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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자는 입을 다무네

여은정( 1) 2003.04.20 11:23 추천:4

지금 나는 무시무시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그 양반은 스무 살 짜리 아이들이 자신을 갖고 놀았다고 주장하며 나에게 자신의 억울함도 하소연 할 겸 이 일에 대해 정확한 진상을 얘기하러 오겠다고 한다. 말이 얘기하러 오겠다지 말하는 태도는 거의 도끼들고 폭탄 테러 하러 올 기세다.

그러면서 내 이름을 묻는다. 아니 왜 사장님들은 내 이름을 그렇게 궁금해 하는 거야 진짜..."내가 개인적으로 전화한 것도 아니고 분명 노동상담소라고 말했을 텐데요." 하는데도 끝까지 묻는다.

'으, 내가 왜 이런 무덤을 스스로 팠을꼬? 그냥 노동부에 진정해서 법대로 하게 내 버려 둘걸...어쩌자고...일이 귀찮게 됐군.'

내심 후회하면서 이곳 저곳에 전화를 해서 지원군을 모집하지만 딱히 사무실에 같이 있어줄 만한 건장한 남자들을 모을 수가 없다. 언제나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는 늘 혼자다.

한 달치 임금을 못 받아 상담을 왔던 스무 살짜리 여자 애는 사장님이 무서워 도망가고, 나는 이렇게 사장님을 기다리며 그 걸쭉한 사장한테 혹시나 맞아죽지나 않을까 고심하다 마음을 가라앉힐 겸 끄적 거리기 시작한다.

남성 폭력의 기억들.... 몇 가지 영상들이 떠오른다. 기억 속의 폭력적인 남성들의 모습은 대개 이렇다.

자기 욕구가 반영되지 않을 때 보여지는 몇 가지 태도들... 고래 고래 소리 지르기, 게걸스런 욕설, 때려 부수기, 으름장 놓기, 자해하기, 아무나 보이는 대로 패고, 웃퉁 벗고 씩씩대기, 책상 발로 차기. 이런 눈에 보이는 폭력 말고도 남성들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은 말 하나부터, 무심코 자기 편한대로 하는 행동 하나 하나까지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예를 들면 요새 읽은 통신상의 글 중에 "추한 미국여자 아름다운 아랍여자" 라는 글은 다분히 민족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글이다. 읽은 순간 너무 역겨워서 내 입에서 욕이 튀어 나올 만큼.... 멀었다. 멀어도 한참 멀었지.

닥쳐온 위기보다도 앞으로 다가올 위기가 더 무서운 공포 영화의 심리처럼 내 가슴은 조마조마하다. 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29살의 젊은 사장님이 드디어 사무실로 왔다. 그는 일단 인상이 유오성과 비슷하게 생겼다. 얼굴윤곽이 아주 뚜렷하고 좀 마른 듯한 몸에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폼이 어디 강남 갔다 온 제비 같은 인상이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마자 나를 본체만체하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는 그 폼이 너무 웃겨서 갑자기 나는 온 몸의 긴장이 풀린다.

정신 없이 온 듯한 그는 자리에 앉자 마자 어떻게 해서 이 일이 이러코롬 왔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미 다 들어서 아는 얘긴데... 이미 그가 와서 보여줄 여러 가지 폭력의 유형을 상상하던 나는 일단 그의 첫 태도로 보아 그가 내가 보아왔던 폭력적 인간유형 중에서도 목소리만 큰 종류의 사람이라는 낌새를 채고 한 마디 한다.

"차 한 잔 하실래요?" 했더니, 열심히 침 튕겨가며 설명하던 그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는 물이나 한잔 달라고 하면서 담배는 없냐고 묻는다. 담배는 없다고 했더니 자기 차에 담배가 있는데 우산이 없어서 못 갔다 오겠단다. 밖에 있는 우산 쓰고 다녀오라고 했더니 횡 하니 나가서는 담배를 가져온다.

황금빛 노리팅팅한 두꺼운 반지를 낀 그는 볼펜으로 이것 저것 열심히 써가면서 자기가 이 일로 서울 압구정에서 잘 나가던 나이트 일도 그만두고 왔다고 한다. 그 때문에 피해가 막심하다며, 그년들(?) 한테는 절대 돈을 주고 싶지 않다고 한다.

'도대체 이 양반 여기 왜 온 거야?' 속으로 생각하지만 차근 차근 나는 말하기 시작한다. "사장님도 나이트에서 일 하면서 남의 돈 받아봐서 아시잖아요. 어쨌든 나이 어린 사람들이 열심히 한달 가까이 일한 건데 일한 만큼은 주셔 야죠? 그리고 제가 전화를 한 건 노동부에 가면 이것 저것 복잡하고 서로 안 좋으니까 잘 처리해보자는 의미에서 전화드린 거구... 웬만하면 좋게 해결하시지요."

그러나 이 사장님은 영 그럴 맘이 없댄다. 어린 애들한테 자기가 되려 당한 것이 억울하다고 법대로 하겠다고 돈주고 싶은 맘은 눈꼽 만큼도 없고 벌금 물고 말겠다고...

늘 사장들은 이런 식이다. 자기는 잘 하려고 했는데 노동자가 기다려주지 않아서 혹은 자기를 믿지 않아서 괘씸해서 못 준다는 식이다. 어휴, 진짜 내가 열 받아서.... 물론 나이 어린 친구들이 퇴직의사를 여러 번 번복한 것은 잘못했다 치다. 그래도 줄 건 제대로 주고 해야지 말야. 어떻게 그렇게 욕하고 협박하고 지랄이야. 진짜! 개새끼들!

많은 여성들이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사장님, 남편, 직장 상사, 동료 그리고 주변의 수많은 남성들....

누구나 목숨은 하나다. 내 목이 열 개도 아니고 요새는 진짜 남성적 폭력 앞에서 나를 보호할 만한 무기를 가지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 폭력 속에서 나도 점점 폭력적이 되어감을 느낀다.

폭력이란 건 참 이상한 생리를 가지고 있다. 요만큼의 폭력에 대해 반응하는 만큼 점점 내성이 생겨서 더욱 더 폭력의 강도가 세지고 어느 순간 피해자도 가해자도 모두 폭력에 대해 무감각해져 버린다. 폭력적인 말투, 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나도 이제 어디 가서(특히 노동부나 근로복지공단등) 남들에게 그 정도의 폭력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행동한다.

나도 정말 차근 차근 화내지 않고 순리대로 일을 풀어나가고 싶다. 그런데 왜 남성들은 그렇게 소리 소리 지르면서 자기 말만 할까?

어느 날 한 남자 동료가 나에게 말했다. "네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네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 말이 곧이 곧대로 들리지 않을 수 있어. 남자들한테는 그런 심리가 있거든."

그럼 난 입 다물고 있을까? 말은 남자들이 다하고 여자인 나는 입 다물고 밥이나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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