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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생활] 나의 나이테는 지금

황희숙( 1) 2003.07.15 21:44 추천:3

드디어 우리집에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초메가톤급 태풍, 바로 아빠 아니 아버지의 정년퇴직이 바로 그것이다. IMF 이후 대체로 짧아진 정년 때문에 예상보다 1년정도 당겨진것같다. 부모님이 결혼을 일찍하셔서 내 친구들에 비해서 부모님의 연세가 아직 젊어서 경제활동을 그래도 오래 하신 편이다.

아직 젊은 나이에 할 일없이 집에 있는 것도 문제이고, 가족 내에서 수입이 특별히 없는 것도 거참 불안한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나에 대한 감시와 압박이 많아질 거라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할 일이 없으신 아버지는 과거에는 밤 9시 반이면 주무셨는데 이제는 내가 올 때까지 거실에 앉아 계시는 거다. 내가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야 거의 12시를 넘기는 판이고, 일주일에 한번 이상씩 외박을 하니... 내 일상이 다 들통난 건 물론이고, 출퇴근시간이 꼬박꼬박 체크되고 있으니 ...거참 심적으로 무지 부담스러운 생활의 연속이다.

물론 요즘 내게 하고 싶은 말도 많겠지만 나와 아버지와의 대화는 하루 중 딱 두 마디밖에 없는 것 같다. 밤에 현관문 열고 “다녀왔습니다.” 하고 식구들 잠 깨우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면, 아버지는 거실에서 진짜 궁금한 말투로... “대체 뭐하다 이제 오냐?” 나야 술 마시고 이제 왔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그냥 소리 소문 없이 내방으로 쏙 들어가 버리니 진지한 대화는 항상 이루어지기 힘들고 .

내가 온갖 잔소리와 구박에도 불구하고 집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마 과거의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이제껏 한번도 집을 떠나 있어보지 못했던 내가 학생운동시절 2~3년 동안 밖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다. 근데 이때 가장 큰 어려움은 물론 경제적인 궁핍함이었지만 낯설은 자취방에 있으려면 마음이 불안하고 왠지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질 않았다. 물론 친구들과 자유롭게 활동하는데 제약은 없다는 이점이 있지만...

그 후 다시 집으로 들어와서 생활을 하니 온갖 서러움을 받더라도 그래도 집이 편안하고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급할 때는 남동생, 부모님이 돈도 빌려주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달라고 하고... 무엇보다도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데 내 개인적인 시간을 전혀 할애하지 않아도 된다는 무지 이기적인 생각과 생활태도가 나를 아직도 집에 머무르게 하고 있는 주된 이유일 것이다.

인간이든 물건이든 어떤 생물이든 모든 것에는 역사가 있기 마련이고 나무처럼 어떤 시기를 구분 짓는 나이테가 있기 마련인데, 나에겐 이번 여름이 어쩌면 가장 굵은 나이테가 생기는 시기일 것 같다.

부모님과 결별(?)하고 경제적으로나 생활면에서나 독립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어디를 봐 둔 곳은 없다. 그러나 “찾는 자는 구할 것이다”라는 역사의 진리를 믿기에 마음으로라도 준비를 해두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제야 경제적, 정신적으로 온전한 독립적인 인격체가 되려나보다. 부모님께 빌붙어 산지가 어언 몇 년인가? 엄마가 대신 해주는 온갖 가사 일의 혜택을 저버리고, 차비와 술값 외에는 별다른 생활비가 필요 없는 ‘우리집’을 이제 나서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참으로 큰 도움을 받고 살았다.

부모님, 소녀(?) 이제 그만 ‘우리’라는 집에서 퇴청하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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