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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이야기]돌이킬 수 없는…

편집팀( 1) 2003.05.21 11:35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 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 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박제삼의 시 “울음이 타는 강”이다. 노을지는 강변을 따라 걷듯 그의 시를 읽다보면 금방 그의 눈물에까지 도달한다. 그 어떤 잊지 못할 슬픈 사연이 있어서 만은 아닐 것이다. 마음이 어느 한 곳 기댈 곳을 찾지 못하고 강물처럼 이리저리 부딪치며 흘러 다닐 때, 시인에게 그것은 설움이다. 탄생과 죽음, 환희와 고통이 동시에 뒤엉켜 아우성치는 4월에는 더욱 그러하리라.

항상 제자리에 있어 기쁨도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그 빈자리가 너무 크게 허전해서 그 어떤 행복으로도 다 채울 수가 없을 때, 나는 혼자 “울음이 타는 강”을 건넜다. 이제 더 이상 그것들을 볼 수 없으니, 가벼운 바람에도 꽃잎이 떨어져 가지만 덩그러니 남은 낮선 목련을 대하듯 마음이 아프다.

홍콩 중심가의 호텔 24층에서 한 남자가 창 밖으로 몸을 던졌다. 불혹의 나이임에도 여전히 소년 같은, 너무 해맑은 얼굴이라서 스쳐 가는 우수도 금방 눈빛으로 드러났던 장궈룽(張國榮)이 자살해버린 것이다. 세상의 인기를 한 몸에 누려왔던 스타의 죽음이라서 허망함은 더 컸고, 그래서 헤아려보는 의문이다. 왜 죽었을까? 그 이유는 땅에 닿는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피를 쏟으며 형편없이 부서진 그의 머리, 그의 뇌 속에서 흩어졌지만, 그가 남긴 메모로 추측하자면 동성애였다.


비상과 추락

장궈룽은 <패왕별희>의 우희처럼 살다가 우희처럼 가버렸다. 이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데이는 어머니에 의해 흉하게 붙어있는 여섯 번째 손가락이 잘려나가고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고아원이나 다름없는 경극단에 맡겨진다. 그 때 돌아서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는 그 아이의 표정이 얼마나 처절했던가. 그곳에서 그는 폭력적인 매질로서 진짜 여자가 되기를 강요당하고, 끝내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 항우의 애첩인 우희 역을 맡게된다.

이러한 연극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그의 동성애는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는 현실과 극을 구분하지 못하고 항우 역의 배우를 사랑하여 스스로 비극을 키웠으니, 이제 와서 자기를 버린 어머니를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국 그는 다른 행복은 찾아내지 못하고 자살로서 한 많은 삶의 막을 내렸다. 그가 죽은 장소도 극장의 무대였으니, 현실에서는 절대로 우희처럼 살수가 없기에 차라리 우희처럼 자살을 선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결말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죽을 때에만 땅에 내려앉는다는 ‘발 없는 새처럼’ 그는 그렇게 추락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생각과는 달리 그에게는 <와호장룡>의 그녀처럼 하나의 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천하의 명검인 청명검을 휘둘러 허공에 이루지 못한 사랑과 소원을 새긴 <와호장룡>에서 용(장쯔이)은 쳐다보기만 해도 현기증 나는 천길 절벽 밑으로 미련 없이 몸을 날린다. 그 장면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관객은 그것이 비상인지 추락인지 순간적으로 흠칫 혼란이 오겠지만, 처음부터 영화의 흐름을 제대로 따라간 관객이라면 이미 몸서리치게 전율했을 것이다. 그 충격의 순간이 지나고 영화관 문을 나설 때쯤에 나는 그것을 자살이 아닌 비상으로 정정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추락의 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말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죽음이 있다면 그것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형일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어둠 속의 댄서>를 봤다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지극히 통속적인 영화가 2001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까지 수상한 것은 아무래도 감독의 역량과 뮤지컬을 소화해내는 가수출신 배우의 뛰어난 연기로 돌려야겠다.


형장으로 가는 춤과 노래

셀마(비욕)와 그녀의 아들은 집안 내력으로 인해 머지않아 장님이 된다. 그녀는 아들의 눈을 수술해주기 위해 공장에서 밤낮으로 악착같이 일한다. 그러던 중에 시력을 잃게되고, 공장에서도 쫓겨난다. 그래도 그녀는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뮤지컬배우가 꿈인 그녀에게 오직 하나의 즐거움이 있다면 노래하고 춤추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아노>와 <피아니스트>의 피아노선율처럼, <패왕별희>의 경극처럼, 또는 나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손길처럼 인간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치료해주는 역할을 하고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기에서 셀마의 어둠 속의 춤과 노래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가는, 끝내는 사형대로 가는 제의가 되어버렸다. 그러기에 그것은 살고싶다는 절규의 다름 아니다. 다음은 그녀가 기찻길을 더듬으며 집에 가는 길에 춤을 추며 부른 노래의 가사다.

“나는 모든 걸 봤는걸요. 나무도 보았고, 미풍에 나부끼는 버드나무 이파리도 보았고, 제일 친한 친구의 손에 죽은 사람도 보았고, 채 꽃을 피우기도 전에 스러진 생명들도 보았어요. 과거는 이미 보았고, 미래의 모습도 알고 있어요. 난 모든 걸 보았어요. 더 볼 것이 없답니다. 이대로도 행복한 걸요.”

