면서 그들 사이에는 이상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게 뭘까? 아마 그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처음 목적은 사랑이 아니었다. 섹스 그 자체였다. 그런데 사랑을 느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닌가. 물론 서로가 오르가즘까지 도달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그들은 섹스를 통해 사랑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베터 댄 섹스>는 조너선 테플리츠키의 말처럼 섹스가 ‘즐겁고 재미있으며, 인간관계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고, 열린 실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사실 섹스라는 것이 그렇다. 욕망을 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옷을 벗어야 하고, 알몸으로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신음소리까지 내지르며 격렬하게 몸을 섞어야 한다. 여기서 옷을 벗었다는 것은 가식과 위선, 도덕까지도 벗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섹스를 하는 동안만큼은 인간이 가장 진실해질 수 있는 시간으로 얼마든지 그 과정에서 진짜 사랑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질문이다. 섹스보다 더 좋은 것은?


그것은 추락이었다

2003년 4월 1일, 그것도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자살해버린 그를 조문하기 위해서였다. 하필이면 영화관을 찾은 날 비가 심난하게 부슬부슬 내렸다. 그의 유작이라서 죽음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는 <이도공간>의 간판이 그의 슬픈 영혼처럼 비를 맞고 있었다.

▲영화 [이도공간]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정신과 의사 짐(장궈룽)은 원혼들에게 시달리는 얀(임가흔)을 치료해준다. 그녀가 완치될 무렵 이번에는 짐에게 첫사랑의 원혼이 나타난다. 공포는 서서히 죄어들어 오고, 그는 비상구가 없는 옥상으로 내몰려 “지금까지 난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어”라고 중얼거린다. 그 순간 나는 배우 장궈룽의 자살을 떠올리며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저런 공포에 쫓겨 투신했구나”하며 긴장하는데 그때 다행스럽게도 얀이 나타나 짐을 붙잡는다.

장궈룽의 마지막 날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영화 <이도공간>은 인간의 공포란 귀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부의 문제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고있다. 얀에게는 어린 시절 자기를 버린 이혼한 부모에 대한 증오가, 짐에게는 자기 때문에 자살한 첫사랑에 대한 죄의식이 각각 귀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보이는 게 다 사실은 아니에요.” 짐이 얀에게 한 말이다. 영화 속의 짐은 자살한 첫사랑과 화해함으로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니었다. 진짜 결말은 영화 밖에서 일어났다. 짐을 연기한 장궈룽은 옥상에서 자기 손으로 자기 등을 떠밀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추락이었고, 절망으로부터 탈출이었다.


천국과는 먼 사회

그날도 스쿨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상영시간이 다가오자 영화관 주변을 서성이던 사람들은 <살인의 추억>으로 몰려들어갔고, 나는 토니 헤인즈 감독의 <파 프롬 헤븐>으로 들어갔다. 그 넓은 객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분 좋게 정 중앙에 자리를 잡았는데, 가정주부인 듯한 여자 2명이 비상구라 쓰여있는 입구에 나타나 실내를 쭉 한번 훑어보더니 곧바로 내 뒤쪽으로 와 요란스럽게 앉았다. 나는 그 여자들을 힐긋 쳐다봤다. “이런 영화를 다 보겠다고 오다니, 인생이 뭔지 아는 사람들이구나.”

영화가 시작됐다. 5분이나 지났을까. 빛나는 영상과 줄리안 무어의 우아함에 사로잡힐 즈음 갑자기 날카로운 벨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그 여자가 태연하게 핸드폰을 받고 있었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영화가 끝날 때까지 통화와 잡담은 거의 시장판 수준으로 계속됐다. <파 프롬 헤븐>을 본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갈등하는 한 주부의 삶을 다룬 이 영화는 고전음악을 감상하듯, 또는 낙엽 지는 가을 산길을 산책하듯 관람해야한다. 그런데 이 무슨 경우 없는 짓인가.

