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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생활] 비오는 날 이상한 전화 한통

황희숙( 1) 2003.05.03 22:44 추천:4

비가오는 날이었다. 우주(雨酒)회 회원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던 나는 2달간 금주하겠다던 약속을 지키느라 비가 와도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봄비가 장마비처럼 주룩주룩 지루하게 내리던 며칠전 오후 난 한통의 상담전화를 받았다. 올해 25세라고 하는데 더 어려보이는 목소리로 "사는게 힘들다"고 했다.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임금이 체불되었다던가, 퇴직금을 아직도 받지 못했다던가하는 내용이 대다수인데... 그리고 인생 상담하는 능력도 없는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요." "저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취직해서 직장에 나가면 다음날부터 나오지 말라고 해요"

음 .... 좀 덜 떨어진 사람이거나, 사회 부적응자이군.... 나는 어느새 혼자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생활보호대상자인 어머니와 살고 있는데 자기가 돈을 벌 수 있는 조건이 되므로 그 혜택도 이제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우울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 이런 사람이 정상이 아니지... 난 내가 내린 결론에 확실한 증거라도 잡은 것처럼 그의 우울증이 있다는 말이 당연한 것처럼 들렸다.


'아담'의 전화

어느새 나는 오늘처럼 비가오고 날씨가 꾸물꾸물해지면 더욱 기승을 부리는 여학교 앞에 자주 출몰한다는 그 '아담'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사람도 아마 그런 사람일거야!

"아, 그러세요.. 그러면 전문가에게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알죠. 근데 시내 버스비도 없는데 어떻게 치료를 받아요?"
"아, 예... 그럼 어떻게 하죠?"
나도 내가 먼저 꺼낸 말에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잔뜩 기대하고 있는 그를 실망시킬 수가 없어서 대뜸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제가 무료로 상담하고 치료받을 수 있는 곳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랬는데 그는 거짓말처럼 자신의 이름과 핸드폰번호를 알려주었다. 꼭 연락을 달라는 것이었다. 원래 이상한 전화는 익명으로 자기 할말만 하고 끊어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아아... 내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닌가?

전화를 끊고 나서부터 고민이 되었다. 세상살기 힘들고 사람들이 무섭다는 그의 말에 나는 왜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쉽게 단정지었을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세상이 살기 좋은 곳은 아니니까... 그는 어느 직장에서 일하다가 상처를 입었거나 경쟁이 심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마음이 여린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일꺼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마음이 여린 그를...

설령 그 사람이 나중에 알고보니 '아담'같은 부류라 하더라도 지금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확인된 것이 없지 않은가... 나름대로 다른 사람의 심정을 이해해주는 척, 상담하면서 정작 내 편견에 가득찬 잣대로 다른 사람을 재단하고 있었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을 찾아 얼마나 많이 이렇게 전화 다이얼을 눌렀을까... 갑자기 그에 대한 연민과 내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집에 가서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을 달래기 위해 책도 읽어보고 음악도 들어보았지만 끝내 잠을 설치고 말았다.

다음날 그는 어떻게 되었냐며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다행히 무료로 상담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을 알아두어서 그곳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또 전화하시라고... 하면서 나는 전화를 끊었다.

오늘 그날처럼 똑같이 비가 내리고 있다. 그는 여전히 누군가와 상담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일러준 곳에서 위안을 찾았을까... 그로 인해 비가 오는 날 어김없이 생각나는 소주 말고도 또 생각나는 것이 생겼다.

세상살기 힘들고, 방황하는 청춘을 위해... 비오는 날, 소주를 마셔야겠다. 금주기간이 끝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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