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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섯개의 시선'을 보는 시선(1)

김여현( 1) 2003.04.29 20:24 추천:3

[편집자 주] 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선을 보인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 프로젝트 '6인의 시선'. 한편에서는 자칫 지루하고 딱딱한 인권이라는 소재를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며 칭찬하고, 한편에서는 영화의 기획과 제작과정, 그리고 여섯편의 작품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부실함(!)에 대한 비판한다. 여기 '6개의 시선'을 본 두 기자의 영화평을 싣는다. 다른 의견이 있다면 기고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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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질적으로 좋은 날씨속에서 올해로 전주국제영화제가 대안을 찾아 떠난지 4회째가 됐다.대중에게 친절한 여타 영화제와는 달리 대안영화라는 배를 타고 오는 동안 풍랑도 만나고 난파도 됐지만 그 모습은 점점 뚜렷해 지는것을 느낀다.배의 색깔이 달라졌다고도 사람들은 말한다.하지만 그 뱃머리는 여전히 유효했다고 느낀것이 바로 이 영화, 영화제의 개막작이기도 했던 '6인의 시선'을 통해서 였다.

충무로에서 소위 잘 나간다는(나갔던) 감독들이 인권위와 함께 만든 인권영화 프로젝트 '6인의 시선'은 우리가 생각하던 인권이란 거대한 그물망 안에서 조금 벗어난 일상의 부조리함을 다루고 있다.쉽게말해 대중매체에서 그럴싸하게 떠들어 대는 존엄한 인간의 권리대신에 일상에서 털썩 주저 앉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였다.

여균동감독의 <대륙횡단>,정재은감독의 <그 남자의 事情>,박광수감독의 <얼굴값>,임순례감독의<그녀의 무게>,박진표감독의 <신비한 영어나라>,박찬욱감독의 <믿거나 말거나,찬드라의 경우>가차례로 상영되면서 나는 인권을 말하는 수억분의 6을 만날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고,모두가 인권인냥 떠들어 대지 않아 안도했으며 인권이 다양하게 해석될수 있단 사실에 안도했다.


여균동 감독의 <대륙횡단>

김문주라는 한 장애인의 일상안에서 벌어지는 13개의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는 여균동감독의 <대륙횡단>은 여감독 특유의 재치와 의식을 느낄수 있는 작품이였는데 특히 '18년만의 외출'과 '이력서'란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였다.

큰 맘먹고 불편한 다리를 끌고 집밖으로 나온 김문주씨는 현관문을 닫으려 하지만 열쇠는 좀처럼 구멍에 들어가지 않고,그걸 본 이웃주민은 도리어 문을 열어 들어가게 해주는 친절아닌 친절을 베푼 에피소드였는데 결국 장애는 나오는것이 아니라 안으로 감추고 보호받아야 한다는 사회의 알량한 선정을 꼬집는 작품의 궁극적 의문이였던것 같다.장애人이 아니라 장애者라는 인식은 인간을 분류했던 신의 장난을 똑같이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짓이지만 결국 인간은 신이 만든 우주의 조각이기에 조각의 역활에 충실할수 밖에 없지 않은가? 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다.장애인에게 외출은 언제까지나 일탈일수 밖에 없는 재미없는 세상이다. 재미는 우리만 보는 완벽한 세상..

'이력서'란 두번째 단편은 직장을 구하려는 김문주씨가 이력서에 붙일 증명사진을 찍는 다양한 표정을 담고있다.웃어도 보고 제법 진지하게도 해보지만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얼굴근육은 움직여봤자 그대로다.

나에게도 증명사진은 언제나 두렵다.내 얼굴이 그대로 찍힌다는 부끄러움보단 내가 날 보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어색하기 때문이다.하물며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인정해도 인정할수없는 내 몸뚱아리와 내 정신,그것은 1초가 아니라 1년일것이다.내가 나를 보고자 하는것.그것은 장애인에겐 넘어야할 숙제며 그 숙제를 푸는 과정은 너무나 힘들다.답도 없다.환장할수 밖에 없는 그 문제를 지금 김문주씨는 사진을 통해 풀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저 사진사일뿐이다.나도 너도,카메라밖에서 끊임없이 찍어대기만 하는 불멸의 사진사로써 자부심을 갖고 있지 않은가?


