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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강하게 다가와 플레이어에 자주 올려놓을 수 없는 노래들이 있다. 석달에 한 번 꼴로 방송을 하는데도 왠지 자주 전파를 탄듯한 느낌, 왠지 들려준 노래 또 들려주는 듯한 인상을 줘 게으른 DJ라는 소릴 듣게 만들고야 마는 노래들.

메르세데스 소사 (Mercedes Sosa)의 노래들이 그렇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의 가슴과 목청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음원들이 그렇다.

* la arenosa


지난 번 그녀가 노래를 선택하게 된 계기를 언급했다. 이야기를 잇는다.

1935년 아르헨티나 북부의 투쿠만에서 태어난 메르세데스 소사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주최한 아마추어 가수 콘테스트를 통해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그녀는 성장하면서 아타후알파 유빵뀌라든지 비올레따 빠라 등 누에바 깐시온 가수들의 음악을 자연스럽게 접했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누에바 깐시온, 이른 바 새로운 노래운동은 1950년부터 1960년대 사이 아르헨티나와 칠레, 우르과이 등지에서 일기 시작했는데, 점차 독재와 반개혁으로 치달아 가는 남미의 사회적 현실은 그들의 노래를 사회 참여의 한 방법으로 이끌었고, 결국 ‘누에바 깐시온’은 점차로 저항과 선동의 경향을 표명하기에 이른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노동자 옹호 정책을 고수한 페론 대통령 덕분에 누에바 깐시온 운동이 비교적 쉽고 빠르게 대중 속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 어느 지역보다 민속음악을 중시하는 본래의 성격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1974년 페론이 사망한 뒤 1976년 초 쿠테타를 거쳐 정권이 군부로 넘어가면서 여느 남미 국가와 마찬가지로 대규모의 정치·사회적인 탄압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결국 아르헨티나의 누에바 깐시온도 반독재와 저항의 노래로 자리를 잡는다.

정치적인 현실들이 아르헨티나를 뒤덮어 버리자 그녀는 선배들이 그랬듯 민주주의와 인권을 노래한다. 소사가 부드럽고 깊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들은 듣는 이로 하여금 더욱 절실한 희망과 저항의 의지를 느끼게 했고 정부는 그만큼 두려움을 느꼈다. 급기야 1975년 소사는 콘서트홀에서 노래를 부르던 도중 체포당했고 모든 음악적 활동을 금지당한다.

군중으로부터 단절된 그녀는 칠레의 빅토르 하라가 그랬던 것처럼 정부로부터 내내 살해 위협에 시달렸으며 1978년에는 사랑하던 남편까지 사망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소사는 망명을 결심하게 되는데,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모든 익숙한 것으로부터 강제로 단절된 채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떠난다. 이 시기 군사 정부에 의해 추방된 여러 남미 가수들이 그러했듯, 망명 생활은 오히려 그녀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날릴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된다.

탄탄한 음악적 소양과 재질을 모두 갖추고 있었던 그녀는 해리 벨라폰테·존 바에즈 등과 더불어 조국 아르헨티나의 독재에 맞서 활발한 반정부 활동을 펼쳤고, 특히 군부 독재 기간 중 발생한 만여 명의 실종 사건을 뜻하는 ‘더러운 전쟁’을 전 세계에 고발하는 데 앞장섰다.

1982년 말비나스 섬(포클랜드)을 두고 영국과 격전을 벌인 아르헨티나 군부는 패배와 더불어 쇠락의 길로 들어선다. 때를 맞추어 소사는 주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체포와 처형의 위협을 무릅쓰고 귀국한다. 군부의 금지 경고를 무시하고 감행한 소사의 귀국 콘서트엔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어 열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공연은 ‘en Argentina’라는 라이브 앨범으로 발매돼 당시의 감격적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결국 군부는 무대에 선, 민중 앞에 선 소사를 조금도 건드리지 못했고 결국 소사의 노래에 굴복하고 만다.

그 남미 민중의 어머니, 메르세데스 소사가 올 9월 4일과 5일 이틀간 내한공연을 가진다. ‘en Argentina’의 감동이 재현될 지는 모르겠으나, 긴 드레스자락을 움켜쥐고 노래하는 거인의 모습을 기대해 보게 된다.


- 박지원 원음방송 팝스갤러리(FM97.9MHZ 밤 12시~2시) PD
- 이 글은 노동자의 집 소식지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에도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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