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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경제 돈벌이에 실종된 공공의료

김보리( 1) 2003.07.06 14:22 추천:1

도내 3차 진료기관으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해온 전북대병원이 공공의료를 등한시하고 돈벌이에만 치중하는 새로운 관리시스템인 ERP시스템(Enterprise Resource Planning의 약자로 우리말로 '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을 도입하여 논란이 일고 있다.

전북대병원 노동조합(지부장 최영란)은 ERP시스템이 환자를 돈벌이 대상으로 만들고 노동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감시카메라 역할을 할 것이 우려된다며 시스템 시행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오는 16일 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환자 건강보다는 '이윤'에만 관심

전북대병원(원장 양두현)은 재무관리와 의료정보관리, 원가관리(재료원가), 성과관리(수익성과) 등 병원운영전반에 관한 정보를 통합 데이터베이스화해서 실시간 이를 체크할 수 있는 ERP시스템을 도입하여 시행을 앞두고 있다. 12억원의 예산이 들어간 이 시스템이 지난 2001년부터 준비되는 동안 병원 측은 노동조합에 이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전북대병원 노조 최영란 지부장
노동조합은 먼저 생산량과 수익성을 올리는데 그 목적이 있는 이 시스템이 제조업계도 아닌 병원에 맞는가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국립대병원은 3차 의료기관으로서 수익보다는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우선해야하는 비영리법인이다. 이 시스템이 도입되면 병원 전체 구성원이 환자의 건강보다는 목표한 수익을 내기 위해서만 온 신경을 써야하는 상황이 온다는 것이다.

특히 원가관리(ABM) 영역과 성과관리(ESC) 영역에서 이러한 문제는 두드러진다고 노동조합의 최영란 지부장은 설명한다.

"ERP시스템은 부서별, 과별, 의사별로 수익을 얼마나 내는지, 원가를 얼마나 쓰는 지를 실시간 체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때문에 이 시스템이 도입되면 의사들로 하여금 비용은 최대한 적게 쓰고 수익은 최대한으로 내기 위해 과잉진료와 과잉처방을 낳게 할 것이고 간호사들에겐 재료비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1회용 주사도 재활용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지적한다.


부서별로 설치된 '목표달성 신호등'

또한 "성과관리 영역을 보면 부서별, 과별로 수익목표를 설정해놓고 목표치에 90%를 달성하면 노란불이, 못미치면 빨간불이, 100%를 달성하면 초록불이 들어오게 하고 이를 관리자들이 항상 체크할 수 있게 되어 있다"며 "이는 병원이 환자들을 돈벌이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덧붙인다.

실제로 ERP시스템중 원가분석 영역만을 도입한 경희의료원의 경우, △병상가동률을 높이기 위해 다른과 환자라도 환자를 받아 일곱 개의 과가 같은 병동에 섞여 있는가하면 △병상가동률이 낮다는 이유로 소아암 백혈병 병동을 축소하고 △인건비도 원가로 판단된다며 고경력자일수록 생리휴가를 반납하거나 월차를 사용하는가 하면 △중환자실에 입원한 환자들을 머무르는 재원일수를 짧게 하여 중환자실에서 받아야 할 처치, 검사 등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조금만 호전되면 일반병동에 보내지는 사례가 있었다. 이는 최 지부장의 우려가 그대로 현실로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동자들에게 이 시스템이 노동감시와 통제수단으로 활용될 것은 물론 고용불안으로 이어질 것도 우려스러운 것의 하나다.

최 지부장은 "재료비와 장비 외에 가장 큰 비용이 드는 곳이 인건비인데 비용을 감소하기 위해 비정규직 확산으로 나아갈 것"이며 "부서이동시 각 부서들은 원가절감을 위해 고임금 고경력 노동자를 받지 않으려 하는 현상마저 생길 것"이라고 우려한다.


ERP시스템, 보이지 않는 감시카메라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란?

ERP는 Enterprise Resource Planning의 약자로서 영업, 생산, 구매, 자재, 회계, 인사 등회사 내 모든 업무를 정보기술을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통합정보시스템이다. 쉽게 말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영업사원에서 현장생산 상황까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하여 어디서 언제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를 즉각 알고 조치할 수 있는 통합정보시스템(고기능성 기업용 소프트웨어)이다.
하지만, 세계의 노동자들이 ERP을 Early Retired Person라고 하는데, 이를 풀어 해석하면, ERP가 결국에는 '조기퇴직자'를 양산시키는 시스템으로 작동한다는 뜻으로, 사무직에게는 서류작성 등 업무가 줄고 그에 따른 인원정리가 뒤따르는 등 컴퓨터 시스템이 사람을 대신함으로써 고용조정을 하는 무기가 된다.

이 시스템 설치를 맡은 미국계 다국적기업 오라클 측은 지난 1월 전북대병원 노동자들 개개인의 신상과 실시간 활동시간을 조사한 바 있다. ERP시스템의 한 부분인 통합정보관리(EDW) 영역에 의하면 환자 진료내역을 정보화하는 것부터 노동자 개개인의 근무태도, 근무시간, 사생활 정보(상벌, 학력, 교육, 경력 등) 등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 바로 이를 위한 작업으로 보인다.

최 지부장은 "통합정보관리 시스템은 의사들과 노동자들을 분석하여 생산성과 수익성의 기준으로 서열화 할 것이며 이러한 감시통제는 실제로 병원 곳곳에 보이지 않는 감시카메라가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강조한다.

전북대병원의 이러한 ERP시스템 도입은 국립대병원 중에서도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전국보건의료노동조합 8개 국립대병원 지부장들은 8일 전북대병원을 방문하여 ERP시스템 시행을 철회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이러한 지적들에 대해 전북대병원 기획예산과장 김병진 씨는 "ERP시스템 자체가 '저비용 고효율'을 목표로 개발된 프로그램이라 수익성에 초점을 둔 사실은 부정할 순 없다. 다만 통합된 데이터를 어떻게 쓸거냐는 노사가 합의해서 만들어갈 과제라고 본다"고 답했다. 또한 "공공의료에 대한 얘기는 참여정부 들어서부터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고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얘긴 없었다"고 말해 전북대병원이 비영리법인 국립대병원으로서 의료의 공공성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줬다.

소외계층과 환자의 건강에 더 신경 써야할 국립대병원이 첨단통제시스템을 동원하여 돈벌이에 혈안이 된 현실에서 전라북도에서 가장 크지만 가장 비싼 병원으로만 인식돼있는 전북대병원의 공공의료에 대한 일천한 의식이 아쉽기만 하다.


- 주간인권신문 [평화와인권] 3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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