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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생활] 내가 지금 기고만장해도 될까?

황희숙( 1) 2003.05.16 22:17 추천:2

얼마전 직장내 성희롱 상담을 했다. 나는 성희롱 상담을 요청받으면 일단 긴장하게 된다. 몇 년전에 우연찮게 처음으로 직장내 성희롱 상담을 받아서 그 여성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법적으로는 이겼다고 할 수 있지만 실제 그 여성분은 심한 타격을 입었던 경험이 있다.

오히려 공격해 들어오는 성희롱 가해자들과 함께 침묵과 웃음으로 동조한 남직원들로부터 온갖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인간에 대한 모멸감 등으로 남편이 유학간 호주로 아예 이민을 떠나고 만 것이다.


법적으로는 이겼지만 심리적 고통은...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나는 정신적으로 이 여성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처음 겪는 일이라 나도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항상 그때 좀 더 잘했더라면...하는 미안한 마음이 있다. 그래서 너무 무리하게 나서라고 요구하지는 않는 편이다. 문제 해결의 당당한 주체로 자신이 먼저 서야 하지만 이것이 쉽지만은 않은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상담을 요청한 그녀는 목소리부터 씩씩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을 알려서 가해자의 처벌을 원한다고 했다.

대형 유통마트의 한 부서에서 회식을 가졌다. 처음에는 이상이 없다가 일은 2차로 간 노래방에서 발생했다. 관리자급 되는 남성이 마이크를 잡으면서 분위기는 이상하게 흘러갔다. 직장내에서 위계 질서상 약자일 수밖에 없는 부하 여직원들에게 이상한 행위을 일삼으며 자신의 노래에 맞춰 놀아줄 것을 강요했다. 이 여성분 순서가 왔을 때 노골적으로 거부하자 끝에는 서로 멱살을 잡고 옷이 찢어지고 이 여성의 머리를 치는 등의 폭행까지 일어났다. 한마디로 대표로 나서서 거부하다가 싸우게 된 것이다.

그녀는 20대 중반의 자립적인 여성이었으며 남자친구 또한 전폭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면 본인에게 돌아올 수 있는 피해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말해주었다. "일단 온갖 추잡한 소문에 시달릴 것이다. 가해자들이 오히려 당신을 더 나쁜 사람으로 몰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감당할 자세가 되어 있으니 일을 진행시키기로 했다.


사표를 썼지만 당당한 그녀

몇일 후 회사에 사표를 냈다는 그녀의 전화가 왔다. 나는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이 씩씩한 사람이 오죽 했으면, 자기 편이 한명도 없다고 생각했으면..하는 생각과 이분이 더 이상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에 만나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 이렇게 그만두면 더 이상 다른 성희롱 피해자들은 문제를 제기할 수 없게 된다... 피해자만 손해본다는 그런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고 ...

결국 회사에 공식적으로 알리고 가해자에 대해서 징계을 내리고 공개 사과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가해자들이 이 여성분을 한밤중에 만나서 한번만 봐달라고 무릎꿇고 애원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자기도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다고...하면서.

그러나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노래방에 함께 있었던 그 가해자의 남자 부하직원들이 더 밉다는 생각을 했다. 상급자의 비상식적인 행위에 대해 방관을 넘어서 적극적인 동조까지... 그리고 "술 먹었으니 니네들이 이해하라"고 충고까지... 세상은 한마디로 요지경 속이다.

나는 요즘 기고만장(?)해 있다. 몇년전의 실수를 만회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하지만 그 호주로 이민간 분은 날 얼마나 원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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