정재은 감독의 <그 남자의 事情>

두번째로 상영된 정재은 감독의 <그 남자의 事情>은 성범죄자의 신상공개에 대한 의문과 그 범죄의 근원을 묻는 다소 난해한 영화였다.솔직히 말해서 성범죄자에 대한 변명은 어떠한 경우에도 옳지않다.

그것은 범죄 자체를 해석하자는 짓이고 결국 찬반을 가르는 비생산적인 논쟁을 부른다.공개하냐 마냐하는 의미없는 메아리속에서 작품은 한 발 물러서 범죄자 자체에 비중을 두지 않았다.그 사람을 둘러싼 더 큰 범죄의 근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듯 했다.결국 그 남자에게로 돌아가는건 유일하게 관심을 가진 한 아이라는 설정에서 그 이유를 찾을수 있다.그렇다면 성범죄자의 인권을 말하자는 것인가,아님 아이를 둘러싼 사회의 무관심을 말하는 것인가,또 아님 아이를 내모는 곳이 결국 성범죄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말하는 것인가가 헷갈린다.

인권영화에 끼기엔 너무나 잘 만든(?) 이 영화는 인권을 표방할때 영화적인 기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훌륭한 보기일뿐이다.잘 만든건 이래서 고생이다.


박광수 감독의 <얼굴값>

세번째로 상영된 박광수 감독의 <얼굴값>은 얼굴값이란 허상을 통해 우리가 너무나 쉽게 지나갈수 있는 일상의 차별을 건들어 봤다는 감독의 쑥쓰러운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관객의 호응도 제일 적었다.사실 호응이라기 보단 그저 막간에 하나 낀 AD(광고)에 대한 분분한 품평에 가까웠다고 보는게 좋을듯 싶다. 박광수감독은 그의 신작 <방아쇠>준비에 여념이 없을때 인권프로젝트에 낼 영화에 투자할 시간이 모자랐다고 한다.버릇없게 한 가지만 묻고 싶다.인권프로젝트는 잠시 시간을 투자할 종류라고 봤다면 큰 오산이다.그러면 변명을 말았어야 옳다.변명은 그 종류에 대한 확신을 점점 더 굳게 만들뿐이니까.

나 혼자 난리나서 흥분하는 것이 아니다.줄거리는 우리가 너무나 쉽게 지나갈수 있는 일상의 차별이란 이름으로 차별하기로 한다.차별은 정말 쉽게 지나갈수 있는 것이라고 하니까.


임순례 감독의 <그녀의 무게>

네번째로 상영된 임순례 감독의 <그녀의 무게>는 긴 말 필요없이 감독 자신을 표방한 진정한 인권(?)영화였다.자고로 인권을 말할때 언제나 사진사가 되는 우리가 진정한 작품을 찍을수 없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내가 아니라 너라는 인권을 말하는 박광수감독의 '차별정신'을 너무나도 잘 따르기 때문이다.

제목에서도 충분히 음미할수 있듯이 이 작품은 한 인간의 무게를 통해 사회가 보는 무게와 그녀가 생각하는 무게를 말하고 있다.몸의 무게가 조금 더 나가는 한 여자아이가 있다.그 아이의 이뻐지려는 노력은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타성으로 만들어진 견고한 탑이다. 취직을 위해 한 쌍꺼풀 수술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면접장에서 뛰쳐 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웃어대는 사람들을 통해 한층 더 초라해 보인다.어느것 하나 내가 만든 노력도 초라함도 없다.철저히 보는 관점에 의한 일종의 소외감일뿐이다.

