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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상 위에 놓인 조그만 액자 속에 세 사람이 환하게 웃고 있다.
97년 말인가 98년 초인가 임실 필봉으로 풍물 전수를 갔을 때 97학번 동아리 후배 두 명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쇠를 쳤던 통통한 수진이가 우리 뒤에서 카메라를 의식하며 한 팔을 힘껏 젖히고 있고 미숙이와 나는 각각 자신만의 특유한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다. 미숙이는 언제나 그렇듯 한 팔로 자신의 턱을 탁하고 괘고 있고 나는 그런 미숙이를 꽉 붙잡고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사진은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 사진 속의 촌스러운 머리 스타일과 아주 낡아서 이미 버려 버린 옷들이 시간이 지났음을 말해준다.

액자에 까지 끼워 둔 이 사진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근데 이렇게 액자에 끼워져 오래도록 내 곁에 있는 건 학생회 있을 때 누군가 이렇게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사진 속의 나는 웃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내 표정 속에는 지쳐있는 기색이 완연하다. 97년 총학생회 활동을 하면서부터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총학생회 기획·총무라는 말도 안 되는 직책에 알맞게 내가 늘 하는 것은 빵구 난 돈 메꾸기, 가짜 영수증 만들기, 어용 대의원과 맞장 뜰 준비하고 학생회비 분배에 관한 논의하기 ...그리고 우리를 못살게 굴던 학교 당국과의 신경전, 어용 대의원들의 말꼬리 물기 감사에 대비하기 등이었다.

그 때 나에게 유일한 위안은 도서관 앞 커피자판기에서 커피를 빼서 천천히 학교를 한 바퀴 돌며 커피를 마시는 일과 어쩌다 가는 동아리방의 풍물소리였다.

우울하거나 일이 안 풀리는 날이면 학생회에서 내려와 어두침침한 동아리방에 들어가 혼자 장구를 두드리거나 제대로 치지도 못하는 쇠를 잡고는 아주 시끄럽게 풍물을 쳐대곤 했다.

그렇게 배운 풍물 탓인지 나는 내 소리가 타인과 섞이지 못하고 떠도는 것이 그리 낯설지 만은 않다.

지금은 변해버린 낡은 사진 속의 친구들

사진 속의 통통했던 수진이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말라서 해골처럼 보이는 새로운 수진이, 더 이상 '해벌레' 라고 불리어 질 수 없는 그전처럼 웃음이 많은 수진이가 아니라 방울토마토, 뻥튀기만 죽어라 먹는, 한 가지 음식만 먹는 이상야릇한 존재의 수진이만 존재한다.

그녀는 3년 간의 계획적인 다이어트로 거의 1년에 10킬로씩 30여킬로를 뺐다고 한다. 더 이상 힘차게 쇠를 치지도 헤벌레하게 웃으며 새로운 율동을 개발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주지도 않았다. 여느 여학생들과 다름없이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스트레이트해 길게 늘어뜨렸다.

그런 모습의 수진이는 낯설었고 그 뒤부터는 동아리방에서 볼 일이 없었으므로 수진이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꽤 회의적이던 미숙이 또한 이제는 잘 볼 수 없다. 졸업 후 어느 날 만난 동아리 후배로부터 미숙이가 수녀 한다고 수도원인가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숙이는 고 3때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상당히 방황했었다고 했다. 언젠가 술도 잘 못 마시는 애가 몽땅 마시고 와서는 동아리방에서 그대로 누운 채로 토해서 기도가 막힐 뻔한 적이 있어 상당히 걱정이 되던 과 후배이기도 했던 친구.

그 친구의 격정적 성격에 수녀가 된다는 건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몇 년째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아직 잘 버티고 있나 보다.

사람한테는 자기 운명의 길이 있는 걸까?

내게 '인간'을 경계하도록 만든 그 사건

그 때 나는 전수를 가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총학생회 자체 행사로 지역 선전학교가 있었고 교수채용 비리 척결과 등록금 투쟁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답답한 학생회실과 학교의 어두침침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냥 아무렇게나 뭔가를 실컷 두드리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뭔가를 두들겨 패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늘 돈이 되나 안되나 보다가 별로 인기가 없으면 과 하나를 그냥 없애버리고 신설과를 만드는 학교 당국의 돈 타령에 대항에 싸우기에도 질려 버렸고 어지간히 후배들을 들볶아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파렴치한 선배님들(선배가 맞나?) 때문에 인간에 대한 정이 팍팍 떨어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추운 겨울 전수를 다녀오고 난 후 바로 그 일이 있었다.

학교에서 교수채용 비리 척결투쟁을 같이 하던 후배 녀석이 자기 몸에 신나를 끼얹고 항의하러 갔다가 난로에서 불이 옮겨 붙어 학생과에서 불이 난 사건!

그 끔찍했던 사건으로 후배는 방화 혐의로 구속되어 3개월간 형을 살았고 나를 포함한 학생회 간부들은 모두 더욱 피폐해져 갔다.

그 사건이 있은 후 나는 아주 조금 세상에 대해 알게 됐다. 세상에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도 버젓이 얼굴 들며 너무나 잘 살고 있는 인간들이 있음을...

그들은 잊었을지 몰라도 나는 잊지 않는다.

너무나 태연히 거짓말을 하는 그 인간들의 혀를! 공청회랍시고 열린 강당에서 학생과 직원들의 너무나 자연스런 거짓말에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울어버렸던 나를...

그렇게 힘들었던 시기가 지나고 후배도 나오고 불이 났던 학생과 건물도 새로 칠하고 나와 학생회 간부들에게 내려졌던 징계도 철회됐지만 나는 이제 과거의 내가 아니었다.

나는 세상을, 사람을 믿지 않는다. 이제 경계하라. 모든 인간을!

그것이 내 삶의 아주 조그만 상처였다고 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내 삶의 한가운데 큰 함정이었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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