불행조차도 순순히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셀마가 얼마나 대견스러운가.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그녀의 모성애가 눈물겹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의 돈을 훔친 경찰관을 죽이게되고, 곧바로 체포되어 재판을 거쳐 사형을 언도 받는다. 그리고 무기로 감형될 수 있는 기회조차 포기한 채 형장으로 끌려간다. 그때 공포에 질린 그녀의 마지막 얼굴을 과연 똑바로 쳐다볼 수 관객이 몇이나 있을까?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리라. 우리 모두는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공범들이니까.

어머니라 하기에는 너무나 연약했던 여자, 살인자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착했던 여자 셀마가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 형 집행 전에 그녀가 남긴 말을 나는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 “왜 자식을 낳았소? 당신처럼 될 줄 알았으면서”라는 남자친구의 물음에 그녀는 흐느끼며 대답했다. “안아보고 싶었어요. 내 품에….”


오만의 결정판 <태양의 눈물>

사형은 사람에 따라 견해를 달리하지만, 전쟁은 어떤 명분을 내세운다해도 범죄다. 지난주에는 안톤 후쿠아 감독의 전쟁영화 <태양의 눈물>을 봤다. 워터스(브루스 윌리스)가 이끄는 미국특수부대가 쿠데타로 내전중인 나이지리아에 침투하여 미국국적의 의사와 나이지리아 민간인들을 구출한다는 내용이다. 왜 하필이면 ‘충격과 공포’의 시대에 휴머니즘인가.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기분은 한마디로 역겨웠다. 20세기에 일어났던 숱한 전쟁 중에 그들이 직·간접적으로 개입 안 한 전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이 땅의 모든 비극은 그들로부터 기인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21세기의 시작도 불안하다.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지금 이라크에서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만은 휴머니즘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구역질나도록 뻔뻔스럽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태양이란다. 멋대로 세계의 경찰관 노릇을 하더니, 이제는 황제로까지 군림하고 있다. 오만의 극치다. 그 어떤 욕설도, 그 어떤 악취도 이 보다 더 지독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너진 후세인의 동상처럼 흉물스러운 미국만세의 <태양의 눈물>이 말하고 싶은 진짜 메시지는 휴머니즘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를 끝내면서 보여주는 “선의 방관은 악의 승리를 꽃피운다”라는 자막 속에 숨어있다. 우리편은 선이고, 그 나머지는 전부 악이라는 서부 출신 대통령의 이분법적 세계관과 맞닿아있는 이 경고는 우리에게 충격과 공포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북한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북한이나 땅에 바짝 엎드려 미국의 눈치를 살피고있는 남한이나 생존을 향한 몸부림은 다르지 않다. 누가 뭐라 해도 지금은 남북간의 대화와 양보와 지혜가 필요한 때다.


돌이킬 수 없는...

거리마다 4월의 벚꽃이 지고 있다. 꽃잎 같은 생명이 눈처럼 휘날리고 있다. 토마호크 미사일에 의해서, 벙커버스터에 의해서, 집속탄에 의해서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 그 비극의 이라크로 성질 사나운 람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우리의 젊은이들이 떠난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범죄다. 국익을 내세워 파병을 호소한 노 대통령도, 파병안을 통과시킨 국회의원들도, 지난 대선에서 노 후보에게 표를 찍은 나도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시작과 끝은 이렇게 어이없이 뒤틀려버렸다. 허위와 위선으로 배가 부른 정치인들이여! 역사는 그대들을 치욕스런 한국인, 또는 한국인 같은 미국인으로 기록하리라.

올리버 스톤의 <7월 4일생>이라는 영화가 있다. 빨갱이로부터 조국을 수호하자는 정부의 감언이설에 속아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민간인에게 방아쇠를 당긴 한 젊은이(톰 크루즈)의 이야기다. 다음은 그가 공화당전당대회장에서 반전시위를 하면서 외친 말로 지금의 내 심정을 대신한다.

“이 전쟁은 죄악이요. 내 상처 때문에 비통한 것이 아니오. 이 전쟁이 잘못됐기에 말하러 왔소. 이 사회가 나와 내 전우를 죽였소. 우린 미국인을 사랑하지만 정부는 안 합니다. 정부는 모리배요, 폭행범이요, 강도입니다.”

지금은 양심과 정의가 얼어붙은 빙하의 시대다. 칼 춤추는 미국의 광기 앞에 여기저기서 죽어 가는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가스파 노에 감독의 <돌이킬 수 없는>은 이러한 잔인한 4월에 어울리는 영화다. 가스통으로 집요하게 얼굴을 으깨버리는 그 끔찍한 살인도, 내장을 휘저으며 들어가는 성기, 그 개 같은 강간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전혀 다른 그들의 행복한 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으니, 영화의 마무리 자막처럼 “시간이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다”고 자위해야 속이라도 편할 것 같다.



- 송동윤 (한일장신대교수·연극영화과)
- 열린전북 5월호에 기고된 글입니다. http://www.openj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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