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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사학 민주화의 불꽃 피우는 이 사람

김상정( 1) 2003.03.19 22:00 추천:12

전주 종합 경기장 사거리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하얀색 건물. 그 곳의 정문에는 교육현안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구호가 항상 걸려 있다.

그 건물의 2층 사무실. 들어서자 마자 만나게 되는 사람. 그분의 익살스런 재담에 시원한 웃음을 지어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전교조 전북지부죠." "사무처장님 좀 바꿔주세요."
"엥, 우리 사무처장 바꾸면 안되는디 큰일 나는디..우리 일 어떻게 하라고 사무처장님을 바꾸시라고 합니까? "

처음 전화를 해 본 사람이면 깜짝 놀랄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그 놀라움마저도 일시에 사그러 들게 하는 재치가 있어 순식간에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분이다. 그 분은 바로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사무실의 살림을 꾸려가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북지부의 복지국장 김재경 선생님이다.

지금도 전교조 전북지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우리는 그가 사무실에 처음 온 날을 9.11 사태 3일 전으로 기억한다.

기나긴 투쟁의 여로로 인해 지쳐있을 법도 한데 그 날 우리가 맞이한 김재경 선생님은 사무실의 수많은 업무에 눌려 자칫 타성에 젖어버릴 수도 있었던 우리들에게 되려 큰 활력소가 된다.

유머를 잃지 않는 싸움꾼

99년부터 시작된 싸움!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을리요. 그 싸움은 그만큼 숱한 과정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재단의 온갖 횡포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싸워왔던 김재경 선생님. 어찌 이 한정된 지면 위에 그 모습을 족히 기록할 수 있겠는가.

김재경 선생님이 사무실로 오자마자 터진 자립형사립고 투쟁 및 성과급 반납투쟁! 단 1% 오차도 없이 5천여 명의 성과급을 받고 반납하는 일을 혼자 도맡아 처리하고 교육청 밤샘철야농성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함께 했던 선생님!

힘든 철야농성 중에도 김재경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한다.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쌈이 나. 내가 쌈을 몰고 다니거든....."
그 분이 던진 농담 한마디에 농성장이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된다.

3년 만에 받은 해임무효 판결

그런 선생님이 그제는 이 땅의 사학민주화에 초석이 될 역사적인 판결을 받았다.

19일 오전 10시 대전고등법원 314호 법정에서는 원고(고희숙, 김대식, 김재경, 이은미)에게 한 전보처분 및 해임처분이 무효임을 확인한 홍성지방법원의 1심 판결에 불복한 피고(학교법인 이상장 김옥선)의 항소를 기각했다.

피고가 상고할 경우 이 사건은 대법원으로 가게 된다. 15일 후까지 그 긴 시간동안 또 다시 환하게 웃으며 법정 싸움을 준비해 나가고 있는 그에게 힘찬 연대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다시 학교현장에서 열심히 합창단을 지도하며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멋진 테너가수가 되어 가곡 한 곡 뽑아내는 그 모습을 그리며 이 글을 마친다.



그의 투쟁일지는 시간만큼 길다. 굵직굵직한 사안들을 요약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김재경 선생님의 인터넷상의 이름은 '화려한 등장이다. 그 이름에 걸맞게 전교조 전북지부에의 등장을 전후로 하여 그 분의 이력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정의여중고 재직 당시
온국민이 올림픽의 열기로 들떠 있었던 때,

1988년 9월 13일, 충남 서천에 있는 정의여중고 학생들은 학교를 파행적으로 운영하는 이사장에게 열악한 교육환경 개선과 재단의 비리 척결을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한다. 35일동안 지속된 이 농성은 국정감사 현장에서 임시이사 파견을 결정하고 같은 해, 10월 25일 임시이사가 파견되어 학교교실 건축 및 인사위원회를 통한 신규교사 채용 등 학교는 투명하고 안정되게 운영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91년 4월 2일 김옥선 이사장이 취임된다. 99년 8월 교사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재단의 횡포는 극에 달하고 채용과 인사를 이유로 금품을 요구하는 일을 당연시하게 된다.

재단이사장의 횡포와 비민주적인 운영에 학교를 정상화시키고자 1999년 9월 교사 43중 32명이 전교조에 가입을 하게 되고 김옥선 이사장은 재단의 횡포에 대항하는 전교조 교사들의 학내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하여 강제 전보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재단의 비리척결 및 사학민주화 투쟁 항의 집회가 시작되게 된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학민주화 투쟁, 정의여중고 싸움!

김옥선 이사장은 이에 대항에 30명 파면, 1명 해임. 1명 정직으로 맞선다. 그간 내재되어 있는 학교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민주적 임시이사 파견을 요구하며 들어선 도교육청 농성, 결국 교육감은 합의서를 작성하여 농성을 접게 하고 재단과 이중합의서를 작성하여 학교로 정상출근하는 교사들에게 수업과 업무를 주지 않는 등 이중의 고통을 주게 된다.

그 후 징계위원회가 개최되어 교사들을 파면 및 직위해제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 항의하여 학생들은 농성에 돌입하게 되고 2000년 5월 11일 급기야는 등교거부를 결의하게 된다.

이에 학부모들은 도교육청을 방문하여 임시이사 파견을 요구하고 일주일 후, 전교조 교사들은 도교육청 무기한 항의 농성에 돌입하게 된다. 교육청과의 합의문 작성으로 8월 17일 농성이 철수하면서 학교로 정상출근하게 되지만 재단은 똑같이 수업 및 업무를 주지 않고 재징계 절차를 실행하게 된다.

계속해서 날라오는 해임통보서, 계속해서 제출되는 재심청구서. 그러고 징계위원회에서 날라오는 출석통지서, 2001년 2월 27일 일부교사들은 공립특채가 되고 28일에는 정의여중이 폐교된다.

2002년 3월 1일자로 전교조 교사 12명이 송죽학원이사장 김옥선으로부터 일방적인 직권휴직을 통보받는다. 과원과 폐교로 인하여 8명은 공립특채가 되고, 4명은 직권휴직 상태로 남는다.

전교조 희생자구제심의위원회에서 희생자로 규정된 그들은 전교조 지부에서 상근를 하며 복직투쟁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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