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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사람

편집팀( 1) 2003.04.26 00:21 추천:1

한 소녀가 있다. 자신의 폭력에 못견뎌 집을 나간 엄마가 죽었다고 단정짓는 아버지는 소녀를 데리고 살인사건 현장에 시신확인을 하고, 사람을 찾는 전단지를 뿌리고, 술을 마시며 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일상.

덜 익어 가장 맛이 없는 때의 김치를 일컫는'미친' 김치.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떼를 쓰는 어린아이와 같은 아버지, 집을 나간 어머니, 일상을 관조하듯 받아들이면서도 어느 순간 폭발하고 마는 소녀는 모두 '미친 김치'다. 이런 상황에서 소녀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4회를 맞는 전주국제영화제 중 여성감독들의 영화를 통해 현재의 여성영화를 재조명해보자는 취지로 마련된 '여성영화의 자기발견'이라는 섹션 중 <미친 김치>의 줄거리이다.

영화 속에 펼쳐지는 낯익은 풍경은 군산 월명산이 있는 해망동의 조그만 마을. 전북 출신의 강지이 감독은 낯익은 주변의 거리를 아름다우면서도 낯설게 재조명한다.

"국제영화제에서 여관도 잡아줬지만 어제는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는 엄마랑 함께 고사리를 뜯다가 상영장에 왔어요"

단편영화 네편의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까지 끝나니 어느덧 오후 4시. 허기도 떼울 겸 영화의 거리 근처 빵집에서 만난 강지이 감독이 설명해준 아침 일정이다.


엄마의 일생을 영화로 그리고 싶은 '미운' 딸


까만 머리에 유행을 타지 않는 선글라스, 후즐근한 점퍼를 입은 강지이 씨. 앳되어 보이는 외모 때문인지 언뜻 보면 국제영화제 자원활동가로 보이지만, 벌써 다섯편의 작품을 만들고 작년 전북여성영화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초급(!) 베테랑.

강지이 감독은 전주 출신으로 전북대 사범대를 졸업한 후 영화의 꿈을 쫓기 위해 집에는 임용고시를 준비한다고 숨기고 독립영화협회 워크샵에서 영화를 배웠다.영화제작과 배움에 필요한 돈을 벌기위해 중간에 잠시 임시직으로 도덕교사 생활을 하다가 늦깍이로 한국영상원에 들어갔다. 영상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게된 후 그제사 집에 "영화를 하고 싶다"고 떳떳히 얘기할 수 있었다고.

"작년 <원하는 대로> 영화를 찍을 때도 그렇고, 이번 <미친 김치> 엄마가 밥을 지어와 스탭들을 먹여 살렸어요. 말로 표현하시지는 않지만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지요"

어머니와의 강한 유대감인지 약 한시간 정도의 대화에서 강지이 감독은 어머니 이야기를 많이 꺼냈다.

"영화인이 되면서 가진 바램 하나도 엄마의 일대기를 영화로 찍고 싶다는 거였어요. 엄마한테 그 얘기를 했는데 '쓰잘데기 없는 짓 하려고 하네'라는 소리를 들었지요"

어찌됐건 강지이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어머니의 이야기를 약간은 담은 셈이다. '미친 김치'은 전라도에서 많이 쓰는 표현으로 엄마가 말했던 단어를 착상해 영화의 주제로 녹여냈으니 말이다.


<미친김치>는 '미성숙한 어른'이 돼가는 소녀의 이야기


▲강지이 감독의 작품 <미친 김치>

주제는 자연스레 작품에 대한 이러저러한 얘기로 넘어갔다. 19분 분량의 짧은 작품에 상징적인 표현들이 많이 들어가서인지 극중 장면에 대한 이러저러한 해석이 오갔다.

질문 : 작품 중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가 어느 순간 떼쓰는 어린아이가 되고, 그 어린아이를 부둥켜안는 장면이 있는데 그건 모성으로써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도 감싸안는 것인가요?

"그건 좀 달라요. 제가 생각했던 것은 소녀가 나이든 어른, 권력을 가진 남자이지만 그 본성에 담긴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을 직시하게 되는 거예요.
영화를 찍기 위해 가정에서 폭력을 당한 청소년들을 만나봤는데 습관화된 폭력에 '그래 니가 어디까지 때리나 보자'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얘기를 듣고 보니 모성애처럼 비쳐질 수도 있겠는데, 폭력까지 용인하고 감싸안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감독의 얘기를 들어보니, 여성영화라는 섹션 주제에 얽메인 나머지 '모성애'를 도식처럼 갖다 붙이는 과도한 해석을 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미친김치>는 올해 한국영상원 졸업영상제에 낸 작품인데, 국제영화제 측에서 상영하고 싶다고 해서 작품을 냈고 여성영화 섹션에 들어간 줄은 프로그램이 확정 발표되기 전까지 몰랐어요. 그냥 여성감독의 이야기를 한 곳에 담아내고 싶었나보다고 좋게 생각하고 있지요."

그렇게 여성영화의 정체성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작품이 재단되지 않을까 우려의 이야기도 오고 갔다.

질문 : 마지막에 소녀가 집을 뛰쳐나와 터널에서 주저앉아 웁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터널에 주저 앉는 장면은 절망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해 어쩔 줄 모르는 소녀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거예요. 그러나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듭니다. 절망에 지지 않고 뚫고 나가려는 새로운 희망같은 거죠."



절망에 '고개 숙이지' 않고...


강지이 감독은 현재 그 소녀와 같은 위치일지도 모른다. 영상원을 졸업하고 국제영화제에도 작품을 냈고, 얼마전 한 제작사 스탭으로 들어가 대형영화(!) 한편을 만들 예정이었지만 영화 계획이 취소되는 바람에 일시적인(!) 백수가 된 신세. 다시 '기간제 교사'라도 해야하는 건 아닌지 먹고 살 궁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현실은 척박하지만, 그래도 강지이 감독의 눈은 영화에 대한 꿈으로 반짝거린다.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여성으로 태어나고 자라면서 형성된 감수성이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놓치지 말자! '여성영화의 자기발견'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장 풍경

여성들이 만들고, 여성이 주인공이며, 여성들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여성의 화법으로 풀어낸다는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에 여성영화로 불리고 있는 것일까.

2003년 현재를 여성감독들의 눈을 통해 재조명해보는 '여성영화의 자기발견' 섹션. 26일에 이어 29일에도 감독과의 대화시간과 함께 다시 한번 상영된다.

이 섹션에서는 '미친 김치'외에도 어른이 되는 방법을 고민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레슨(신은영,2002)',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한 노처녀의 이야기를 감독의 개인적 경험을 반영해 유머러스하게 구성한 '여름이야기(안주영,2003)', 주부가 한밤중까지 시부모님의 제사상을 준비하지만 가족으로부터는 배제돼있는 상황을 위트있게 묘사한 '이효종씨 가족의 저녁식사(정희성, 2003)'라는 작품들도 관객들의 커다란 호응을 얻으며 26일 상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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