▲영화 [파 프롬 헤븐]
나는 불면의 밤을 지새듯 좁은 의자에서 수십 번을 뒤척이면서 화면에 집중하려고 무던 애를 썼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잠을 설친 기분으로 영화관을 나오면서 일부러 그 여자들을 살펴봤다. 얼굴과 옷에 한껏 멋을 부린다고 부렸는데도 천박함은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일상이 심심하면 카바레에 가서 춤이나 출 일이지. 영화는 왜 보러 오셨나? 같은 중년의 여자로서 줄리안 무어의 분위기를 흉내라도 냈더라면 나는 대한민국 아줌마에 대한 편견을 반성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의 말 때문에 온 나라가 신경이 곤두서있는 지금, 우리는 여전히 ‘천국과는 먼’ 사회에서 살고 있다.


영화가 무너지고 있다

제70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제임스 카메론이 <타이타닉>으로 작품상, 감독상 등 11개 부문을 휩쓸면서 수상소감으로 “나는 이 세상의 왕이다”라고 외쳤다. TV 앞의 시청자들은 왕이라는 소리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듣는 사람에 따라 꿈과 희망으로, 또는 부시에게나 어울리는 오만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카메론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 2억 8천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 영화로 그는 미국의 문화를 전 세계에 전파시킨 것 이외에도 영화관 상영, 비디오, 음반, 게임, 출판, TV판권 등으로 32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 얼마나 대단한 업적인가. 여기서 나는 <타이타닉>의 성과를 충무로와 비교하여 2가지만 생각해보겠다.

첫째로 영화제작비 문제다. 할리우드에서 보통 블록버스터라는 영화 한편의 제작비가 충무로에서 거의 10년 동안에 만들어지는 영화의 총 제작비와 맞먹는다. 지금은 한국영화가 스크린쿼터의 도움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지만, 충무로의 제작비로는 주로 돈 안 드는 코미디나 조폭, 멜로 드라마 정도밖에 만들 수 없고, 이러한 장르의 편중은 한국영화를 언제든지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다.

두 번째로 영화는 황금알을 낳는 벤처산업이라는 것이다. <타이타닉>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잘 만든 영화 한편이 고용을 창출하고 산업을 재편시키면서 연간 수백만 대의 자동차 수출과 맞먹는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눈송이를 굴리면 나중에는 산처럼 확대재생산 된다는 ‘배가게임의 법칙(Snowball's Chance Game)이 적용되는 원소스 멀티유스(Onesource Multiuse)형’의 콘텐츠 산업이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영화산업이 주도하는 엔터테인먼트산업이 21세기 국가경쟁력에서 제조업을 대신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미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 진입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의무상영일수(146일)인 스크린쿼터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경제계는 폐지 혹은 축소를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로 첫째 한국영화가 시장점유율 48%에 이를 정도로 충분히 성장했고, 둘째 스크린쿼터를 고수하는 것은 수출업체에 막대한 불이익을 주는 소탐대실(小貪大失)한다는 것이고, 셋째 통상마찰의 원인이 되고, 마지막 영화보호와 문화보호는 다르다는 것이다.

영화가 밥 먹여 주냐는 경제 관료들다운 주장이다. 그러나 그들이 틀렸다. 첫째 50%에 육박하는 시장점유율이라는 것도 할리우드의 막강한 배급력과 수백 편의 영화 앞에서는 사상누각처럼 무너질 수밖에 없고, 둘째 소탐대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영화를 영화관에서만 상영하는 필름정도로만 보는 무지의 소산이고, 셋째 ‘문화적 예외’를 무시하고 항상 있어왔던 미국의 압력을 두려워한다면 그건 직무유기를 하겠다는 것이고, 마지막 영화보호로 설령 영화제작자만 돈을 번다고 해도 결국은 문화발전으로 이어진다.

결국 우리영화를 포기하겠다는 것인가? 세계시장을 80%이상 지배하고 있는 할리우드에 맞서 공정한 게임을 하자는 스크린쿼터가 무너지면 투자자가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고, 영화관에서는 할리우드영화간판만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의 정신은 할리우드에 종속될 것이다.


- 송동윤 / 한일장신대교수·연극영화과
- 열린전북 7월호 http://openc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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