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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생활] 내 오래된 등산화

여은정( 1) 2003.04.08 15:53 추천:1

오랜만에 전주 집에 들러 형부와 언니, 동생과 함께 봄나들이를 하러 금산사에 갔다.

봄이라지만 아직 꽃도 안 피고 나뭇잎도 파릇하지 않아 뭐하나 볼 게 없다. 볼게 있다면 따듯한 봄기운을 맞으러 나온 울긋불긋한 사람들의 행렬이다. 임신 6개월 째 접어든 언니는 집밖에 나와 이렇게 소란스러운 사람들 속에서 활기 넘치는 풍경이 좋다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고 말한다.

그나마 산책할 만한 코스는 금산사로 가는 입구지만 입장료가 너무 비싸 그저 엿장수 아저씨의 신나는 엿가락 소리만 듣고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몇 장 찍는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모악산도 안 오르고 가면 너무 심심하다며 나는 산을 오르겠다고 말하고 혼자 입장료를 끊어 산에 오르기로 한다.

산만 오르는데 문화재 관람료를 내고

여전히 입장료는 비싸다. 문화재 관람료 1800원과 도립공원 관리비 명목 800원. "절 구경은 안하고 모악산만 오를 건데 문화재 관람료도 내야 하나요?" 라고 물었더니 아직 분리징수가 안 된다며 2600원을 다 내야 한다고 매표소 직원이 말한다.

'에이 열 받아. 늘 이런 식이라니까, 서민들 돈 여기서 축내고 저기서 축내고, 어차피 국가에서 관리하는 건데 무슨 놈의 입장료가 이렇게 비싼 거야' 라며 궁시렁 거리며 산을 오른다. 조금 늦은 시간이라 산을 오르는 사람은 없고 다 내려오는 사람뿐이다.

작년 11월 느즈막히 모악산을 올랐다가 길을 잃고 헤매 인 뒤 이 산을 오르는 건 올해 들어 처음 인 것 같다. 그때 겁 없이 혼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컴컴해져서 약수터 길이 아닌 이상한 길로 접어들어 갑자기 길이 없어져 한참 헤맨 적이 있다.

길을 잃었을 때 사실 첨에는 안 무서웠다. 어디선가 본대로 길을 잃으면 무조건 밑으로 내려가면 어디든 길이 나온다 길래 무조건 밑으로 내려갔다가 아무리 해도 길이 나오지 않아

'아 이러다 죽지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희망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여기서 이렇게 죽을 목숨은 아니라는 어떤 예감 같은 거였다.'

모악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기억

어쨌거나 이렇게 헤매다가는 밤새도록 산을 벗어날 수가 없을 것 같아 다시 정상으로 올라가기로 마음을 먹고 그 빽빽한 나무와 바위 더미 위를 기어서 처음 길을 잃은 곳으로 되돌아 갔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숲, 내가 움직일 때 마다 나무와 부딪치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없다. 이럴 때 누군가라도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뭐 이 숲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여기고 포기하고 걷기 시작했다. 정상의 송신소에 가서 길을 잃고 날이 어두워 졌으니 재워 달래야지 하고 올라가는데 약수터 근처 절에서 나오는 빛이 보인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정신없이 약수터 근처 수왕사로 내려가 "아무도 안 계세요?" 라며 큰 소리로 부르지만 불 켜진 절은 고요하고 아무 인기척이 없다. '어디 화장실에라도 가셨나?' 생각하다 그냥 마루 끝에 걸쳐 앉아 사람을 기다린다.

두런두런 남자들의 말소리가 산 전체에 쩌렁 쩌렁 들린다. 나는 마루에서 벌떡 일어나 약수터로 달려가 큰소리로 '혹시 밑으로 내려가세요?' 했더니 나보다도 얘기에 정신이 팔려있던 남자 셋이 더 놀라는 눈치다.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나 때문에 간 떨어질 뻔 했단다.

내가 손전등이 없어 내려갈 수가 없으니 같이 가자고 했더니 그러자며 아가씨 혼자서 왜 겁도 없이 산에 다니냐며 한마디씩 하신다.

아저씨들과 산을 내려오며

모두들 군산에 살고 있고 건설 일을 하는데(한 사람은 포크레인 기사고 나머지는 건설현장사무소 직원이라고 함) 이렇게 셋이 일이 없을 때 아무 시간에나 산에 종종 오른단다. "네, 그렇군요." 고분 고분! 아저씨들이 정신없이 걷고 있는 나에게 이것 저것 물어와 대답하랴 어두운데 발 헛딛지 않으려고 조심하랴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게 아니다.

아저씨들 중에 한 사람은 서른 아홉 살의 노총각인데 이렇게 아가씨랑 만난 것도 인연이라며 명함을 건넨다. 그러면서 언제 시간 나면 같이 산에 오르자고 한다. "뭐 나도 산에 가는 거 좋아하고 친구들하고 겨울 지리산 가기로 했으니까 언제 시간이 되면 함께 올라도 좋겠네요." 흔쾌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그러자고 대꾸한다.

거의 다 내려올 즈음 주로 나에게 불빛을 비춰주던 아저씨가 등산장비를 잘 갖춰야 한다며 나에게 자신의 장비가 총 300만원 어치라고 자랑하듯 말한다. 등산가서 조난 당하지 않으려면 등산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산을 올라야 한다고, 이렇게 아가씨처럼 아무 준비 없이 오르다가 사고 당하기 십상이라고....

아저씨의 걱정보다도 300만원이라는 말에 갑자기 이 아저씨가 다르게 보인다. 산을 오르는 것이 단순히 산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쩜 자기 과시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물론 산을 오를 때 등산장비가 있으면 편하다. 하지만 그렇게 비싼 등산장비를 갖추고 산을 올라야만 한다면 나는 차라리 집에서 돈 안 들게 낮잠을 자겠다.

비싼 등산장비보다 듬직한 내 낡은 등산화

내 등산장비는 아주 오래된 등산화(고모로부터 물려받은 아마도 그 수명이 20년은 됐음직한)와 대학 1학년 때부터 쓰던 35 짜리 배낭, 그리고 언젠가 학교 MT가서 주워온 침낭, 그리고 자질 구레한 몇 가지 것 들 뿐이다.

물론 나도 산 오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욕심이 생긴다. 등산을 할 때 좀 더 가볍고 좀 더 따뜻하고 튼튼한 것을 가지고 싶다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이 상품화 되는 세계에서 이제 제대로 등산장비를 갖추지 않는다면 등산 할 꿈도 꾸지 말라는 건 자본의 논리가 아닐까?

지난 번 겨우내 얼어 있던 오래된 등산화를 신고 지리산을 오르면서 눈이 그대로 닿아 물이 질척한 등산화를 보며 이제 등산화를 하나 새로 사야겠구나 다짐을 했지만 나는 아직 등산화를 사지 못했다.

왠지 등산화를 다시 사면 그 오래된 등산화를 다시는 신지 않을 것만 같아서, 어쩐지 나도 자본주의의 논리대로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자책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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