하긴 이렇게 말하는 내가 조금 민망한것이 나 역시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는 그들에 대한 일종의 알수 없는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거부감이라기 보단 딱하다는 자만심이 들어버리는 의식의 뿌리는 결코 썩을 생각이 없나보다.제도권의 완벽한 교육아래 자란 썩지않는 뿌리를 가지고 여태껏 나 살아왔던 것이다.작품의 메이킹에 가면 촬영스텝을 보며 영화를 찍냐고 묻는 한 술주정뱅이가 감독이 누구냐고 묻자 스텝은 한 여자를 가르키고 그 사람은 대뜸 놀라며 반문한다. "저 뚱뚱한 여자가 감독이라고?". 이 멋진 자아의 표현 앞에서 난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인권은 이렇게 자신을 보여줄지도 아는 쿨한 감성을 필요로 한다.우리가 바로 찍히는 인권의 소재,인간임을 잊지 말길...


박진표 감독의 <신비한 영어나라>

다섯번째로 상영된 박진표 감독의 <신비한 영어나라>는 L과 R의 발음을 구분하기 위해 우리 아이들을 뱀파이어로 만드는 설소대수술을 통해 남의 것을 내것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의 아이러니함을 꼬집는다.

혀를 변화시켜 서라도 L과 R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언어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 한다면 말릴 이유는 없다.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자기 자식들을 수술대 위에 눕혀 놓고 단지 L과 R의 구분을 위하여 혀를 바꾸는 부모의 이기심은 다시말해 판단력없는 아이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일방적인 폭력이다.마치 일제의 마루타와도 같은 이 시술은 L과 R을 구분할수 있는 능력을 줄진 몰라도 아이에게 L과 R의 어두운 과거를 줄수도 있단 생각은 하지 못할까? 기존의 인권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몸의 장애나 세상을 어느정도 살아온 중반의 피로함을 표현하는데 급급했다.

하지만 이 영화 <신비한 영어나라>는 무기력한 아이들을 통해 일방적인 폭력을 사랑으로 표방하는 부모와 사회의 요구앞에 의문을 던진다.이런 발상의 전환은 언제나 신선한 자극이 된다.자극은 곧 인권을 조금더 쉽게 다가가게 만드는 지름길이 될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

마지막으로 상영된 박찬욱 감독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는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알수 없던 작품이였다.감독이 두리뭉실하게 제시한 믿거나 말거나의 시작은 찬드라 구룽이란 네팔노동자를 통해 6년 4개월 동안 병원과 요양소를 전전할수 밖에 없던 사연을 풀어간다.우리말을 못한다는 이유는 그녀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점점 더 새로운 공간과 결론을 내린다.단지 그녀가 네팔사람이란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네팔어를 웅얼거리는 한국인 정신병자로 단정짓는 모습은 우리가 얼마나 비주류에 무관심 했던가를 말한다.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눈물과 감동으로 선사하는 이 작품이 픽션일때 과연 얼마나 어이없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말해 픽션으로 인권을 보여준다는 그 자체다.

여기서 깊게 생각해야 될것은 설정과 픽션은 다르다.기본적으로 감독이 인권을 말하려는 소소한 태도가 설정이 아니라 픽션일때, 그랬을까? 하는 공허한 메세지만이 남기 때문이다.눈물은 흘리지만 믿거나 말라는 감독의 가벼움이 결국 인권을 표방한것에 불과했다는 배신감마저 낳는다.인권은 픽션이 아니라 현실이다.픽션
이였다면 얼마나 좋을까였다면 내가 한 앞에 말은 부정해도 무방하지만.


'시선'에 그친 6인의 시선

6개의 시선을 통해 6개의 인권을 말한 6명의 감독의 영화가 차례대로 끝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인권은 참으로 다양하다는것,인권은 누구나 말할수 있다는것,그리고 영화적 접근은 인권의 한계라는 생각이다. 마지막에 이 영화의 전체적인 프로듀서를 담당한 이현승감독의 구질구질한 변명이 생각난다.이 영화들이 인권이냐고 반문하신다면 인권은 결코 무거운 부조리들만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때론 지나칠수 있는 우리의 일상안에서 무시당하고 무관심한 모든것들 이라고.

그렇다.일상의 것이기에,일상의 영화기에 깔끔하게 지나치며 이 영화를 정리할까 한다. 영화로 만들어서 영화로 말한 일관성에 대해서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인권은 영화로 만들기 전에 모두 뜯어 고쳐야 할 삶의 숙제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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