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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지방 '출향'과 '출신'의 정치-사회학

정읍통문( 1) 2005.06.13 09:33

최근 전봉준장군 피체지 비문 논란을 지켜보며 필자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얼마전 시내 현수막게시대에 걸린 시내 모중학교 동문회 이름으로 걸린 ‘김00 차관’ 축하 현수막이었다.

차관 뿐 아니다, 마을 입구에 사법고시 합격 현수막이 걸린 것이야 애교로 봐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군장교가 별을 달고 관료들이 정부부처의 장이 될 때마다 지역신문과 현수막 게시대에 휘날리는 ‘출신’의 깃발을 보는 마음은 간단치 않다.

더욱이 '출향(出鄕)'과 '출신(出身)' 사이의 간격, 그 천양지차의 거리를 생각하면 착잡하기까기 하다.

출향, 고향에서 내쫓겨 사회적 망자가 된 민초들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이다. 오늘날 한 해에만도 기천명씩 인구가 줄어드는 정읍의 현실도 마찬가지이지만, 110여년전 고향을 떠나 각처를 떠돌던 그이들도 오갈 데 없는 사회적 망자였다는 점에서 더욱 가슴 아프다.

그이들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가난에 떠밀려 대처로 나가야 했고, 빚더미에 눌려 도망치듯 한밤중 보따리를 싸야했다. 지주들의 파렴치한 착취와 탐관오리의 핍박은 그이들을 고향으로부터 내쫓았다. 동학농민군들은 오죽 했을까.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고 또 수십만명이 고향에서 내쫓겨 지리산 깊은 골로, 함경도로 평안도 떠나야 했다.

지난 수십년간 돌격대식 근대화의 과정에서 나타난 이농-탈농도 어쩌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 돈을 벌기 위해, 직장을 구하기 위해, 혹은 농사빚으로부터의 탈출하기 위해 고향을 떠난다. 더 나은 교육 때문에 대도시로 나가는 것도 ‘사회학적 병리현상’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맥락으로 볼 수도 있다.

요컨대 ‘출향’은 사회적 아픔의 표현이요. 그 아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출신, 분할 지배/복종의 정치학

하지만 '출신'의 논리는 판이하게 다르다. 00지역출신, 00계급출신, 00학교출신, 00조직(정파)출신은 지역주의와 연고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와 연결된다. 하물며 ‘김경천’과 같은 악명(惡名?)이나 오명(汚名)인 경우에도 그것이 사람들의 입에 오를 때에는 어김없이 이면에 정치적 복선이 깔려있다.

예의 현수막과 지역신문의 ‘출신들’, 특히 관료들이나 ‘남성(마초적 권력지향성에 대한 지적 때문일 것)’들의 경우 정치적 행보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출신’의 깃발에는 휘날리는 높이만 있을 뿐 처음부터 가치판단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이력이나 성품, 세계관과 관계없이 00출신이면 무조건 인정되고 이해되고 ‘우리’의 울타리 안에 수용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00출신이 아니면, 호남 사는 필자의 입장에서 그가 경상도 ‘출신’이라면, 그의 존재는 정치적으로 재해석되고 ‘우리’로부터 배제된다.

바로 그것, '분할지배/분할복종'의 정치학이다. 적어도 민초들에게는 그렇다. 민초들의 출신과 사대부-반가의 출신은 그 차원이 다르다. 아니 어쩌면 출신은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의 것일뿐, 그것이 오랜 삶의 터전이 아닌 한 하루하루의 삶이 고단한 민중들에게 '출신'은 단지 스쳐가는 바람에 불과하다.

공주출신 조병갑, 고창출신 전봉준, 정읍출신 김경천

필자가 조병갑이 공주출신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번 전봉준장군 피체유지적 비문 파문이 일어난 후의 일이다. “언제 공주출신 조병갑이란 말 들어본 적 있느냐” 라는 문제제기는 참으로 타당하다.

사실 김경천이 전봉준 장군의 수하였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고부(지금의 덕천면) 달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정읍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경계를 넘어선 순간, 행정과 권력이 그어놓은 시-군의 경계를 넘어선 순간 김경천은 ‘출신’상 문제적 인물이 되었다.

다시 '출신의 정치학'을 빌어 말하면 이렇다. 일제가 만들고 오늘의 권력이 때에 맞춰 적절히 이용하려드는 행정구역의 정치논리에 민초들이 휩쓸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민초들에게 순창과 고창과 부안과 정읍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더욱이 동학농민혁명의 포접조직은 손화중포, 김개남포, 김덕명포와 같이 지역의 거점은 있었으나 주요 지도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물론 동학농민혁명의 과정도 행정적 지역적 경계와는 무관하게 전개되었다. 혁명은 고부를 중심으로 무장, 백산, 태인, 장성, 금구, 원평으로 확산하고 재구성되어 갔다. 혁명의 파장(물결)엔 경계가 없다.

동학농민혁명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몫도 고창 당촌 출신 전봉준과 고부 조소리 출신 전봉준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읍-고창-부안-김제-순창-남원-전주의 ‘연대망’, 그 그물코 안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람 보다 빨리 눕는' 김경천 파문이 던지는 오늘의 화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민초들의 후예

우리는 모두 동학농민혁명의 후예들이다. 보리고개 넘기는 것이 삶의 목표였고, 탐관오리의 학정에 피를 토했으며, 고향을 등지고 밤길을 내닫던, 그러면서도 마을마다 집집마다 시천주를 외우며 ‘게으른 무수장삼’의 기개를 키우던 ‘우리들’이다.

동학농민군 김경천도, 피노리의 또다른 농민들도 패배의 뒤끝엔 동아줄 같은 목숨을 잇기 위해 출향과 도피, 굴종과 침묵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봉준을 관군의 손에 넘기고 군수가 되고 뭐가 되었다는 이야기 속에 마을사람들에게 몇푼 떡고물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김경천이 훗날 고향 고부에 돌아와 거렁뱅이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는 속설이나, 전봉준 장군이 때가 된 것을 알고 김경천과 부하들에게 신고하라고 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전해내려온다. 눈물겹도록 애닳다.

전봉준 장군의 절명시가 생각난다. 남쪽 한끝 변방 고부땅에서 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약을 지어주며, 한편으로 뭇 동사(同事)들과 더불어 개벽을 도모했던 녹두장군이 떠오른다. 때를 맞나 천하가 함께 했던 시절, 고향을 떠났던 이들 다시 돌아와 밥상공동체를 이루고, '출신'을 떠나 '출향'한 사람들끼리 희망과 포한의 피눈물을 나누었던 민초들, ‘사발의 꿈’... 그 꿈은 살아있다.

時來天地階同力
運去英雄不自謀
愛民正義我無失
愛國丹心誰有知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
운 다하니 영웅도 또한 어쩔 수가 없구나
백성을 사랑한 정의가 무슨 허물이랴
나라위한 일편단심 누가 알아주리오

*사족: 오늘 필자의 생각에 '國'은 민중들의 집이다. 녹두장군과 동학의 보국은 안민의 도구일 뿐, 그들의 왕조가 지키려 한 것이 아니다.



-정읍통문(tongmun.net)
-주요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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